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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nzlerin May 15. 2022

성향이라는 이름의 지배자

사회생활을 할 만큼 했고 잘하는데도 넘지 못하는 벽이 사실은 내 자산

40대가 코앞인 지금, 아직 힘도 많고 이상주의도 적당히 남아있어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현실과 충분히 비벼지고 갈렸기에 무리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에너지를 보존하는 방법도 안다. 남보다 내가 우선 더 중요하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날 남의 기대 (사실은 나의 기대)에 맞춰 넣지도 않는다.


이 정도로 객관화가 되고 실력도 출중하니 당연히 대인관계도 훌륭하다. 위쪽으로는 할 말을 간략하게 주장할 수 있고 아래쪽으로는 노력할 수 있다. 현대사회 조직의 특성상 애초에 구성원에게 주어진 자리가 본인의 특기와 빗나가 있을 때가 있고, 그에 대한 교정은 쓴소리와 흡사할지언정 결국에는 각자가 자신에게 더 편한 자리를 잘 찾아가야만 더 행복한 구성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걸 돕는 행위를 관리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나는 나무랄 데가 없다. 머리가 좀 커 보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눈엣가시가 되는 조직환경은 차치하자. 그런 환경은 직무 특성상 그것이 필요하거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도태의 길목을 알아서 걸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머리가 클 수밖에 없는 가방끈이지만 날 제대로 볼 줄 안다면 이 또한 문제가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직을 2번 이상 경험했고, 그것이 많은 횟수는 아닐지라도, 계기와 임팩트는 나에게 매번 존재론적인 성찰을 하게 만들 정도요, 직종 자체를 바꾸게도 만들 정도였다. 이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에도 그 상황의 근본적 패턴 자체는 내 인생을 관통하는 붉은 실처럼 선형적이고 그만큼 친숙하다. 어, 또 너냐, 한동안 안 보였는데 사실 넌 계속 여기 있었네, 하는 느낌. 


벽처럼 느껴지는 무엇이다. 정확한 성분은 사람마다 극도로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벽으로서 우뚝 서 있단 사실은 동일할 것이다. 그 벽을 직면하면 전의를 잃는다. 건강한 인정 욕구와 성취의 의욕에 활활 불타고 있던 순간에도 그 벽은 순식간에 그 뜨거운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빨아들이고 난 후, 내 안에는 열기의 껍질만이 남는다. 껍질뿐인 열기란, 차가운 분노 같다. 배신감 같은, 갈 곳 없는, 영양가도 없는, 빨리 버리는 게 이득인 감정. 


그 감정을 또 며칠 삭히면 

슬픔만이 남는다. 소통이 불가능할 거란 확신이 선 것이고 그에 대한 대책까지 섰기 때문이다.

대책을 세웠다면, 다시 주도권을 내가 되찾아 온 것이기에,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만이 남는다.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 속의 못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왜 저러고 살까,


하고 끝맺으며 나만이라도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벽이다. 넘을 수도 없고 넘을 생각도 안 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가장 솔직하고 불가항력적인 본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벽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를 보호해주고 표현해주는 이 벽은

나의 성향이다. 날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 내 무한한 에너지의 보루. 액션을 취할 수 있도록 그 어떠한 대안도 남겨놓지 않는 강력한 정리자. 평소에는 나로 인해 갈고 닦여지지만 핵심 순간에는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태풍을 영웅처럼 홀로 뚫고 나와서 나를 주장하는 지배자.

성향은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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