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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떠올리며 웃었다면, 그래 충분하지

by 건우

입에 칫솔을 물고 교실 뒤편에 있는 싱크대로 향했다. 갑자기 하은이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말했다

“선생님 저 좋은 일 있었어요!”

”(양치하며)ㅁ워?”

”저 오늘 환희쌤 봤어요!”


그때 비로소 생각해 봤다. 너희들에게 선생님은 어떤 존재일까. 그저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의 관계도 참 미묘하다. 1년 동안은 가족만큼이나 같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 말이야. 어떨 때는 혼이 나서 푹 가라앉기도 하고, 어떨 때는 사소한 일로 박장대소하기도 한다. 그렇게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어진 선은 점점 단단해진다. 비가 오고 햇빛이 비치고를 반복하다 단단해져 버린 땅처럼.


나는 ‘좋은 일’이라고 말할 선생님이 없는 것 같다. 선생님이라는 감흥에 많이 무뎌졌다. 너희들은 길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소리치며 인사하잖아. 쌤은 길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그냥 지나친다? 아마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실 거다. 괜히 인사했다간 우리 반에서 가장 웃겼던 동범이 친구라고 말해야 끄덕이실 테다.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굳이 꺼내보라면 글씨를 바르게 쓰지 않았다고 손등을 때린 2학년 선생님, ‘분홍신’ 영화를 보여주신 과학 선생님, 친구들이 툭하면 따라 하던 영어 선생님 그리고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신 한국지리 선생님. 좋으신 선생님들이 분명히 더 계셨을 텐데. 너무 좋은 선생님이시라 기억에도 남지 않도록 하셨나 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교사 권력을 아주 조금 사용했다. 지난여름 방학에 나는 숙제를 냈다. 주제 일기*로 ‘우리 선생님을 소개합니다’를 써오라고. 무조건 써오는 건 너무하니까 여러 주제 중에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평소에는 의무감으로 숙제를 확인했는데, 방학 일기는 눈을 반짝이며 읽었다. 사실 엎드려 절 받기 인지라 대부분은 좋은 말을 쓴다. 아니 써준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숨길 수 없다. 준우의 일기는 사진까지 찍어놨다.


‘우리 선생님은 성격이 너~무 좋다. 소리를 질를 때도 있지만 우리가 잘못을 해서 그렇기 때문에 이해한다.’
소리를 지른다고 적어서 순간 ‘헉’ 하는 소리가 나왔는데 준우는 이해한다고 해주니 고마웠다.


‘나는 3학년이 돼도 건우쌤이 제일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렇다. 준우는 예언했다.


‘선생님은 아재 개그를 해서 웃기다. 내 1학년 선생님보다 좋다.’

비교는 좋지 않다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3학년이 되면 분명히 2학년 선생님보다 좋다고 말할 테다.


‘선생님은 숙제를 조금 내준다. 그리고 방학 숙제를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좋다.’

이런. 그래서 좋은 거였구나? 당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한동안 일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생님의 제~일 좋은 점은 마음이 넓은 거다.’

나는 저기 있는 물결표가 참 마음에 든다. 나라면 절대 쓰지 않을 물결표. 준우가 쓰니까 ‘진품’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준우야, 선생님이 마음이 넓은 지는 잘 모르겠어. 나는 했던 말을 또 해야 할 때 짜증이 난다. 갑자기 아이들이 수업 중에 교실 앞으로 나올 때도 성질이 난다. 친구랑 다투고 서로 자기가 안 했다고 말하면 참을 수가 없다. 그런 내가 과연 마음이 넓을까. 내가 그런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도 괜찮은 걸까.


나는 준우가 3학년 선생님을 나보다 좋아해도 좋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냥 초등학교 2학년을 떠올렸을 때 아니,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렸을 때 ‘재밌었지’라고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즐거웠던 그 감정이 남아있으면 좋겠다. 김영하 작가가 말했다. 어린아이와 여행을 간다고 해서 아이들이 그 여행을 오롯이 기억하는 건 아니라고. 애들은 다 잊어버리겠지만 가족과 함께 간 바다, 그 바다에 대한 좋은 감정은 남아 있다고. 아이들이 학교를 생각하며 좋은 감정을 떠올렸다면 나는 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겠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내가 즐거우면 너희도 즐겁겠지라는 마음으로. 아마 그 마음이 넓게 느껴졌나 보다.


급식 먹고 돌아오는 길에 작년에 가르쳤던 서준이와 성준이를 만났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예의상 하는 인사는 아닌 것 같아 좋았다. 서준이와 성준이도 오늘 좋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으려나.



*주제 일기: 일종의 주제 글쓰기. 보통 일기를 쓰면 하루에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아이가 자신의 생각이나 상상을 표현할 수 있도록 주제를 주어 글을 쓰도록 한다. ‘하루만 친구의 몸으로 살아본다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다시 먹고 싶은 급식 3가지와 이유’ 따위의 주제를 제시한다. 반대말은 자유 일기.


(글에 나오는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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