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봄이 다시 왔다. 파블로프 반응처럼 한돌님의 노래가 머리와 입에 맴돈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은 우선 내 베란다의 화분에서 시작해서, 동네 화원에서는 꽃들이 밖에 등장하고, SNS에는 꽃 사진이 올라오면서 온 세상이 정원 천지가 된다. 그 중 제일 부러운 것은 역시 땅 몇평에 가꾸는 정원들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매일 지하철 3번 갈아타고 콘크리트 도시로 졸면서 꿈만 꾸며 출근한다.
어려서부터 나무랑 그림을 좋아해서 대학에 조경학과에 진학하고 자격증 따기도 했다. 이름에도 흙과 나무가 내이름에 한자로 들어가서 대학에서도 딱 맞는 분야라고 생각은 했지만 졸업 후 잠시 알바로 일하던 연구기관에서 옆으로 옆으로 새게 되었다. 그러다가 먹고사는 문제를 급히 해결하느라 지금은 완전히 먼 분야 직장에 오래 다니게 되었다. 그 곳은 문화예술관련 정책연구를 하는 공공기관이었는데 나무와 같이 예술, 축제, 로컬 등도 좋아해서 초기에 많은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꼈다. 다른 회사들 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열려있는 문화예술관련 공공기관이라 처음에는 문화예술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아서 정원의 꿈은 저만치 던져놓았다. 여기저기 출장도 가고 사람도 만나고 뭔가 열심히 만들어가면서 일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렇지만 만족 저편에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다른 자연과 정원에 대한 어려서부터 미련이 살살 자라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이 점점 커지며 처음과 달리 좋아하는 예술인과의 만남보다는 공무원과의 씨름에 더 몸과 마음과 시간이 소비되기 시작했다. 정책, 법, 예산 그리고 공무원, 갑질, 징계 등등이 범벅이 되었다.
뭐, 모든 직딩이 겪는 과정이겠지만, 그 모든 소용돌이 비빔밥 사이에서 하루 3시간 넘는 출근길이 짜증나고 피곤한 매일이 이어졌다.
어쩌면 직딩의 괴로움에서 피해가는 뭔가가 필요한 시점에 드다닥! 일을 저질렀다. 서울 봉천동 아파트에서 살던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생소한 경기도 의왕에서 살지 않겠냐고 던졌다. 물론 직장에서 엄청 멀어지기에 극구 반대를 했지만 일단 집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오래된 주택지에 자그마한 땅이 있는 반지하 2층 집을 보자 마자 ‘바로 여기야’ 해버리고 말았다. 급한 결정에 아내가 오히려 놀랐다. 자동차가 진입하기도 어려운 골목, 녹슨 대문, 방수에 결함이 있는 옥상, 깨친 바닥포장, 블록으로 대충 처리한 담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좁지만 흙이 보이는 땅만 눈에 보였고 사람이 있는 골목길 (아파트와 다른)만 눈에 보였다. 그렇게 해서 3년간 조그만 정원의 꿈이 열렸다.
그 다음에는 (뭐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아파트로 이사해서 베란다 확장을 하지 않고 엄청난 흙을 부어 베란다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온갖 구근을 다 실험했다. 크로커스, 튤립, 수선화, 자이언트 알리움, 백합, 다알리아. 그리고 다음에는 베란다가 확장이 된 집으로... ㅠㅠ 그렇지만 가드닝의 꿈은 화분으로 옮겨졌다. 밖으로 제라늄을 내다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해는 텃밭, 한해는 지역에서 하는 자원봉사 활동으로 천변 꾸미기도 했다. 그 자원봉사도 시청과 다른 활동가의 잘못으로 꾸며놓은 꽃밭이 한번에 베어지면서 또 좌절을 겪다가 새로운 길이 열렸다. 바로 나무의사였다. 회사 동료가 'A님 나무, 꽃 그렇게 좋아하면 전공도 했겠다 나무의사 해 보는 게 어때요?' 하는 한마디에 새로운 빛이 비춰졌다. 그 순간 직장과 하던일, 만나던 사람들과 다른 예전의 첫사랑, 나무. 자연.정원이 있는 삶으로 가는 작은 길... 나무의사를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한번의 실패 이후 양성기관 추첨이 붙어 곧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식물원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오면서, 따 놓기만 하던 조경기사, 그리고 이제 공부하는 나무의사... 새로운 내 삶의 크악 ‘혁명’을 시작해볼까 한다. 그전에...잠깐.
혁명이 싹트게 된 온갖 정원사를 향한 좌충우돌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아 볼까 한다. 뭐 자그마한 나의 인생을 요약하기로 했다. 마치 잡초 아니지, 보물 캐듯이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넣으면서 정원으로 향하는 나의 꿈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