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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의 우물이 필요할 뿐이야

우물 안 개구리의 현대판 최신 번역본

by 첫둘셋

2009년 3월, 대학교 CC였던 나는 갑자기 상대방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넋이 나가 있었다. 전교생 2000명의 개코딱지만 한 학교, 전체 인원 20명도 안 되는 개미코딱지만 한 동아리, 그 안에서 사귀던 우리는 하루아침에 남이 되었고, 근데 내가 동아리 회장(!)이라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휴학을 하던지 인생 하직을 하던지 뭐라도 하고 싶은 나날들이었다. 날짜상으로는 3월 말이었지만 아직 봄이 오기 전, 마지막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 하루를 온전히 날려버리고 가평으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더랬다. 검은색 패딩을 입고, 충동적으로 한 뽀글이 파마머리를 한 채, 누가 봐도 사연 있어 보이는 얼굴로 혼자 가평 여행을 떠나는 20대 초반의 여성, 그게 나였다.


약간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못 이겨 떠났지만, 가평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프더라. 울때 울더라도 밥은 먹어야 살아지니까 나의 최애 음식, 전 세계가 열광하는 K-Food의 정수인 김밥을 먹기 위해 바로 앞의 김밥집에 들어갔다. 김밥집은 조그마했고, 어지간히 깔끔한 것이 이제 막 새로 오픈을 한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이니 나는 당연히 제일 첫 손님이었고, 김밥집의 사장님은 이제 막 결혼한 듯한 신혼부부였다. 말 그대로 처음의, 처음의, 처음의, 처음을 느낄 수 있는 곳. 그 둘 사이의 기류는 바깥의 찬 바람을 몰아낼 만큼 훈훈했고, 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함에도 나는 이 작은 김밥집에서 그들이 꿈꾸는 미래와 희망이 보였다. 겨우 김밥 한 줄 먹고 문을 나서는데 엄청난 것을 보고 나온 느낌이었다. 사실상 이 여행은 여기서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에 방문한 남이섬에서는 3월 말임에도 불구하고 따가운 진눈깨비가 흩뿌렸다는 것과, 현장체험학습을 나온 듯한 초등학생 무리 중 누군가가 나에게 '아줌마'라고 불렀다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하루 종일 내가 아침에 본 이제 막 오픈한 신혼부부의 김밥집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그랬어. 나는 다만 나의 우물이 필요했을 뿐이다.


옛 성현들의 말씀이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랬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도 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일단 큰 물로 보내곤 했다. 그렇게 갑자기 스무 살이 되어서 홀로 서울로 보내진 용은 갑자기 우물을 잃었다. 그리고 사실은 용도 아니었다. 불을 막 뿜어대는, 하늘을 막 날아다니는, 눈이 막 부리부리한 용들 사이에서 나는 송사리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송사리인 것을 들키면 안 되는, 용인체 하는 송사리. 송사리는 늘 개천이 그리웠다. 우물 안 개구리가 부러웠다.


우물 안 개구리, 좁은 우물 속에 살면서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는 개구리를 빗대어,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자기 좁은 견문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 하지만 개구리야, 넌 너의 우물이 있잖아. 우물 밖엔 바다가 있을 줄 알았는데, 더 커다란 우물이 있었어. 그곳이 우물인지도 모르는, 고이고 고이고 고여서 썩어가는, 드넓은 바다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거대한 우물이던 곳이 있었어. 개구리고, 송사리고, 용이고, 뱀이고 모두가 숨도 못 쉬게 빽빽하게 뒤엉켜 괴로움을 말하는, 하지만 아무도 그 밖으로 나오려고는 하지 않는, 거대한 우물.


아마도 옛 성현들은 4차 산업혁명까지는 예견하지는 못 한 모양이야.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첨단 기술이 삶을 지배하는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우물 안에서도 얼마든지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겠지. 세계 여행은 취미가 되고 한 달 살기는 트렌드가 된 이 시대에 우물 밖을 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바다를 보고 자란 우리들에게는 끝없는 부유와 표류를 끝낼 각자의 온전히 안락한 우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한없이 이어진,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수평선인지 벽인지도 모르겠는 어디인가를 그만 바라보기로 했다. 내가 개구리만 한 송사리라는 것도 인정하기로 했다. 내 우물을 쌓기로 했다.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쳐도, 용들이 아무리 부대끼며 싸워대도 흔들리지 않을 나의 작고 안락한 우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몇 명이 겨우 들어와 같이 헤엄치고 놀 수 있는 우물. 작고 초라할지언정 더 이상 부표가 필요 없는, 좌표 정도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우물.


더 커지지 않아도 돼. 더 견고하지 않아도 돼. 지금도 충분히 아늑해. 다른 곳에 다시 만들어도 돼. 우물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우물 안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가 중요해. 우물 안의 환경을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보자. 심심하면 얼마든지 나갔다 들어올 수 있어. 얼마든지 진짜 바다를 찾으러 떠나봐. 하지만 여기에 다시 돌아올 너의 우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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