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은 약국에서 파는 어린이용 비타민이었다. 동생은 못 먹게 하고, 혼자만 먹으려고 하는 큰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조금 큰 소리로 혼을 내버린 것이다. 잠깐의 반성.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 놀이를 하면서 동생에게 멋대로 하는 큰아이를 보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누워있는 안방 문은 닫혀있었고, 속은 계속 안 좋았다. 아까 잔소리 후 잠시 반성했던 일은 멀리로 날아가 버리고 드디어 큰아이에게 향하는 길고 긴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사실 잔소리라기보다는 질책에 가까운 내용이었고, 목소리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안방 문이 열리고 아내가 등장한 것은 잔소리 끝에 큰아이가 잔뜩 주눅이 들기 시작한 때였다.
우리 가족은 유난히 네 명이 다니기를 좋아한다. 요즘은 큰아이가 슬슬 우리와 다니기를 귀찮아하기 시작했지만 마트에 장 보러 가는 것부터 누구 한 사람의 병원 진료까지 우리는 꼭 같이 다니려고 노력한다. 당연히 가족은 함께 다녀야 한다는 아름다운 이유도 있을 터이지만, 사실 두 사람이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이 훨씬 덜 힘들기 때문이라는 실질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육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말이다.
아빠들이 아이들을 돌보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육체적인 이유는 분명히 아니다. 대부분의 아빠들은 엄마들보다 육체적으로 발달되어 있으며 아이 둘 정도는 동시에 돌볼 수 있는 육체적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빠들은 아내가 없이 아이들과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부정하는 아빠들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분명 그것은 두려움이다. 차마 그것을 입밖에 내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분명 정신적인 원인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내가 인상을 쓰며 등장하자 아이들의 싸움은, 그리고 아이들과 내 싸움은, 그리고 나의 길고 긴 잔소리는 모두 끝나 버렸다. 아내는 당연히 나의 잔소리가 너무 길다고 질책했고, 나는 그런 질책에 반항을 시도해보지만 별 소득 없이 모든 것은 정리되었다. 그리고 안정되어 간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아이들과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비로소 얌전해지고 안정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아이들 이상으로 안정을 찾은 나는 집을 정리하고 아이들과 목욕을 한다. 아내가 아이들의 이를 몹시도 깨끗하게 닦인 후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아내가 일주일에 단 하나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동안 나머지 셋은 춤을 추거나 놀이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아내가 없는 시간 동안 있었던 잔소리나 우리의 다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내에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불을 다 끄고 누워, 예전에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큰아이를 키울 때, 나는 집에 별로 있지 못했고 특히 주말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최소한 혼자 스트레스를 희석시킬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하루 종일 대화가 되지 않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생각을 나눌 사람도 없이 오직 나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육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아마 정신적으로 힘들었으리라.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뭘 그렇게 힘들어하냐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가 하나인지, 둘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문득 나의 생각을 나눌 수 있고, 내가 힘들 때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곁에 없는 것이 힘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싶어 한다. 아이는 분명히 너무 예쁘고, 우리 인생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축복이지만 그 축복만으로 다른 정신적 고통을 상쇄할 수는 없다. 아내는 분명히 힘들어하고 있었을 것이다.
큰아이를 키우는 수년의 시간 동안 아내에게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지 못한 것을 나는 늘 미안해한다. 한 아이를 두고 정신적인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배우자 한 사람뿐인데, 그가 필요할 때 늘 곁에 없다는 불합리함. 아무리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를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미안함이 아내에게 늘 있다.
오늘 오전에는 비가 왔고, 안개도 짙었지만 오후부터는 아주 맑은 날이었다. 해가 지자 어느덧 찬바람이 부는 것이, 이제는 보일러의 기름을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행복하게 잠들었고 나는 내일부터 정말 아이들에게 부드러운 아빠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영화를 보기로 한 아내는 아이들을 양쪽에 안고 곤히 잠들어버렸다. 살짝 흔들어 깨우자 '미안해'했다.
하지만 미안한 것은 나였고, 아내는 내 사과의 말을 듣지 못하고 아이들과 행복한 표정으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