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시련의 가치
영화에서 가끔 주인공이 위기에 직면하면 'Fight or Flight'라며 잠시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부분 Fight로 결론이 나고 멋지게 위기를 극복하지만... 실제 생명체가 환경변화나 숙적의 공격 등의 위기에 직면하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거나 적응하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사망 혹은 그 종의 멸종이다. 이 중 제일 쉬운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동물들은 위험에 직면하면 일단 도망을 간다. 이건 비겁한 것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위기 극복수단이다. 사람도 어려움에 처하면 우선 물리적으로 회피하거나 심리적으로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등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도망갈 길이 없으면 맞서 싸우는 데 지면 죽고 이기더라도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이 선택은 위험을 동반한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된 환경에 자신을 변화시켜 적응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은 쉽지만 항상성을 가진 자신을 변화시키는데도 에너지와 손해가 수반하고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면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도 부정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약한 자가 살아남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 대한 적응 기제는 인류의 역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의 역사를 개관한 역작 '총 균 쇠'에서 유럽문명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원인으로
1. 대륙별로 이동 축이 달라서(유라시아 동서축, 아메리카, 아프리카 남북축)
2. 가축화 가능한 동물의 종류, 작물화 가능한 곡식의 종류와 그 수
3. 분열된 유럽과 통일된 중국(환경의 영향) 전파가능한 배경
때문이라는 탁월한 분석을 했다. 그의 책이 훌륭한 것은 그 결론 자체보다도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지루할 정도로 세심한 자기 반문과 논증을 통해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의 결론은 한마디로 하면 시련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도망은 우선엔 쉽고 맞서 싸우는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나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최종 승리는 환경에 적응하여 변화하는 개체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강한 자가 아니라 유연하게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의 결론과도 일치하며 나의 개인적 삶의 경험과 직감에도 부합한다. 즉 공짜로 주어지거나 순조롭기만 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조그마한 변화에도 무너지기 때문에 시련이 있어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아 발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시련은 견디지 못할 만큼 너무 심하면 안 된다. 감히 제레드의 이론에 내 생각을 보태자면 유럽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인류의 각 시기의 시련을 맞이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기술 발달 수준을 가졌던 호모 사피엔스와 유럽인들이 살아남아 번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제레드의 이론은 유럽인의 승리 원인은 이야기했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왜 호모 에렉투스나 데미소바인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승리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좀 더 미시적으로 왜 유럽인 중에서도 영국인이 승리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호모 에렉투스 등 초기 인류나 데미소바인이 가진 기술력으로는 당시의 기후 변화를 이겨낼 수 없었고 (즉 시련이 너무 과다했으며) 네안데르탈인은 기후 변화에는 살아남을 만큼 강인했지만 좀 더 유연했던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패했다. 즉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이 가진 날렵한 체구와 바늘로 만든 옷과 불과 도구제작 능력으로 거친 환경 속에서도 좀 더 효율적으로 영역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호모 사피엔스가 더 강했다기보다는 당시에 닥친 시련의 종류 및 크기와 호모 사피엔스의 적응능력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이 비교적 온화한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하여 이집트 로마 프랑스 영국 미국에 이르는 고위도로 차츰 이동한 것이다. 초기에는 농업 생산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후가 주 요인이었지만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기후의 결정력은 줄어들고 교역과 산업 생산력, 제도적 조직력 등의 무게가 더 결정적으로 작용을 했다. 즉 3천 년 전 인류의 기술과 제도로는 나일강과 황하 지역의 홍수가 극복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련이었고 교역의 발달은 로마문명을 일으켰고 17세기 항해술의 발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신세계의 왕자로 만들었고 18세기의 당면한 과제인 산업 생산력 경쟁은 조선능력과 철강기술 등 당시 영국의 국력과 기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강도였기에 영국이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고 세계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20세기 초 불황과 세계대전이라는 시련은 유럽에게는 지나친 것이었지만 미국은 풍부한 자원으로 극복하기에 적절했기에 전후의 번영이 가능했다.
이처럼 국가든 개인이든 적절한 시련만이 발전과 성공의 조건이다.
돌이켜보자. 우리는 너무 편한 것 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대로 버티기 힘들 만큼 너무 힘든 삶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참고문헌;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2013, 문학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