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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명 Dec 01. 2023

하필 왜 이런 곳이야?

한국인도 없고, 상가도 없고, 병원도, 약국도 없고,....

   “아니, 왜 하필 이런데 들어와서 살아?

   나를 방문한 동포들은 질문을 가장한 핀잔을 앞세웁니다. 뭐 하나 볼 것 없는 후줄근한 시골, 한국사람도 하나 없고, 병원도 약국도 없는데 나중에 병이라도 나면 어쩔 거냐고 걱정합니다.

   방문자들 뿐만이 아닙니다. 이 동네 토박이들도 처음에는 다 그렇게 물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도 나는데 연고도 없는 외국인 여자가 혈혈단신으로 찾아들다니 아무래도 심상찮은 사연을 감추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 모양이었습니다. 집을 중개해 준 부동산 사무실에서는 내 신원조회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게 의당 지켜야 할 이 동네의 규정이라도 되는 줄 알고 오히려 기쁘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한테만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내 담당 중개사 패티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언짢아야 할 표정을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포장하고 그녀를 협박(?)했습니다.

   "늬들, 영어가 형편없다우습게 본거지? 이래 봬도 주립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사람인데, 이래도 되는겨?"

   농담 같은 내 말에도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낭패한 표정이었습니다.

   "저녁을 살거야? 술을 살거야? 내 입이라도 달래야지."

   "어, 둘 다 살게."

   그녀가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마을의 두 식당들 가운데 좀 더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먹고 마시며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인종차별이라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당하는 것보다 과장되게 느끼는 것은 피하려고 합니다. 자격지심이라 할까요? 자칫 내가 나를 차별하는 자기 함정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저들의 입장에서 상황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내 세울 것도 비전도 없어서 토박이들조차 떠나가는 쇠락한 동네에, 낯 설고 말 설고 문화도 설은 한 여자가 불쑥 찾아들어 온다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남편도 자식도 직업도 없이 홀로서기를 하겠다는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보일까요?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말이지요. 내 생각에는 충분히 이상해 보일 것 같았습니다. 인종차별이라고 우기기엔 좀 과장된 피해의식이 가미된 듯도 합니다. 

   물론 나를 대놓고 경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종차별이구나 느끼게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일을 당했다는 얘기를 하면 동포들은 그것 보라며 언짢아합니다. 그러게 왜 그런 곳에 들어갔느냐고, 당장 그곳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미국에서 인종차별 안하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반박합니다. 한국인들의 인종차별도 장난아니지 않냐는 말도 합니다. 거처를 옮기는 일이 자동차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수월한 게 아니라는 말 대신에, 그렇게 합리화 시키려고 합니다.

   사실 나도 하필이면 이런 곳에 들어와 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저 유명한 큰 바위 얼굴이 보이는 산동네, 키스톤 (Keystone) 어디쯤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 보다 더 원래는 록키산 국립공원 너머의 산자락 그림 같은 집을 욕심 냈더랬습니다. 또 그 보다 더 원래는 주저앉아 상상의 집까지 지어보았던 테네시 주의 어느 계곡이었습니다. 자동차로 45개의 주를 누비면서 점찍고 눈독을 들였던 원래의 장소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숲이 우거지고 야생화 융단이 깔려 있는 주변에는 맑은 호수, 또는 냇물이 반짝이고 있는 곳들이었습니다. 화려한 대도시나 낭만의 바닷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는 바닷가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면서 우거진 숲과 반짝이는 물도 없는 동네입니다. 하필이면 나는 이런 곳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돈 때문이었을겁니다. 갚아야 할 대출금 없이 집과 자동차를 장만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의 노예가 되지 않고 마음 여유로운 자유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게다가 나는 결코 화려한 저택에서 첨단의 문명을 향유할 능력도 취향도 갖추지 못한 천상 시골뜨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을 누리기 위해 치루어야 할 희생이나 대가가 두려웠다는 게 맞을 것입니다.

   

   하필이면 왜?라는 질문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내 삶은 출생부터가 그런 의문에서 시작되어 그런 의문들로 점철되어 있는 듯합니다. 작은 언니와 나는 하필이면 왜 그런 시절 그런 부모에게 태어났을까 원망하면서 자랐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원망을 끄집어 올릴 때가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숱하게 많은 하필이면 왜?라는 상황에 부딪혔는데, 그것은 마치 부피 큰 실타래처럼 시작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물음표였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를 닮은 의문부호였습니다.

   하필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잘못된 선택이거나 실수를 의미하고, 때로는 최악의 상황이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필의 상황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내가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결코 피했을 조건, 단연코 거부했을 상황, 완강히 밀어냈을 횡액입니다. 때문에 '하필이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는 질책과 원망이 수반됩니다. 상황이 심각할수록 더 크고 무거운 원망과 함께 그러한 불행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 함께 합니다. 하필이면 내게 닥쳐온 그 커다란 불운이 어떤 막강한 존재의 노여움이거나 체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맞서 싸울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필연이 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이나 행위는 한 점에 응집됩니다.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존재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귀신이나 잡신을 믿는 사람들은 무당을 찾거나 굿을 할 것이며, 불교인들은 사찰을 찾아 불상에 치성을 올릴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께 구합니다. 두려움에 떨며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고 맡기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면서요. 하필이면 내게 주어진 상황이 실수나 불운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 하면서요. 원망과 불평은 감사와 기쁨의 반대가 되니까, 문장을 뒤집어 보았습니다. 

   "하필이면 왜, 저 같은 철부지를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말입니다. 일반적, 보편적인 것을 뒤집으면 주눅 든 독창성이 기를 펴고 일어날 것 같습니다. 화석이 된 관념을 매장시켜야 유연한 자의식의 부활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직립의 자세로는 들을 수 없는 응답이 거꾸로 엎드린 귀에는 와닿을 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저를 데려다 놓으셔서 바깥세상에 만연하는 전염병과 혐오범죄의 위기를 모면하게 하시는군요."

   물음표를 떼 낸 '하필이면'이라는 말이 미소를 짓습니다. 삶에도 물음표보다는 느낌표나 마침표를 붙이면 불운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행운이 되어 미소 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작년의 새해 이브, 가족 같은 친구네 거실에서 바라본 서부의 겨울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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