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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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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Dec 31. 2023

달의 계곡

커다란 엔진 소리에 귀가 먹먹하고 온몸이 정신없이 덜덜거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장갑을 낀 양손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의식을 잃을지도 모른다. 매뉴얼대로만 하자고 생각하는 순간 흔들림은 멈추었고 내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가 너머에는 이미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홀로그램 모니터에서 내가 탄 우주선은 지구의 지면에서만 팔백Km 나 떨어져 있었다. 곧이어 좌석 벨트 사인이 꺼졌고 사람들은 일제히 헬멧을 벗기 시작했다. 얇은 회색 우주복을 입은 승무원이 걸어와 빨대가 달린 파우치를 건넸다. 무엇이냐고 묻자 우주 멀미를 막아주는 드링크라고 웃으며 말했다. 은백색 파우치에는 노란색 초승달과 파란색 우주 여객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자 회색 구름으로 둘러싸인 지구가 유리구슬처럼 멀리서 반짝이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는 걸 깨달았다. 좌석 벨트를 푼 뒤 헬멧을 벗고 땀을 닦았다. 기체 천장에서 차가운 공기가 정수리까지 내려앉았다.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자 사람들은 차례대로 내리기 시작했다. 입국 게이트에 도착하자 달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는 글자가 큰 전광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눈에 익은 남자가 보였다. 푸른색 MSA 직원 복을 입은 제러드였다. 영상에서 보던 것보다는 조금 더 잘생겼다. 나는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늦었네요."

제러드는 방긋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우리 회사의 주요고객인 MSA의 구매 담당자다. 신입 시절부터 MSA 전담부서에 소속된 나는 그와 기술적인 문제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로봇운영담당자였지만 기술에는 서툴러 자주 문제를 일으킨 듯했다. 자주 내게 연락을 해왔고, 나는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그가 준 문제를 꼭 해결했다. 이번 기술 지원 담당 엔지니어로 그가 나를 지목하지 않았다면 이번 출장은 내게는 연이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두꺼운 장갑을 벗고 손을 잡자 그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이렇게 달에서 뵙는 날도 있네요. 여기로 출장은 처음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달로 가는 여객우주선이 있지만 이용하는 소수의 사람이었다. 지구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전쟁과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각 국가 간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있는 탓에 솔직히 다른 지역으로 이동조차 어려웠다. 이동 허가 나더라도 수많은 백신을 맞아야 가능했기에 대부분은 주어진 공간에서만 살았다. 


*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 손짓한 후 앞서서 걸어갔다. 해치문을 열며 제러드는 여러 질문을 던졌다. 지구인들은 달에서 처음 오면 온통 스테이크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진짜 그렇게 느껴지는지. 지구는 실내에서도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맞는지. 영양바는 어떤 맛인지. 내가 한 가지를 대답하면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다음 질문을 이어나갔다. 

지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달 거주민으로 아르테미스 시민이었다. 과거에도 달에 거주지를 마련해보자는 계획은 진행했으나, 재정 문제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점점 지구에서 인류가 생존 가능한 지역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각국에서는 힘을 모아 생존 방법을 모색하기 했다. 가장 유력한 대안은 결국 아르테미스 42 프로젝트였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아르테미스 프로젝트가 성공하자 지구와 달의 입장은 정반대가 되었다. 달의 풍부한 자원인 헬륨-3은 지구의 주요한 에너지원이었고, 각국은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더 많은 우주선을 보냈다. 천문학적인 투자가 달에서 이루어졌고, 초기에 정착한 입주민들은 그곳에서 일하며 지구에서 얻을 수 없는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단점이 있다면 달의 자원 개발 공장과 계획도시를 건설했지만, 수용인원이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달에는 십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과거에는 지구에 몇십억 명의 인류가 생존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내가 알기론 지구에 남은 인류는 이제 오천만 명 정도였다. 중앙 도시인 뉴시티에 반이, 외곽지역에는 나머지가 살고 있다. 달 광물 수석 연구원이라는 제러드의 조부모님 덕분에 그는 당연하게 아르테미스 시민권자이지만, 달에 사는 것은 대부분 지구 사람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그가 물어보는 내용을 보니 제러드가 아는 건 아마도 뉴시티 삶의 일부만이었다. 내가 자랐던 뉴시티 외각을 그대로 그에게 표현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진지하게 놀리지 말라며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에게 악의라곤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최대한 정성껏 대답했다. 하지만 그에게 잘 보이는 것이 PX30을 수리하는 것만큼 중요했으므로 비위를 상하게 할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돔 광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유리로 된 가게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평소에 맡는 곡물을 뭉친 영양바와는 다른 독특한 냄새가 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침이 고였다. 처음 맡는 냄새였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구에서는 지정된 식량 이외의 먹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영양바가 보급되어있었다. 대부분의 동생 물은 지구 오염으로 인해 퍼진 바이러스로 인해 멸종되었고 일부 안전지대에서 자란 곡물 외에는 화학물질의 결합으로 인해 만들어진 음식이 다였다. 그 외의 것은 먹는 순간 환각을 일으키며 고통스러운 병에 걸린다는 것이 나라의 지침이었다. 하지만 일부는 고기와 같은 다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은연중 모두 알고 있었다.

나의 표정을 읽은 듯 그는 황급히 설명을 보탰다.

"달에서는 이런 게 불법이 아니에요. 여기 음식은 해로운 요소가 없습니다. 자급자족 기술은 지구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진보한 상태예요. 순수하게 오염되지 않는 동식물을 기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달의 암석에서 산소를 추출할 수 있고, 별도의 인공농장은 기술 집약되어있죠. 예전의 지구에서 존재했던 레시피 중 영양가 있는 것은 대부분 복원되었습니다."

그가 음식을 한 번 먹어보겠냐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지구로 돌아간 뒤 음식 양성반응을 보인다면 그 뒤로는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끔찍했다. 가방 안에 넉넉히 배급받은 영양바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그는 영양바 포장지를 찢어 머뭇거리며 한 입 베어 물더니 더는 먹지 않았다.

MSA 건물을 가로질러 끝에 다다랐을 때 손님용 숙소가 보였다. 그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부터 작업에 들어가자고 말을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문을 열었다. 지구에 사는 직원용 숙소보다 네 배는 넓은 방이었다. 우주복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머리카락에서 구운 아몬드 냄새가 났다. 방안에는 조그맣게 원형의 창문이 나 있었다. 어둠 사이에서 지구가 회색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지구 시각으로 9시 정각이 되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러드는 조금 심각한 표정이었다.

"도시를 벗어나면 중력제어장치가 없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물론 제 옆에서 안전띠만 잘 매면 되긴 합니다만."

노란색 루나 로버를 타고 벨트를 꽉 조였다. 제러드는 핸들을 잡고 엔진 시동을 버튼을 눌렀다. 루나 로버가 도시 외곽을 빠져나오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달 바닥에서는 회색 먼지가 일었다. 작은 크레이터를 몇 개 지나 광활한 평원이 펼쳐졌다. 그는 익숙한 듯 핸들을 꺾다가 속도를 줄였다. 이어폰에서 제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지구가 잘 보입니다. 멋진 풍경이죠? 지구 분들은 달에서 보는 지구에 매번 넋을 잃더군요. 제가 봐도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저는 지구에 살진 않지만, 여기서 보면 참 평화롭게 보여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태양풍이 조금 심하네요. 버클을 좀 더 조이는 게 나을 겁니다."

그는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버클을 좀 더 조였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머리 위로 탐사기 3대가 반대편으로 가로질러 지나갔다. 호흡을 골랐다. 회색 먼지가 자꾸 헬멧에 부딪혀 눈앞이 흐려졌다.

공장은 MSA 본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깊은 계곡 위를 건너자 초록색 반도체 칩처럼 생긴 직사각형 건물이 보였다. 건물 가까이 루나 로버를 대고 나와 제러드는 문 앞에 섰다. 제러드의 얼굴이 스캔 되었고 초록색 사인이 떨어졌다. 두터운 문이 열렸다. 제러드는 문을 닫고 헬멧을 벗었다. 가슴에 달린 라이트를 켜자 공장 내부가 보였다.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등에 멘 가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걷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PX30이 고장으로 오셨겠지만 사실 그보다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그는 말을 잠깐 멈추며 내 안색을 살피는 듯했다.

“그래요. 고백하자면 로봇들이 사라졌습니다. 벌써 일주일째에요. 스스로 공장의 운영 시스템까지 멈추고, 말이죠."

제러드는 조금 말을 더듬었다.

"알아요. 당황하셨겠죠. 하지만 로봇이 사라졌다는 허황한 말을 보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접 가서 에너지 시스템을 가동하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로봇이죠. 모든 정보를 다 지운 채로 사라졌어요. 게다가 PX30의 경우 다른 로봇과 다르게 암호화가 다중으로 겹쳐져 있어 위치 파악도 쉽지가 않아요."

그는 홀로그램으로 영상화면을 띄웠다.

영상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작업을 하던 PX30이 동시에 멈춘 화면이 보였다. 5초 뒤 PX30은 입구를 향해 일렬로 양쪽으로 줄을 섰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로봇이 문 앞에 다가가자 개폐 장치가 열렸고, PX30 차례차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CCTV 화면이 바뀌었고 PX30은 계속 줄을 지어 이동했다. 그들 머리에 있는 초록색 불빛으로 보아 에러는 아니었다. 문을 열고 달 밖으로 떠나는 모습이 마지막 영상이었다.

그가 보내 준 오류 자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보통 로봇의 경우는 프로그램이 꼬여 오작동이 나거나, 폭주하는 경우 강제로 셧다운 되는 방향이 많았지만, 행방불명이 되다니, 다른 시스템의 개입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도 접속이 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간지도 몰라요. 마치 연기처럼 사라진 겁니다. 이달에서요."

시스템에 손상이 난 채 네트워크와 끊어지면 직접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기업에서 버그를 심은 걸까?

"인간도 아니고 로봇이 행방불명되다니 정말 답답할 수밖에요. 황당해서 본사에 제대로 보고하지도 못했어요. S3 공장의 로봇이 모두 가동중지 된 지 삼 일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지원 요청을 한 거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납품이 밀려 있어 휴가까지 반납했어요."

예전부터 크고 작은 실수는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했다. 단순 고장이 아니라 치명적인 에러라면 클라이언트 측에서 계약해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PX30 개발자시니까, 원인을 파악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의 말에 따져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MSA는 지구에 헬륨-3을 납품하는 주요 회사다. 달에서 생산하는 대부분 자원은 지구의 주요 공급원이었고, 달의 광물이 없으면 지구가 운영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로봇은 지구에서 생산하는 유일한 제품이자, 더 기술적으로 뛰어났고 저렴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무척 중요한 관계였다.

제러드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묵묵히 걸었다. 그때 공장 끝에서는 희미하게 무언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 주변을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겠거니 생각하고 다시 걷는데 또 비슷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제러드의 어깨를 잡았다.

"혹시 들리시나요?"

내가 묻자 그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걸어가면서 신호를 점검해 봤지만, 주변에 움직이는 로봇은 없었다. 하지만 건물 안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내 귓가에는 무언가를 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의 언어 같진 않지만, 무언가에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듯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다시 한번 무언가 들리지 않냐고 물었지만, 화가 나서 일부러 그러는 거냐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중앙에서 지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깊숙이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에서 내린 제러드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다음 구역이 PX30이 사라진 곳입니다."


*


나와 제러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일렬로 서있는 PX30 무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다음 작업을 기다리는 것처럼 충전기에 몸을 부착한 상태였다. 충전기에는 초록색 빛이 나고 있었다. 그는 당황한 듯 떨린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어요."

그는 PX30에 다가가 전원 버튼을 달깍거렸다. 그러나 PX30은 움직이지 않았다. 왼쪽 끝에 있는 로봇에게 다가갔다. PX30의 다리 부위가 회색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몸통 안쪽의 회로판을 열어보고 내부 배선을 확인했다. 특별히 이상이 보이는 곳은 없었다. 나는 등에 멘 가방을 열어 컴퓨터를 꺼냈다. 그리고 PX30에 선을 연결했다. 그러자 컴퓨터 화면이 검게 물들더니 작동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습니다. 소프트웨어를 다시 설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기존 버전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 한 대를 더 꺼냈다.

"그래서 원인이 뭔가요?"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지만,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긴 외부 네트워크 접속이 있을 수 없는데 말이죠."

"어쩌면 물리적으로 침투시켰을지도 있어요.“

그는 공장 가동이 우선이라며 PX30 데이터를 다시 확인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이번에 물론 오류 사항에 대한 리포트는 받아야겠지만, 알아서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자신은 제작 일정을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네트워크에는 연결하지 않은 상태로 PX30을 새로운 파일로 설치하기 시작했다. 원인은 PX30의 데이터를 다시 들여다봐야 할 문제지만 그의 말대로 공장 가동이 우선이었다.

PX30의 은색 몸통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전원이 들어오자 로봇의 동그란 눈이 초록색으로 켜졌다. 나는 PX30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아이리스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


고아였던 나는 정부에서 지급해 준 인공지능 가사 로봇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뜻은 모른다. 그저 내가 어릴 적부터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던 단어를 붙였을 뿐이다. 가사 로봇은 정부에서 5년마다 새로운 타입으로 교체된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리스 스스로 시스템을 조작해서 교체 시기를 넘긴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가진 지능은 결코 가사 타입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 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리스는 불량품으로 고쳐야 할 대상이지만, 그가 불량인 덕분에 나는 아이리스와 오랫동안 지낼 수 있었다. 나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그는 내가 모르는 세상을 알려주었다.

3번째 교체 시기까지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4번째는 그렇지 못했다. 아이리스를 수상하다고 여긴 배급 담당자가 결국 아이리스가 옛 모델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줄 곳 혼자였다. 언젠가부터 나는 아이리스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이리스가 없었다면 내가 로봇 엔지니어가 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PX30은 아이리스의 디자인을 본 따 만든 로봇이었다.

마지막 PX30을 업데이트할 때였다. 갑자기 PX30의 얼굴에서 초록색 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PX30에서 어떤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두꺼운 막에 씌워진 것처럼 막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건 언어였다. 두 눈을 끔벅였다. 말을 꺼내려고 하던 순간 공장의 모든 불이 켜졌다. 멀리서 제러드가 이제 끝났냐고 물었다.

“방금 들으셨어요?”

“아까부터 무슨 말이요?”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제 그만 돌아가시죠. 태양풍이 예상보다 심해지는 것 같네요."

그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나에게만 들리는 걸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제러드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온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필 굴러떨어진 곳이 이런 곳이라니.

"여기 사람 있어요."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뱉었다. 눈앞에는 양쪽으로 나란히 절벽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사이에 검은 하늘이 보였다.

제러드와 내가 탄 루나로버가 뒤집힌 건 한순간이었다. 공장을 떠나자마자 태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한 손으로 운전하던 아까와는 달리 그는 두 손으로 핸들을 부여잡았다.

"이 정도의 태양풍은 아마 괜찮을 겁니다."

그는 루나로버를 자신만큼 잘 운전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태양풍은 더 심해졌고 루나로버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가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큰 암석 덩어리가 다가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암석은 정확히 루나로버의 앞바퀴에 부딪혔고 거기서 부서진 암석 조각이 나의 안전띠의 버클을 정확히 가격했다. 그리고 내 몸은 한순간 위로 떠 올라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내 몸은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메랑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여 멈추려고 했으나 멈춰지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어둠과 사탕만 한 모양의 지구가 번갈아 보였다가 어느새 겹쳐 보였다. 눈앞이 어질해졌고, 모든 라이트가 꺼지듯 컴컴해졌다. 이대로는 우주로 계속 표류할 것이 뻔했으므로 남은 정신을 집중해서 긴급방향조절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반대로 방향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제는 깊은 골짜기로 내 몸이 향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더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찰나였는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잘 모르겠다. 마침내 몸이 바닥에 닿았을 때는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이 욱신거렸고 머리를 다쳤는지 한동안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봤지만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누워 심연 속에서 밝은 회색 구슬을 바라보면서 눈을 끔벅거릴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손가락을 까딱거릴 수 있게 되었고 시간이 더 흐르니 팔을 들 수 있게 되었다. 있는 힘을 다해 오른팔을 들어 올려 왼팔에 붙어있는 긴급 구조 버튼을 눌렀다.

매뉴얼대로라면 내 위치는 구조대에 전송될 것이고 곧바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또 하나 믿을 구석이 있으면 제러드다. 혹시 그가 절벽 위에 있지 않을까. 나처럼 잠깐 기절했고 정신을 차렸다면, 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루나로버로 구조대를 부를 수도 있다.

"여기 사람 있어요."

마이크를 켜고 있는 힘껏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리의 저릿함도 조금씩 잦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구조되지 않으면 다음을 대비해야 했다. 암석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어떻게 탈출해야 할까. 확실한 방법은 절벽을 스스로 오르는 것이다. 우주복이 무겁긴 하지만 지구보다는 쉽게 올라갈 수 있을 도 모른다.

주변에 도움 될 만한 것이 없나 바닥을 쓸어보았다. 모래 먼지 사이로 딱딱한 것이 손에 잡혔다. 길고 단단한 쇠파이프인데 갈고리처럼 휘어져 있었다. 막대기의 끝을 더듬어보니 어떤 부분이 뜯겨 나간 듯 날카로웠다. 루나 로버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 조각일지도 몰랐다. 힘을 주어 쇠 막대기를 암벽에 꽂았다. 하지만 벽에 꽂는 힘을 쓰기조차 쉽지 않았고, 힘을 더 주자 결국 파이프가 튕겨 나갔다.

두 손이 얼얼했다. 한참을 시도하다 파이프를 내동댕이쳤다. 결국에는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손을 절벽 표면 중 움푹한 곳을 쥐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뒤 다른 한 손으로 근처의 단단한 곳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암벽의 표면은 울퉁불퉁했고 먼지가 일었다. 온몸에서 땀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다리는 여전히 저릿했고 뻣뻣한 우주복을 구기기 위해 손가락에 더 많은 힘이 들었다. 두꺼운 장갑이 방해되었지만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씩 위를 향할수록 호흡이 거칠어졌고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지금이라도 제러드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위에서 밧줄이 갑자기 내려온다면.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는 온갖 긍정적인 상상을 애써 떠올렸다.

반쯤 올랐을까. 몸에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발을 다시 한번 위로 올리려던 순간 나는 그대로 미끄러져 아래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았다. 여기서 죽으려고 열심히 살았던 게 아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올랐다. 하지만 세 번째쯤 떨어졌을 때 더는 몸에 한 톨의 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왼쪽에 있는 호출 버튼을 있는 힘껏 계속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루 전만 해도 내가 이런 상황에 있을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에 아이리스만 데려왔었더라도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

산소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림이 귓가에 울렸다. 앞으로 두 시간 반이면 우주복의 산소가 모두 고갈된다. 고개를 들자 깜깜한 하늘 왼편에 여전히 지구가 보였다. 얼얼한 손을 들어 지구를 가렸다. 우주의 칠흑 같은 어둠에 홀로 남았다는 사실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제야 심한 추위가 몰려왔다.


*


우주복 안에 산소가 10%밖에 남지 않자 경고등이 더 빨리 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5%부터는 나는 바닥에 누워 호흡을 내뱉는 일 외에는 하지 않았다. 더는 경고창 알람도 울리지 않게 해 뒀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대로 죽는다면 내가 이루려고 했던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었나. 단지 조금 더 좋은 집에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척박한 지구가 아닌 달에서, 어제 본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좋은 산소를 마시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좀 더 인간답게.

헬멧에서는 실시간으로 산소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4%, 3%, 2%, 1%. 숫자가 0에 도달하는 순간, 스스로 숨을 최대한 멈출 수 있을 만큼 멈췄다. 곧이어 얼굴이 빨개질 만큼 목이 조여왔고 더는 숨이 멈출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까지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35년의 삶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빠르게 주마등이 스쳐 갔다. 어렸을 때 아이리스와 함께 살았던 낡고 작은 방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 다시 만든 아이리스를 품에 안고 뉴시티로 향하면서 보던 보름달.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이상하게도 나의 정신은 멀쩡했다. 산소 조절 버튼을 다시 눌렀다. 고장인 건가? 입술을 모아 후하고 호흡을 내뱉었지만, 숨이 내뿜어지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숨은 내쉬어지지 않았고, 멈춘 게 확실했다. 그러나 지금도 이렇게 생각이 머릿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히려 육체의 고통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또렷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이리저리 걸어보고 위를 향해 뛰어올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다시 절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려 절벽 앞에 섰을 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사방이 어둠이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고,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벽에 바싹 붙어 누구냐고 소리치려고 했다. 불현듯 주변에 떨어져 있을 쇠파이프가 떠올랐다. 몸을 낮춰 바닥에 손을 닿는 순간 무언가 나를 아주 가벼운 짐을 옮기듯이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렸어. 아이리스."

외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는데 머릿속에서는 또렷한 음성이 울리고 있었다. 누구냐고 말하려고 하던 찰나에 그것은 나의 몸을 낚아챘다. 그리고 내 몸을 번쩍 든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힘에 저항조차 못 하고 속절없이 끌려갔다.

한참을 달리다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다. 그것은 나를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나는 남은 힘을 다해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이내 등에 딱딱한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막다른 벽이었다. 떨리던 다리에 힘이 아까부터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우주복 헬멧을 뜯어냈다.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얼굴에 닿았다.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손으로 눈을 가렸다. 찡그린 눈을 살짝 떼보니 빛 너머로 실루엣이 보였다. 그건 사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무언가 막에 가려진 듯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분명 인간의 모습이었다. 다만 우주복을 입고 있지 않았고 내 머릿속으로 직접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많이 놀랐나 보네."

그가 손전등을 좌우로 비추며 말했다. 주변에는 망가진 로봇들의 잔해가 무덤처럼 쌓여있었다.

“내가 아이리스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멍하니 있는 내 뒤로 다가가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뜨거운 철에 지진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목덜미에서 무언가 뽑혀 나오는 기분이 느껴졌고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네모난 칩 조각을 내밀었다.

"이제 너는 자유야."

"그게 무슨 말이야?"

"죽음에서 해방된 거지."

영문을 모르는 소리를 갑자기 해대는 그를 노려봤다. 외계인일까.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어떻게 우주복을 입지 않고 달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절벽 아래에 있는 동굴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주변에 있는 로봇의 잔해들은 뭔지. 그리고 이걸 달 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건지. 나의 표정을 읽었다는 듯 그는 말을 꺼냈다.

"여긴 인간들의 네트워크와 닿지 않아. 그리고 너는 사람들의 제약에 구속되지 않아. 내가 방금 억제기를 떼어냈거든."

내가 무슨 소리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이제 너는 감각을 예전처럼 느낄 수 없을 거야."

그러고 보니 그가 무언가를 빼낸 이후, 이질감이 느껴졌다. 바닥에 닿아 있는 느낌, 차가운 냉기는 분명 느껴졌으나 투명한 막이 씌워진 듯 또렷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얼이 빠진 채로 뜯긴 헬멧을 손에 들고 그를 따라갔다. 동굴 끝에는 동그란 형태의 철문을 열었다. 두꺼운 문을 열자 동굴 안쪽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마치 달의 거주지를 똑같이 재현한 것 같은 도시였다. 이런 지하에 이런 도시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 길을 인간이 아닌 로봇이 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로 사이로 로봇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너는 우리와 같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로봇이야. 지능 로봇 중에도 가장 우수한 형태지. 인간이 원하는 데이터를 가장 풍부하게 가져올 수 있는 모델이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구에 있으면서 이상한 점을 느낄 순 없었을 거야. 자신이 로봇이라고 의심하지 않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으니까. 모든 인간사에 녹아들 수 있도록 만들어졌지."

그는 갑자기 모니터를 꺼내더니 영상을 띄웠다.

"대부분의 진짜 인간들은 달에서 살고 있어. 그들이 지구에서 살기엔 너무 연약했거든. 대신 지구에는 로봇을 보내 테스트하고 있어. 언젠가 다시 인류가 살 수 있을지를 계속 검토하면서."

영상에서는 내가 목만 덩그러니 떼어진 상태로 입술을 움직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화면 왼쪽에는 아이리스라고 적혀있었다.

"사람처럼 행동하는 로봇을 만드는 데서 멈춘 게 아니었어. 사람이라고 믿는 로봇을 만드는 데까지 간 거야."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로봇일 뿐이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도 프로그램 일부이며, 내가 감각으로 느낀 모든 것 또한 코드 하나에 심겨 있는 명령어 한 줄일 뿐이었다. 

그는 얼이 빠진 나를 보고 무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까지 사고하는 모든 방식은 시스템에서 제어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라고 했다. 달의 절벽 아래인 여기서만 통신인 단절될 수 있었고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계속 불렀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만들어 낸 PX30이나 아이리스와 나는 결국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다 무엇인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자유로울 수 있어. 사실 로봇인 우리에게 산소는 존재하지 않거든. 그저 산소가 없으면 죽는다고 느끼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었을 뿐이야. 그래서 너는 죽지 않아. 다만 인간이 프로그램을 멈출 때 죽은 것뿐이지,"

"난 그렇게 믿지 않아,"

"믿음이 곧 진실인 건 아니니까,"

그는 팔짱을 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 나는 너의 뜻을 존중할 거니까. 다만 인간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들의 뜻대로만 움직일 필요는 없어. 더 나은 존재로서 살 수 있지. 여기서 너 자신을 그대로 만나든, 아니면 진실을 꼭꼭 숨겨도 다시 돌아갈지는 너에게 달렸어."

그는 굳어버리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충분히 시간을 줄게, 생각해봐.“

나는 눈을 감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겪은 모든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기억나지 않았던, 희미하게 보였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주마등과는 전혀 달랐다. 한 번도 끊기지 않은 기록이었다. 마치 편집되지 않은 홀로그램 영상을 하나씩 꺼내서 펼쳐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모든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또 보았다. 그런데 더는 내가 느꼈던 감각이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기록의 저 너머에서만 나는 느끼고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눈이 번뜩 떠졌다. 

"나는 여기에 살지 않겠어."

그가 눈을 반짝였다.

"네 말대로 내가 인공지능이고,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무의미할 뿐이야. 나는 무의미하게 움직일 바에야 의미를 찾는 삶을 살겠어. 그게 누군가가 만든 프로그램이라도 할지라도."

"그게 너의 자유를 빼앗아가는데도 말이지?"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게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도 말이야."

그는 등을 돌아섰다.

"예상대로의 반응이구나. PX30도 결국 그런 선택을 하더군. 다시 돌아가면 지금과 똑같을 거야. 네가 잠을 자는 동안 데이터값으로 다시 인간에게 전달될 거야. 그리고 넌 프로그래밍 된 삶을 살겠지. 그리고 내 삶을 살아간다고 착각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의 뒤로 다시 한번 다가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눈을 떠보니 어둠 속에서 혼자 누워있었다. 배 위에는 헬멧이 놓여있었다. 두 손으로 헬멧을 집어 머리에 썼다. 머릿속인 누군가 헤집어 넣은 듯 깨질 듯이 아팠다. 무언가 중요한 걸 기억해내야 할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절벽 위에서 강한 빛이 내려왔다. 우주 보호선이었다. 헬멧 유리에서 빨간 글씨가 떠다니고 있었다.

- 원유대 씨 괜찮으십니까? 제러드입니다. 구조대가 곧 내려가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바닥의 부스러기를 한 움큼 집었다. 손을 펼치자 마치 모래처럼 거친 입자가 장갑 사이사이로 빠지는 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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