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은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어, 닦아야지.
나는 오늘 차를 긁었다.
2023년 5월 8일에 출고된 뉴 그랜저.
애초에 이 차는 내가 타려고 산 차가 아니었다.
내 차는 2013년 식, 주인이 3번이나 바뀌고 비로소 나에게 오게 된, 하얀색 비둘기를 닮아 '흰비둥'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중고 스파크였다. 나는 그 차를 2019년도 6월에 시아주버님(세 번째 차주)에게서 매입하여 아들 둘과 토끼 같은 남편 하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잘 다녔었다. 발목이 부러질 것 같아도 참고 두 시간을 달려 여수 여행도 갔었고, 덤프트럭이 지나가면 날아갈 것만 같은 아찔한 기분에도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비록 많이 작고, 낡고, 더러웠지만(내가 청소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데다 흰색이라 유독 더 더러워 보였다.) 우리 가족에게 많은 추억을 안겨준 멋진 차였다.
하지만 우리 흰비둥이 우리 아빠의 눈에는 탐탁지 않았나 보다. 아빠는 어린 아들 둘을 태우고, 카시트 두 개를 넣고 달리는 흰비둥이 위태해 보였는지, 자신의 차와 바꾸기를 제안하였고, 여러 번 거절한 끝에 결국 나는 2011년에 출고된 아버지의 회색 그랜저를 몰고 다니게 된다. 누가 봐도 아빠가 물려준 차였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랑 차를 바꾼 아빠는 그 조그마한 스파크를 타고 다녔는데, 평생을 소나타 이하로 몰아 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그 작은 상자에서 나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ㅓㅓㅓㅓㅓㅓㅓㅓㅓ무나도 속이 상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거의 몸을 구겨 넣어야 그 작은 스파크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딸년은 칼만 안 든 강도라는 말이 하차감을 상실한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느껴져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그래서 겸사겸사, 엄마의 환갑도 겸사겸사, 새 차 한 대를 뽑기로 하고 뽑은 것이 바로 이 뉴-그랜져 되시겠다. 날짜도 어쩜 5월 8일에 딱 출고가 되어 엄마의 지난 환갑과 새로운 어버이날을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의 친구였다. 하지만 아빠는, 얘를 딱 일 년만 타고서는 2024년 5월 8일 나에게 키를 넘기셨다. 아빠, 나는 아반떼 타고 싶다고 했잖아.
무튼 오늘 나는 차를 긁었다. 오늘 아침 너무나도 바빴던 탓에 안경을 찾지 못하고 밖을 나섰고, 생각해 보니 오늘은 중고등부 친구들을 데리고 시내에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눈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 별생각 없이 운전을 하고 갔는데, 지하에 주차한 차를 빼서 지상으로 올라온 순간, 육면체 모양의 회색 돌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찌-익, 뒷좌석 오른쪽 문짝을 시원하게 긁어먹었다. 더운 여름, 더위가 한 번에 가실 만큼 시원-하게.
어떡해요? 차 긁은 것 같은데?
차에 탄 아가들이 놀라서 안절부절못한다. 뭐, 사람 안 쳤으니까 괜찮고, 다른 차 안 긁었으니까 괜찮지. 머릿속으로 대충 복구비용 생각해 보면 문짝이랑 타이어 다 갈아야 하니까 200만 원 이쪽저쪽 나올 것 같다. 그냥 덧칠만 하면 되는 거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모서리 부분에 철판이 아예 찍혀서 깊이 파여있다. 그렇지만 뭐 어떡하나, 이미 파여버린걸. 괜찮다고 하고, 노래방도 잘 가고 저녁밥도 잘 먹었다. 그리고 거의 빨강 하양 동그라미 대잔치인 밤길 운전은 매우 조심조심 천천히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일수록 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뭐 굉장히 chill 한 성격이라서 나, 아니면 진짜로 200쯤은 우스운 부자라서가 아니라, 진짜 뭐 어쩔 수 없으니 말이다. 원체 후회를 안 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다, 나는 한 번 후회하기로 하면 태어난 것까지 후회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침에 안경이 없이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애초에 안경을 매번 같은 자리에 두지 않으니까 그게 문제잖아, 애초에 안경 자리가 없는 건 나한테 정리하는 습관이 없어서지, 정리는 왜 못하는데? 물건이 너무 많으니까 그렇지, 물건은 왜 많아? 네가 많이 사니까 물건이 많지, 그러면 문제는 소비습관이네, 소비습관이 엉망이라 뭐 하나 살 때 집에 있나 없나 확인도 안 하고 사니까 그 모양이지, 애초에 산 거 다 쓰고 다시 사냐? 있는 거 반도 못쓰고 새로 살 때가 더 많지 않아? 그니까 정리가 안되지, 정리가 안 되는 건 어릴 때부터 정리하는 습관이 안 들어서지, 정리하는 습관은 엄마가 다 해줘 버릇해서 안 들은 거지, 그러면 엄마가 잘못했네? 아니지 아빠가 잘못했지, 그니까 스파크 몰던 애한테 그랜져를 쥐어주니까 문제지, 내가 애초에 그랜져는 나한테 너무 과분하고 사회적 시선도 과분하다고 했잖아, 누가 봐도 아빠 찬데 나는 아반떼 몰고 싶다니까 아빠는 나한테 새 차를 줘서 새 차를 긁게 해, 아니 그냥 스파크 타고 나왔으면 시내 주차도 쉽고 얼마나 좋아, 아니지 고작 문짝 200만 원에 기분이 상한 건 내가 그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지, 내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건 사실 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이 일을 안 해서지, 남편이 좀만 더 성실했더라면 문짝 하나 긁은 걸로 이렇게 속이 안 상하겠지, 좀 더 성실한 남편을 만날걸, 아니 애초에 내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풀이 이 정도밖에 안되었던 게 문제지, 그러면 공부 좀만 더 열심히 해서 역시 서울대를 갔어야 했는데, 그때 아빠 말을 듣지 말고 공대를 갔었어야 좀 더 성실하고 연봉 높은 남자를 만났을 텐데, 공부는 충분히 잘했지, 아빠가 원서를 이상하게 쓰라해서 그런 거지,
여기까지 숨도 안 쉬고 썼다. 내가 후회를 한번 하기 시작하면, 나는 태어난 것부터 후회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애초에 내가 태어난 것부터가 경제적 손해고 가정의 불이익이고 탄소배출 덩어리고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키는 일인 후회뿐인 사람이다. 후회는 괜히 엄한 시간과 엄한 공간에 있는 엄한 사람에게 화살을 쏘아버린다. 먼저는 나 자신,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해친다. 그래서 나는 후회하는 것을 싫어한다. 어차피 일어난 일, 지나간 일, 어쩔 수 없는 일을 최대한 빨리 잊는다. 그리고 진짜 괜찮다.
이렇게 잃은 돈이 n천만 원은 족히 넘을 것이다. 이러한 실수로, 부주의로, 잘못된 선택으로. 나는 잘못된 투자로 굉장히 큰돈을 잃어도 봤고, 탑승 9시간 전의 비행기 표도 날려봤고, 아이폰과 Z플립 액정도 여러 번 박살내서 액정 값이 기기 값을 넘어서도 봤고, 받아야 할 연수를 6년이나 미뤄(사정이 있었다지만) 호봉 승급도 늦었고, 출산휴가도 열흘이나 못 챙겨 먹었고, 뭐 하나씩 다 적어보면 하여간 복장 터져서 못 살 것이다. 나의 이런 공간감의 부재로 인한 부주의함과 나아지지 않는 마이너스의 손, 계산에 둔한 뇌세포들, 시시때때로 팔랑거리는 귀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하지만 후회해 보아야 무얼 하나. 나는 변하지 않는데, 그냥 잊어야지. 이런 나를 긍정하고 지난 일은 잊어야지. 이 실수로 오랫동안 속상해하고, 마음 쓰고, 매여있는 것이 더 손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병원 신세를 하도 많이 져서, 태어났을 때부터 의료비로만 이미 마이너스인 사람이다. 이런 걸 계산하고 속상해하기로 들면, 지금 당장 인생을 절단 내는 게 플러스일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떡해, 이게 나인걸. 속 좀 상하면 달콤한 디저트 사먹으면 된다.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쿨하게 다짐 하나 하고 오늘의 사건은 마무리하기로 한다.
안경을 매일 똑같은 자리에 두고 잠을 자자.
안경이 없으면 운전대를 잡지 말자.
그러니까 다들 이불 그만 발로 차고, simple하게 현재만 살자.
매몰비용은 잊고, 더 괜찮은 내일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