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는 마음, 네 번째
지대넓얕, 알쓸신잡 류의 잡학을 좇으며 지적 허영을 채우기 좋아하는 나에게 건축이라는 분야는 집을 짓기 전부터 하나의 재미거리였다. 건축양식과 역사를 줄줄 알지는 못하지만, 유명한 건축가의 더 유명한 건축물은 알아보는 정도랄까. '알바 알토 하우스'의 실용적이면서도 미니멀한 공간과 북유럽 디자인에서 떠오르는 자연스러움을 좋아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부모님을 위해 지었다는 작은 집, '르 락'의 순환동선과 부엌과 같은 공간이 기계처럼 기능한다는 관점도 신기했다. 건축 분야에 조금씩 가졌던 관심이 집을 짓는 데에 은근히 영향을 준 것 같다. 쉽게 잊힐 수도 있는 외국의 어느 건축물이 기억 속에 남고, 실제로 내게 영향을 주기까지 하는 건 그 건축물에 이름이 있었고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해서가 아닐까? 이름을 부르자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말이다.
외국에서 집에 '빌라 ○○○', '○○하우스'같은 이름을 붙인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헌, 재, 당, 원, 루, 각, 정과 같은 한자를 집 이름에 써왔다. 어떤 형태의 집이냐에 따라붙는 한자가 달랐다고 한다. 집 이름을 '당호'라고 하고 그 집주인의 호로 쓰기도 했다 하니 예나 지금이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살고 있는 집의 이름은 중요했던 것 같다. 주택 관련 잡지나 건축 업체의 포트폴리오, 건축탐구 집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요즘 짓는 집에도 기억에 남는, 멋진 이름을 붙이더라. '삼각집, 오각집'처럼 집의 형태를 따오거나 가족들의 이름 글자를 하나씩 모으기도 하고, 동네의 지리적인 특징을 반영한 것도 있었다. 집을 지을 결심과 동시에, 어쩌면 그보다 먼저 나는 우리 집에 꼭 이름을 붙이리라 결심했다.
나는 원래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sns 계정이라도 하나 만들라치면 이름에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모른다. 누구나 들으면 피식하곤 하는 반려동물 콩, 가루의 이름, 일했던 유치원에서 증설된 학급의 이름도 내가 지었다. 사랑스러운 딸의 이름은 가장 오래, 가장 깊이 고민했다. 한자 의미, 단어 그대로의 의미, 숨겨진 의미까지 딸의 이름 두 글자에 세 가지의 뜻을 담았다. 단순히 작명만이 아니라 이름에 여러 의미를 담는 그 자체를 좋아한다. 나의 작명이 가족에게, 일터에서 채택(?)되어 온 걸 보면 나름 성공적인 작명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 집 이름에도 의미를 듬뿍 담아 지어야 하지 않겠나.
설계를 시작하고 집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왔었다. "집 이름을 미리 지으면 거기에 맞춰서 생각하게 되니까 집을 지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아요." 건축사님의 조언이 있었지만 이미 돌아가고 있는 머릿속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의 건축노트 첫 번째 장이 바로 '이름을 만들자'이니 집 이름에 대한 내 의지를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이제는 집 이름을 지었으니 아쉬운 후보들을 남겨두어야지. 선택받지 못한 이름들이지만 나름 좋은 이름들이라 묵혀두기가 아쉽다.
지비집. 남편이랑 전화를 하다가 생각난 이름이다. "지금 어딘데?" "나? 집이지!" 디비디비딥 게임 구호의 리듬대로 말해보면 입에 착 달라붙는다. "지비지비집!"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집이지!'라고 대답하는 나 같은 집순이에게 딱 맞는 집 이름이 아닌가. 남편은 그게 뭐냐며 아주 싫어했지만 아직도 내 입엔 착 달라붙어 있다. 다음은 우리의 생활이 온전하게 담겨있는 집이라는 의미의 고스란채. 순우리말인데다가 부드럽게 흐르는 발음이 마음에 들어 마지막까지 후보였다. 비슷한 의미로 하루를 온전히 담아두었다는 하루온(ON)도 예쁜 이름이지만, 영어는 넣지 않겠다며 탈락. 마지막으로 한옥의 요소가 조금씩 들어가며 생각한 이름 하녹. 한옥의 발음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노을 하(霞)에 푸를 녹(綠) 한자를 써서 우리 동네의 푸른 산과 붉은 노을까지 담은 이름이었다.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당당히 낙점된 우리 집의 이름은 바로 다비다채. 새 집에서는 삶이 아주 새롭게, 더욱 아름답게 바뀔 것 같다는 기대와 바람으로 집을 짓고 있기에 모든 걸 비우고 다시 채워나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소리내어 말했을 때 또박또박한 소리도 마음에 든다. 캐롤 '펠리스 나비다드'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겨울이 완공 예정이기도 하니 마침 딱인 것 같다며 계속 의미를 덧붙인다.간소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비움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워가는 것이다. 다비다채에서의 생활은 차분히 비운 마음에 아름다운 것들이 채워지길 바란다. 비운 공간에 물욕이 비집고 들어올까 아주 가끔 걱정이 되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어본다.
설계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건축사님에게 집 이름을 공개했다. 설계한 건축물을 주로 '○○동 주택'으로 불러오셨다며 우리가 지은 집 이름을 반가워하셨다. 며칠 전 만난 시공사 대표님께도 다비다채라는 집 이름을 알려드렸는데 완공이 되고 나면 현판을 만들어주시겠다고 한다. 건축허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사 과정을 기록할 요량으로 다비다채라는 이름으로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다. 곧 세상에 태어날 다비다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갈 우리 가족이 채울 이야기. 이름을 지은 것만으로 설렘과 기대가 더 커진다. 다비다채. 이름을 불렀다. 이제 우리에게 와서 꽃 같은 집이 되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