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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버들 Nov 15. 2023

임신일기 03. 임신?!



기적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남편은 출근 준비를 하다 당황했고 우는 나를 안아주었고 나는 그런 그를 떼어내며 테스트기를 보여주었다.

선명한 한 줄

남편은 안도한듯이 이것 때문에 우느냐고 웃으며 물었고 나는 덩달아 안도하며 화가 났다

“왜 웃어?!”

하지만 남편은 그것도 알고 있었다는듯이 쉬운 건 없어 나는 지금 여보가 아이가 안 생겨서 아쉬워하는 마음이 고마워라고 말하며 나를 담쑥 안았다. 그는 지능적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이 내 하루를 감싸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기계적으로 밥을 먹고 기계적으로 산책을 했다. 그리고 이상한 승부욕이 생겨서 다음 달엔 아기가 생기도록 더 노력해야지 마음 먹었다. 여전히 철이 없었다.




생리기간이 끝나가면서 정서의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남편은 여러차례 떡볶이를 사왔고 언제나 그랬듯이 평화로웠다. 날은 지나지나 두 번째 시도의 날이 다가왔다. 마치 기계처럼 활동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플 주기를 보면서 더 집중했다.  그러면서 역시나 시간은 지나갔다. 예정일이 3일이라면 난 1일에 피가 비치었다. 착상혈일까? 기대해보았지만 바로 생리가 시작되었고 괜히 지쳐버렸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날 안아주었다. 그 땐 위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리면 위로뿐만은 아니었다. 남편은 투명한 사람이었다. 진짜 괜찮았고, 어떤면으로든 맘 상했을 날 감싸준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속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런 여유로움 조차도 짜증이 났다.

짜증은 곧장 화살이 되었다. 일찍 좀 와, 밥 좀 잘 챙겨먹어, 출근하면 내가 알 수가 없잖아. 영양제는 먹고 있는 거 맞아? 내가 기껏 요리한 저녁은 술상이 아니면 패스하는 느낌이야? 나도 일해! 남편에 한해서는 어쩜 이렇게 배려가 없는가 싶지만 그 땐 그런 마음이 너무 컸다. 남편도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 급한 마음에 배란테스트기를 살까하고 약국에 가서 물어봤는데 보통 배란테스트기는 인터넷에서 산다고 하였고 약국에서는 취급하지 않았다. 인터넷 쇼핑을 잘 못하기도 하고 불현듯 그런다고 잘 될까? 싶은 생각에 배란테스트기 사기를 관두었다. 어쩌면, 진심은, 그렇게 했는데도 잘 안되면 마음이 더 힘들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귀차니즘이 컸다. 배란테스트기를 사기 전 고민할 때는 그런 일도 그럴 필요도 전혀 없었는데 자꾸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고 혼자 무언가 숨긴 것처럼 찔리고, 마음이 불편했는데 배란테스트기를 안 사겠다고 마음먹자 갑자기 많은 것들이 편해졌다. 임신 계획을 하고 내가 낳고 싶은 때가 있었던 것이지 아기는 그렇게 내 맘대로 생기진 않을뿐더러 내가 노력한다고 모든 일이 다 내 기대만큼 되지 않으며, 뭔가 되지 않는다고 다 내 탓이 아니고, 수치나 일정대로 모든 게 흘러가는 일은 드물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두 달 만에 그냥 포기가 빨랐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편한 마음으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임신시도와 상관없이 아기는 올 기미가 없었고, 희한하게도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와 아직 안 생기다니 정말 다행인걸? 이런 마음은 아니었다. 될 대로 되겠지 뭐 이런 태평함도 아니었고, 그저 아기가 아직 준비가 안 됐나 보다 나도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너무 늦어진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 난임병원을 가보자 이런 마음을 먹으니 더 편안해졌다. 요즘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난임도 많고, 나이가 꽤 돼서 임신시도 하는 경우도 많은데 잘 안돼서 슬프고 초조할 이름도 모를 누군가를 떠올리자면 내가 너무 간절함이 없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 땐 내 마음이 그랬다. 하지만 편한 마음이었다고 해서 아기가 찾아오지 않았으면싶거나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6월부터 시작한 임신시도는 계속 시도로 달을 넘기고 있었다. 어떤 달이 아니라 어떤 날은 괜찮았다가 어떤 날은 뭘 잘못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어떤 날은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거야 싶기도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좌절하는 시간들이 혼잡하게 지나갔다. 초여름께부터 와주길 바라던 아기는 겨울이 시작되고서도 아직 손끝도 보여주지 않았다.




본격 송년을 맞이하는 겨울이 다가왔다. 예전만큼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는 건 시대 탓일까 세대 탓일까.

분위기도 기분도 나지 않았지만 사람들과의 약속이 잦았다. 술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자주 마시는 즐거움도 만끽했다.

어느 날은 친한 언니의 초대로 집에 가서 여러 요리를 대접받았는데 맛있는 와인을 두고도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니는 의아했지만 술을 자주 마시는 내가 술을 꺼리는 게 반가워 보였고 나는 어제 심각하게 과음을 해서 그런지 오늘 이상하게 술이 안 땡기네요. 하고 대꾸했다. 임신준비가 잘 돼 가냐는 질문에 6개월 이상 기다렸는데 아직 아기가 찾아오지 않아 1월에 난임병원에 예약했다는 얘길해주었고, 언니의 다이내믹한 연애 얘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입이 휘둥그레지는 시간을 보냈다

이 날은 2021년 12월 19일 일요일었고, 늦도록 수다는 계속 되었고 늘 그렇듯이 언니와의 시간은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어도 화요일이 되어도 숙취가 나아지질 않았다. 숙취라고 하기도 그럴 것이, 그냥 마냥 피곤하고 졸리고 몸살도 아니고 몸살기 감기기운에 힘들고 입맛도 없었다.


그러다 수요일엔 차려먹기로 하기로 하고 남편과 술도 한 잔 할 계획이었어서 장을 보며 집에 오다가 괜히 약국에 들러 오랜만에 임신테스트기를 세 개나 샀다. 그리고 집에 와서 괜히 몸이 이상한 게 혹시? 오? 나 임신? 이런 느낌이 전혀 없이 집에 비밀번호 치고 들어오듯이 자연스럽게 테스트기를 해보았는데 희미하게 두 줄이 보였다. 난 이게 임신이 맞는건가 싶어서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곧장 보내주었고 친구는 임신이라고 했는데 내 눈에는 계속 흐리게만 보여서 바로 병원에 갔다.


아기집이나 이런 건 보이지 않지만 피검사 결과상으로는 임신이 맞았다. 나는 매우 얼떨떨했고 아주 초기라서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걸 남편한테 말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런 상황이었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밤을 보낸 다음날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임신테스트기를 했는데 더욱더 흐린 줄이었다. 난 또 병원을 갔고 피검사를 했는데 수치가 더 떨어져 있었다. 배도 아프고 밑이 계속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임신준비를 하며 계속 진료 보던 담당선생님이 안 계셔서 다른 분께 진료를 받았는데 며칠 후 다시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아마 너무 초기라 임신일지 아닐지 지켜봐야한다는 뉘앙스였던걸로 기억한다. 크리스마스에 기적처럼 온 선물인 줄 알았는데 역시 쉬운 건 없나 보다 하고 처진 상태지만 나름 덤덤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모르잖아 다시 확인해보자 아냐 어차피 다음주면 다시 검사해야하잖아 고민의 연속인 밤을 보내고 금요일에 눈을 뜨니 끈질기게 확인해봐야겠다 싶은 마음에 또 병원에 가서 담당선생님을 만났고 진료와 상담을 했다. 나는 임신이었다. 아기가 와주었다. 쉬운 건 하나도 없었지만 기적처럼 아기가 나에게, 우리에게 와주었다.  


이 날은 크리스마스이브 12월 24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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