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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 Jun 08. 2020

「감정의 물성」 - 김초엽

단편 감상

‘우울체’가 그녀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해주는가?


 지금 내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불안과 긴장처럼 맥박이 빨라지고 손이 떨리는, 분명하고 강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감정이라면 더더욱.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속 보고 싶은데도 그것이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자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 내가 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자만 나오는 영상을 자주 보면서도, 그것과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별개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중학생 때부터 해왔다. 지금 내가 끌리는 것과 내 감정은 독립적이라는 이상한 생각. 아마 무언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발현된 것이 아닐까.


 자주 게이가 아닌 남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자각하고 지속해버리면 상처 받을 사람은 나 혼자라는 것을 이미 알아서 억지로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결국 깨닫고 매달리다 관계를 파탄 내버리는 과정을 자주 해왔지만 말이다. 내가 게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였겠지. 적어도 내 지향성에 대한 확정을 유예하는 정도는 하고 싶었을 것이다. 부모님에게 너무 큰 죄를 짓는 건 아닐까. 교회에서 자란 내가 이렇다니, 아무래도 디나이얼 게이의 정도를 걸어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모 잡지사의 에디터인 ‘정하’는 ‘감정의 물성’이라는 제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후배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그것은 그냥 초록색의 네모난 자갈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이라는 제조사의 소개를 들은 그는 유사 과학 같은 사기가 아니냐며 큰 의심을 한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대해 ‘정하’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그저 그의 연인인 ‘보현’과의 갈등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어느 날 일주일째 연락이 없던 ‘보현’의 집에 방문한 그는 문을 여는 순간 묘한 향기를 느낀다. 그녀는 푸른색의 돌을 쥐고 있으면서 울고 있었다. 우울의 감정을 형상화한 ‘우울체’. 속이 상한 ‘정하’는 환기를 시키며 ‘우울체’를 모두 버린 뒤 병원에 가보라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낸다.


 감정을 확신할 수 없을 때의 무기력함 만큼 내게 고통을 주는 것은 없었다. 온전한 내 것으로 생각했던 나 자신을 나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알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 건지. 혼란스러운 내 감정으로 인해 누군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목격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이 몰려왔다.


 문제는 그것이 모호성을 가장한 위선일 경우에 더 커졌다. 이미 내 감정을 알지만,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뻔히 보이지만 억지로 외면하고 싶을 때. 중간도 아닌 알 수 없음 정도의 말로 나를 감추며 속였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느껴졌던 죄책감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지금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고 그러면 당장의 내 감정을 외면해야만 하는데. 당연한 자기 합리화 기제가 아닌가 싶지만 누군가를 속이며,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 속이며 버티려 하는 나에 대한 혐오감은 감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 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네 말대로 이것들은 그냥 플라시보이거나,
집단 환각일 거야.

나도 알아.


 당연하게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걸리든 간에, 1년 뒤에라도 나는 그때의 진짜 내 감정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결국 피할 수 없었다. 관계의 끝과 상처 주기를 잠시 미뤄두는 것은 나에게 미칠 파장을 착실하게 키우는 행위였고, 그 충격 이후에는 나를 짓누르는 자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했다.


 내 것이 아닌듯한 나의 감정. 예측할 수 없는 나의 생각. 통제할 수 없는 나의 행동. 흘러가는 대로 살기로 자주 마음먹지만 그렇게 산다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상처 줄 수밖에 없겠지. 배려를 가장한 위선과 진실 사이의 중간지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건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거짓말로 덧씌워진 감정을 주위를 채우고 있는 공기처럼 마시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통제와 소유가 불가능한 감정의 물성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입자들은
산산이 흩어져 내 폐 속으로 들어오겠지.

이 환각이 끝나면.

 

 볼 수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소유가 완전한 통제를 보장하는가. 나를 기만하는 감정이라는 물질을 내 손에 쥘 수 있다면 적어도 느껴왔던 무기력함 정도는 덜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이 누군가에겐 돈벌이가 되고 현혹하기 쉬운 약점이 된다. 설레고 싶은 순간에 '설렘 초콜릿'을 먹고, 우울하고 싶은 날에는 '우울체'를 만지며 우울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정을, 그래서 의미가 생겨나고 아마 그렇기 때문에 통제 불가의 영역에 있을 감정이라는 물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루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에 쓸쓸함과 알 수 없는 위안을 느꼈다.


그게 더 나은 결론일까.

 

 언제쯤 나를 믿을 수 있을까. 감정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저 흘러가는 감정이, 무의식의 내가 이끄는 내 말과 행동들이 내가 더 행복해지기 위한 토대라는 것 정도만 믿고 싶다. 지금 누군가에게 주는 상처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 중에 하나라는 것까지. 온전한 내 편은 나만이 될 수 있으니까.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나'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 그렇지만 착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내 욕심을 채울 방법은 도저히 없는 건지 궁금하고, 두 마리 토끼 같은 건 둘 다 잡고 봐야 하는 내 성격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런 쉬운 고민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2019) 에 수록된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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