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일기, 나를 닮은 그녀!

by 지승유 아빠

도대체 넌 누굴 닮아 그러니.


아마 대다수의 부모가 이 대목에서 찔리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주로 큰아이, 그러니까 우리 딸이 혼날 때 마치 아이와 함께 혼나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악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사실, 꼭 악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만 유난히 못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없는 형편에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그 전으로도 후로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꾸준히 학원을 다녔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어머니는 큰 결심을 하셨고, 나는 피아노 학원을 즐겁게 다녔다.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고,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의 학원 연주회 이후, 피아노가 있으면 집에서도 연습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할 시점에 어머니는 학원을 그만 다니게 하셨다.

20180819_105552.jpg

그 이후였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에서는 피아노를 못 치게 된 것이 나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좀 서운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 반발 없이 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하기 싫은 과목이나 하기 싫은 일을 기피하기 시작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찾아서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술이나 수학, 화학, 지리 같은 과목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 일부러 잊은 것은 아닌데 자꾸 그런 과목의 숙제를 하거나 공부하는 일을 잊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에는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국어, 사회 관련 문제집은 쌓아놓고 풀었지만, 수학은 한 권도 제대로 풀지 않았다. 방학 기간에는 며칠을 잠도 안 자고 책만 읽기도 했고, 음악을 들으면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대학 원서를 쓸 때도 큰 고민은 없었다. 하고 싶은 학과만 지원했고, 대학교에 가서는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면 되었다. 그 이후로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그런 사실을 잊고 살았다. 하고 싶은 공부만 하고 살았고, 그 공부를 밑천으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았다. 지금까지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다.

1462863219739.jpeg

모든 부모가 아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하고 아이를 측은해하기도 한다. 나는 후자였다. 큰아이는 책을 읽으라고 하면 반나절이라도 꼼짝하지 않는다. 하지만 덧샘 뺄셈을 연습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책상 아래로 들어갔다가 책상 위로 올라갔다가 의자 위에 누웠다가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동생 하는 일에 참견하다가 엄마에게 혼나곤 한다. 큰아이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앉은자리에서 스케치북 한 권을 그림으로 가득 채우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하지만 딱 한 번 미술학원에 보냈을 때, 선생님이 권하는 그림 그리기 방법이 듣기 싫어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집으로 와버렸다. 큰아이는 창밖으로 새를 보다가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잊기도 하고, 운동장에서 꽃을 구경하다가 수업시간이 된 것을 잊어버리기도 하며, 동백꽃을 구경하려고 동백나무에 올라가지 말라는 말을 잊어서 동백충 때문에 고생한 적도 있다.


우리 아이는 상당히 산만한 아이다. 학교라는 틀에 비춰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큰아이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는 과연 아이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을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일반적인 아이들과 어울려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선생님의 미움을 받지는 않을지, 학교 생활에서 큰 좌절을 겪고 큰 상처를 받지는 않을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큰아이는 우리의 생각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고, 적응하면서 생긴 문제들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거나, 그게 아니면 무시해버렸다. 어쩌면 우리보다 우리 아이는 대범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1519126778489.jpg

엄마와 수학 공부를 하다가 아이는 또 혼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를 닮아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나를 닮은 모습이었고,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이상하게도 아내의 눈치를 보며 둘째와 놀아주었다. 큰아이가 혼나는 것이 아니라 꼭 내가 혼나는 기분. 그리고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수학쯤 못해도 괜찮아. 아빠도 수학 못하거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