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을 심었으니 너는 콩이고, 팥을 심었으니 너는 팥이란다
자고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이다.
멀리 안 가고 나의 할머니 시절만 해도 애를 8명을 낳으면 3명은 일찍 죽고 5명만 살아남았다,는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10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이룩되어 버린 의료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영아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출 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생의 기간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고, 그 결과 현대인들은 아무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이 세계를 휩쓸었고, 그 결과 모두가 평등하며,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신을 찾던 사람들은, 어떤 가능성으로든 자신을 변화시켜 줄 수 있는 돈을 조금 더 찾는 편이다. 돈은 가능성 그 자체이고, 목적이고, 신분이자 지위가 되었다. 계급이 없어졌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위치를 향해 달려가고, 내가 바라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이 결국 사회가 만들어낸 욕망들의 총체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는 많지 않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결과 자기 자신의 존재도, 사랑도, 가정도, 어떤 단어도 이전의 뜻대로 쓰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나는 이것을 이렇게 정의했어. 모든 단어의 의미는 퇴색되고, 모든 자아는 어떤 단어로도 온전히 표현되지 못함에, 어떤 단어 안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하지만 콩을 심었다면, 당신은 콩이다. 팥을 심었다면 당신은 팥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태어난다. 다행히도, 그리고 불행히도 태어나면서 이미 많은 것들이 정해진다. 당신의 외모, 체형, 지능, 시력, 기질, 하다못해 머리숱까지. 모든 것은 정해져서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다행히 우리는 모두 다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고, 불행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통념'이라는 이름 하에 추구되는 '선'의 공식화된 성질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간극을 안고 살아간다. 콩은 콩대로, 팥은 팥대로의 역할과 성질이 있는 것인데, 우리는 '좋다고 여겨지는' 어떤 특성들을 가지려 혹은 가진 체 하려 인생 전반을 바치며 애쓰기도 한다.
내가 자식일 때는 몰랐는데 낳아 보니 알겠다. 첫째는 조심성이 없다, 덤벙댄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식욕이 왕성하다, 관심 있는 것에 꽂히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과격한 놀이를 즐긴다, 겁이 없다, 모험심과 관찰력이 뛰어나다, 다정하다, 집보다 학교를 더 좋아한다, 말로 반박을 잘한다, 사람의 감정을 잘 못 읽는다, 수학을 싫어하고 책을 좋아한다. 둘째는 신중하고 예민하다, 작은 일에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특히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을 힘들어한다, 철두철미하여 숙제나 준비물을 잊은 적이 없고, 시험은 늘 100점을 맞아온다, 세상에서 집을 제일 좋아한다, 엄마를 너무 좋아해서 엄마 앞에서는 3살 아기가 되면서도 눈치를 엄청 본다, 계산능력이 뛰어나 형의 수학 문제를 대신 풀어주기도 한다, 만화책만 읽는다, 축구를 무지 잘한다.
고작 아들 둘 낳았을 뿐인데, 아들에도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들! 하면 아들로서의 특성을 가진 뭔가가 뿅 하고 나오는 줄 알았는데 어쩜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내가 첫째에게 동생만큼의 신중함과 계획성을 요구한다면 우리 첫째는 숨도 못 쉬고 말라죽어버릴 것이다. 반대로 둘째에게 형만큼의 대범함과 쾌활함, 호탕함을 요구한다면 그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쥐구멍에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는 자꾸 우리에게 말한다. 뭔가 잘 빚어진, 모두가 탄성을 내지를만한, 계급이 없지만 나보다 높은 급일 것 같은 모델을 보여주며, '당신도 이렇게 될 수 있어요.'라고 한다. 그것은 외모이든, 능력이든, 자산이든, 지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설정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더 괜찮게 여겨지는 외모/능력/자산/지식. 코은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이 낫고, 무쌍보다는 유쌍이 낫고, 팔 굽혀 펴기를 잘하는 능력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매력적으로 말하는 능력이 낫고, 월급쟁이로 따박따박 들어오는 돈에 갇혀 사는 것보다 크게 벌고 자산소득으로 편안하게 사는 것이 낫고, 철학적 사유보다, 때 지난 고전소설보다 경제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이 낫고. 다양성이 보장된 사회라고는 하지만, 어째 점점 확고한 모델을 좇아가는 팔로워들만 많아지는 모습이다.
사회적인 좋음을 좇기 이전에, 당신이 무엇인지 먼저 알면 좋겠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인지, 사회는 나의 이런 모습 중 어떤 면을 강점 혹은 약점으로 분류하는지, 단점이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에 드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나만의 이야기는 무엇이 있는지, 장점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극복해야 할 부분은 아닌지, 내가 원하는 모습과 실제 나의 모습 차이의 간극은 어떠한지, 그것은 내가 진정 원하는 모습인지 어쩌다 보니 동경하게 되어버린 것인지.
당신은 콩일 수도, 팥일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당신이 콩임에도 팥시루떡이 되고 싶다거나, 팥임에도 인절미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는 순간이다. 콩이 콩임을 알지 못하고 목걸이가 되고 싶거나, 팥이 '나는 이제부터 돌멩이입니다.'라고 선언한다면, 남은 삶이 어떻겠는가? 이 험한 세상에서 나조차도 나를 부인하고, 나를 적으로 삼아 살아가면 너무 힘들다. 나만큼은 나를 알고, 인정해 주길 바란다.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하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온전한 나로 살며 내 몫을 삶을 내 뜻대로 마음껏 망치거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메워지지 않을 평생의 간극을 좇아 내달리거나.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