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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상아 Apr 27. 2024

27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中


 

나는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숲을 걷는다. 숲은 실물이니 사라지는 길은 아니다. 여기서의 ‘나’는 내가 아니다. 덧붙여 여기서의 나는 27세의 ‘나’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35세이기에 여기서의 ‘나’는 내가 아님을 짚고 넘어간다. 나는 숲길을 산책하고 있으며 이 활자는 그저 상상이니 회고라 생각하지 말것. 27의 ‘나’이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는가. 추억은 그저 상상에 불과한 기분좋은 열량 소모일 뿐이다. 그 상상을 나는 찬찬히 머릿속에 적어가보기로 했다. 그러니 너무 진지하게 읽지 말것. 읽기 쉽도록 룰을 하나 정하겠다. 27의 나를 길이라 지칭하겠다. 이유는 없다. 그저 그 시절의 나는 길을 걷고 있었으니.


 

“오늘은 볼펜 말고 연필이 써보고 싶었는데 역시나 집에는 연필이 없다. A머릿속에 항상 들어있는 다크포스…. 그게 어제 준 편지에서 내 마음을 건드렸는지 읽고 난후에 알 수 없이 슬펐다. 언젠가는 꼭 우울해지겠다, 불행해지고 말겠다는 바람이 아닌 바람을 가지고 있는 듯이…. 내가 그 마음까지 직접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저 난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가정과 생각을 가지지 않은 채로 A랑 시간을 보낼 꺼다. 이런 내 생각이 A도 물들일 수 있기를 개인적으로 바라고 있을 뿐. 시간이 지나고 같이 있었던 시간이 길어질수록 A가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직접 마음으로 더 잘 느낄 수 있어서 요즘은 그저 기분이 좋다. 솔직히 처음에는 A가 날 진심으로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별로 안 들었으니까.


마치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 따위 절대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마음을 먹은 사람처럼 보인적도 있었지! 매번 이유를 달고 A에게 잔소리만 해대는 내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멈춰지지가 않는다. 특히나 아프다하면 더 약 먹으라고 잔소리가 심해지는 것 같아. 내가 직접 해줄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저 말로 챙겨 주려다 보니 잔소리가 심해지는 것 같아.


-중략-


억지로 A가 항상 밝은 마음만 가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나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굳이 부정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예견하고 속단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밝은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는 게 어렵다면 그냥 순간순간이 주는 느낌대로만 생각해보자 나도 같이 할게. 쓸데없이 영원이란 말, 끝까지라는 말로 헛된 기대와 생각에 잠들게 해서 힘들게 하지 않겠다.(근데 사실 그런 상상해도 된다.) 이번은 나와 같이 갈 애슐리를 기대하고 다음에는 왕십리를 가서 무얼하게 될지 생각하고 그게 다 끝나면 그 때가서 다음에 쉴때, 같이 시간 보낼때 뭐할지 생각하자. 네가 가지 않는다면 난 옆에 있다. 2012.10.19“



길이 쓴 편지다. A는 텍스트를 잘 간직하고 있을까. 보통 편지라는 것이 글쓴이보다 읽는 이가 기억하기 쉽다지만 이 텍스트는 예외다. 글쓴이가 길임에도 불구하고 길은 거진 다 기억한다. 길의 머리에서 나온 텍스트는 절대 잊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진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길은 완성된 텍스트를 복사해 다이어리에 끼워 놓았기 때문이다. 길이 쓰고도 잊고 싶지 않은 텍스트. 그 텍스트를 A는 어떻게 관리하고 있을까. 예견하건대, A는 아마 A의 습작노트 사이에 끼워 놓았을 것이다. 2년에 걸쳐 두어 번 문득 기억이 나지만 무수히 많은 습작노트중 어디에 끼워 넣었는지 몰라, A는 그렇게 2년에 걸쳐 두어 번 ‘읽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길은 A를 잘 아는 사람이다. A는 그런 사람이다. 정리정돈을 못하는 A. 대화의 흐름을 생각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A. 원하지 않은 흐름일 때면 어김없이 화내는 A. 소유욕이 강한 A. 알파벳‘A'처럼 어느 한군데 둥근 구석 없는 A.



"내가 가지 않으면, 넌 내 옆에 있을 거야? 쭉? “


그때 길의 대답은 무엇 이였던가. 도무지 상상(想像)할 수가 없다. A의 물음. 이 질문은 A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반점 같은 질문이며, 어린아이같이 순수하지만 어딘가 결연한 질문 이였으리라. 하지만-어느 한 군데 둥근 구석이 없는-A의 결연함이 덜컥 겁이 났으리라. 겁을 집어먹은 길의 대답을 도무지 상상(想像)할 수 없다.


길은 자신의 긴 여정에 A라는 두 갈래 샘을 만나게 된다. 긴 여정에 알맞은 적절한 타이밍의 샘. 쉬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알파벳 ‘A'처럼 샘의 시작점은 같으나 끝으로 갈수록 두 갈래로 갈라지는 샘. 그 샘의 시작점은 꼭짓점하나. 길은 고민한다. 샘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작은 꼭짓점 같은 웅덩이에서 쉴 것인가, 오른쪽 차가운 물이 흐르는 물길에서 쉴 것인가, 왼쪽 뜨거운 물이 흐르는 물길에서 쉴 것인가…. 길이 오기 전 다른 여행자는 어떤 방법을 택했는지 단서조차 없는 샘.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 길은 오랜 시간을 두고 공사(工事)를 하기로 결심한다. 두 갈래의 물길을 중간지점에 나의 물길을 만들어 중간지점에서 쉬다가자. 쉬는 마음으로 공사(工事)하고 완성 되면 또 그만큼 쉬다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에서 천둥이 몰아칠 준비를 하고 있다. 길의 노력이 아닌 타의에 의한 길이 만들어지는 시점에 길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천둥을 몰아냈다. 천둥을 몰아내고 길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공사(工事)가 의미가 있는 행동인가. 이로운 열량소모인가….



이쯤에서 나는 숲속의 공기를 깊게 호흡하기로 했다.

후-. 후-. 추운 겨울. 나의 입김은 마치 A가 태우던 담배의 날숨과 같다.



“편하게 담배 피워도 돼.”

“눈치본적 없어. 지금 내가 피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알았어. 알았어. 피지 마.”

“지금 피고 싶지 않다는 거야. 삼십분 후든 한 시간 후든 일초 후든 내가 피고 싶을 때 필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눈치 안 봤으니까 너 편할 때 펴.”

“이러니까 내가 못 끊는 거야. 너랑 대화하면 담배가 말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편하게 담배 피워도 돼? 난 참은 적 없어. 눈치본적도 없다니까? 왜 자꾸 착한사람처럼 행동해? 편하게 담배 피워도 돼. 이말 할 때 니 얼굴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고 싶어. 얼마나 위선적인지 넌 몰라. 모처럼 만났는데 나 돋구지 마.”

“미안해. 돋궈서 미안해. 화 풀어.”

“담배 다 필 때쯤에 풀릴 꺼 같으니까 말걸 지마.”

“응. 알았어.”



길은 A의 입술을 가만히 보았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A의 하얀 날숨. 그리고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오랜만에 말 뿐이 아닌 정말 풀리고 있는 A의 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길은 안도 한다. 애초부터 A는 똥 싸듯이 항문이 아닌 입으로 쌌을 뿐이라는 생각의 냄비가 뚜껑 반쯤 열어 길에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길이 들여다보길 원하지만 길은 곧바로 외면한다. A는 특별해.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정도에 화날 수 있어. 좀 더 진솔하게 다가가지 못했어. 내 실수야. 라는 생각의 냄비엔 A가 입으로 싼 똥만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똥은 숨길 수 없다. 시각적으로 숨긴다 해도 후각을 자극하지 않는 똥은 없다. 향수를 들이 붓고 방향제와 같이 둔 다해도, 그것은 똥이다. 똥일 뿐이다. 똥이 똥으로 보이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어쩌면 그 담배 연기 위를 걷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날숨에 5초간 이어지는 길. 그리고 2초의 無. 그리고 5초. 나의 수많은 방황 속 단단하다 여겼던 그 ‘길’은 날숨과 니코틴이 만들어 낸 담배연기 이었으리라.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을. 그 길을. 나는 계속 걷고 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여니 그동안 내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빠져나갔다. 내 쉰 한 숨이 많아 공기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서재에 앉아 반듯하게 잘 깎인 연필을 들었다. 적절한 종이를 올려두고 첫머리를 써 내렸다.


 

‘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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