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숲은 상우와 눈사람이 머무르고 싶은 환상의 유혹에서 벗어난 것에 만족했지만, 숲은 두려움이라는 마지막 환상을 보여주기로 했다. 하얀 숲은 눈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환상이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두려움은 언제라도 곧 일어날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기에 제격이었다. 누구든 마음속 가장 큰 두려움을 눈앞에서 보게 되면 현실로 받아들였다. 두려움이 빚어낸 환상은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그럴듯하게 느낀다는 것을 숲은 잘 알고 있었다. 또다시 환상의 눈보라를 불러냈다. 눈보라의 환상은 눈사람을 원래 살고 있던 초등학교 놀이터로 불러들였고, 상우에게는 하얀 숲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 환상을 만들어냈다.
오늘도 눈사람은 텅 빈 놀이터에서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아무도 겨울 끝자락에 있는 마지막 눈사람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터벅터벅 아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녹아버리고 싶지 않은 눈사람은 아이의 발자국을 따라가 인사하였다. 눈사람과 눈이 마주친 아이는 낯이 익는 얼굴의 아이였다. 준호였다! 하지만 아이는 말을 거는 눈사람을 쳐다보는 둥, 마는 둥 그냥 지나가버렸다.
“준호야! 준호야!”
눈사람은 준호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가 보았지만, 준호는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 혼자가 되어버렸다. 시간은 이렇게 끝없이 흘러갈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흘러가는 시간 끝에는 그저 녹는 것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눈사람을 사로잡았다. 우울하며 불안했다. 눈사람은 이런 상태가 계속되지 않기를 바랐다. 또 다른 아이가 지나갔다. 눈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인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 눈사람이 말을 건 아이는 상우였다. 상우 역시 준호처럼 눈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눈사람은 사랑받고 싶었다. 눈사람은 혼자 외로이 남아 녹아가기 싫었다. 놀이터에 부모님을 가진 아이들이 부러웠다. 눈사람은 외로움에 녹아가고 있었다.
눈사람은 마음속으로 매일매일 소원을 빌었다. 시간들은 느리게 흘러갔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들에 눈사람은 마치 넓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이 꿈처럼 준호와 상우라는 아이들과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눈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라며 자책했다. 모두 그저 눈사람이 바라던 상상일 뿐이라며 눈사람은 하얀 숲의 환상에 속아 끝없는 영겁의 시간 속에 갇혀버렸다.
상우는 숲 속 모험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했다. 함께 있던 눈사람은 사라져 있었다. 아마 준호와 함께 돌아갔을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이 꿈같았다. 상우는 집으로 돌아올 엄마를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매일 보는 엄마였지만, 숲에서 있었던 일들은 상우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매일 보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상우는 엄마가 회사에서 빨리 돌아와 상우를 반갑게 안아주는 상상을 했다. 엄마를 생각하니 마침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 왔다!”
엄마가 도착했는지 벨소리가 울렸다. 상우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뛰어내려 문으로 달려갔다. 상우는 문을 열고 엄마의 품 속으로 뛰어 안겼다. 자신이 평소와 달리 너무 밝게 인사하는 것 같아 스스로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엄마는 평소처럼 상우에게 밝게 인사해주지 않았다. 엄마는 왠지 평소의 엄마 같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반응이 차갑게 느껴졌다. 상우는 안고 있던 엄마에게서 손을 풀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에게서 아빠에게서 보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상우야. 이 손은 치우자.”
엄마는 엄마가 아닌 것처럼 마치 모르는 아이가 자신을 안은 것처럼 상우의 팔을 자신에게서 떼어내었다.
“왜? 엄마가 좋아서 그렇지.”
상우의 눈빛에는 이미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엄마를 안으며 대답했다.
“상우야. 이거 놓고. 엄마 다시 나가야 돼. 그리고 이제 상우랑 못 있어. 이제 앞으로 상우 혼자 있어야 해.”
상우가 두려워하던 말들이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상우는 잘못들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무슨 말이야?”
“이제 상우 혼자 지내야 한다고.” 엄마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무슨 말이야. 왜 내가 혼자 지내야 해-” 상우는 믿을 수 없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자꾸 엄마가 반복해서 말해야겠어? 비켜, 엄마 짐 싸야 해.”
엄마는 상우를 밀치고 가버렸다. 상우는 엄마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는 상우의 몸이 굳어 가만히 멀뚱멀뚱 서있는 동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커다란 가방에 몇 가지 물건들을 챙기더니 현관문을 쿵하고 닫고 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우는 지금 도대체 어떤 상황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상우는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엄마가 떠나버렸다.
상우가 그토록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다.
엄마는 드디어 상우를 떠나버렸다.
아빠의 환상을 쫓느라 엄마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상우는 평소에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엄마마저 떠나버려도 자신은 괜찮을 거라고 자신에게 수백 번 말했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었음이 들통나버렸다. 상우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상우는 자신을 버린 엄마가 미웠다. 점점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분노라는 감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숲에 불이 번지듯 화는 그렇게 빠르게 계속 번져나갔다. 슬플수록 화가 났다. 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엄마는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엄마는 상우처럼 노력하지 않았다. 상우는 엄마의 그런 모습에 화가 났다.
어떻게 자기를 버릴 수 있는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를 아무리 욕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제 상우는 엄마보다도 점점 자기 자신이 미워지고 있었다. 엄마는 이제 떠나고 없다. 상우가 화낼 수 있는 상대는 오직 상우 자신밖에 없었다. 상우는 스스로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역시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어쩌면 엄마가 떠나는 것도 그저 예정된 일일 뿐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저 그 날짜가 상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던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렇든 저렇든 사랑받을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마에게도 화가 났다. 상우는 집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손에 닿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준 핸드폰부터 컴퓨터까지 모조리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엄마가 떠나자 모든 것들의 의미가 사라졌다.
물건을 아무리 던져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의미들은 아무리 물건을 세게 던져봐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소용없어졌다. 모든 것이 소용없다. ‘아무것도 소용없어.’ 상우의 머릿속에서 이런 말들만이 가득했다. 이런 말들이 상우의 머릿속에 스며들어 퍼져나갔다.
감정이 사라지지 않자, 괴로움에 몸부리 치는 상우는 이번에 가장 미운 자신에게 벌을 주기 시작했다. 벽에 몸을 던져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다. 외부의 물리적인 고통이 느껴지자, 내부의 고통이 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벽에 몸을 던지는 것도 점차 무감각해지자, 아예 주먹으로 머리나 허벅지, 배, 이곳저곳을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분노에 휩싸인 상우는 하얀 숲의 환상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사랑을 스스로 볼 수 없는 상우는 하얀 숲이 보여주는 모든 것들을 현실의 일로 받아들였다.
눈사람은 끝없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우울한 나날들을 보냈다. 우울한 나날들 속에서 눈사람은 스스로를 위로해 주기 위해 준호와 상우에 대한 상상을 좀 더 자세히 펼쳐나갔다. 눈사람은 상상으로 공허한 마음의 공간을 채워나갔다. 상상 속에서의 준호와 상우는 눈사람이 바라던 사랑을 주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나누고, 함께 눈싸움도 하기도 하고, 매일 눈사람을 보러 찾아와 주었다.
눈사람은 상상 속에서 그들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고, 더 이상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다. 상상 속에서 눈사람은 따뜻함을 느꼈고, 이런 따뜻함 속에서는 녹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상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더 이상 혼자가 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혼자 초등학교 놀이터에 남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눈사람의 상상이 눈사람을 위로해 주었고, 놀이터에서 어른들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점차 즐거워졌다.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지만, 두려움에 익숙해진 눈사람은 갇힌 시간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눈사람의 상상은 준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오르게 만들어주었다.
진실을 찾아가면서 숲은 환상을 거두어갔다. 눈사람 주위에 보이던 학교 건물과 미끄럼틀과 시소 등이 있던 놀이터의 모습은 낡은 벽지가 벗겨지듯이 사라졌다. 주위에 있던 놀이터의 모습이 사라지자, 눈사람은 다시 숲으로 돌아와 있었다. 모두 숲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었다!
눈사람은 기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눈사람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며 여러 방향으로 아이들을 찾으러 돌아다녀 보았다. 하지만 미로처럼 나무들이 우거져있는 곳에서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는 것조차 어려웠다. 돌아다니다가 지친 눈사람은 아이들을 찾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다른 감각의 눈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귀의 역할을 하는 양 옆에 홈이 파인 구멍을 통해 멀리서부터 들리는 쿵쿵 소리를 찾아냈다. 쿵쿵 소리의 진동도 함께 느껴졌다. 눈사람은 소리에 조용히 집중했다. 이제 소리가 어디서부터 들리는지 알 것 같았다. 눈사람은 다시 눈을 떠 진동이 느껴지는 곳으로 뛰어갔다.
진동은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진동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곳에서 상우가 보였다. 상우의 표정은 괴로워 보였다. 상우는 괴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몸을 때리고 있었다. 손으로 자신의 몸이 닿는 곳을 있는 대로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눈사람은 상우가 자신을 때리는 것을 막기 위해 상우의 다리를 붙잡아보았지만, 상우의 무릎만 한 크기의 눈사람은 상우의 몸부림에 곧 나가떨어져버렸다. 높이 점프를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높이 뛰었다가 상우의 주먹에 부딪혀 땅으로 떨어져 떼굴떼굴 구르기도 했다.
“상우야! 이제 그만해!!!”
눈사람은 있는 힘껏 크게 소리쳐보았다. 눈사람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상우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상우야! 그만해, 다치잖아!”
상우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상우야! 상우야!” 눈사람은 울면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흔들어도 깊은 슬픔에 빠진 나머지 외부의 자극은 상우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눈사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상우에게 말을 걸었다.
“넌 혼자가 아니야! 빠져나와야 해!”
이번엔 눈사람은 나뭇가지 손으로 상우의 손을 잡아주었다. 상우는 무언가를 느낀 듯 어깨를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상우의 단단한 생각은 외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얀 숲의 환상 속에 갇혀있게 만들었다. 눈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이번에는 힘이 빠져 말한다기보다는 좀 더 속삭이는 것에 가까웠다.
“넌 혼자가 아니야. 널 그곳에 내버려 두지 마..”
상우는 혼자였다. 엄마는 떠났고, 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눈사람은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얀 숲의 환상에 속아 상우가 영원히 이곳에 갇혀있게 되는 게 아닐까. 눈사람의 젤리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눈물은 흘러내려 숲의 일부가 되었다.
눈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상우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갔다.
“상우야, 넌 혼자가 아니야.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해.”
상우는 이제야 소리가 들리는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눈사람은 하얀 숲의 일부가 되어 집에 혼자 울고 있는 상우가 보였다. 아무리 소리쳐도 닿지 않던 눈사람의 목소리가 상우가 있는 환상이 있는 곳에 닿았다.
“상우야! 여기서 나가야 해! 여기는 너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팔을 휘두르고 몸을 벽에 부딪히던 상우의 움직임은 잠시 누그러져 얌전해졌다. 훌쩍이며 울고 있던 상우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제 상우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단단한 상우의 생각이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엄마가 날 떠나갔어… 엄마가 나를 사랑할 수 없어서… 나는 사람들을 떠나게 만들어.”
상우는 몸을 웅크린 채로 얘기했다. 눈사람은 상우의 가장 큰 두려움이 엄마가 떠나 혼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여기를 벗어나면 다시 엄마를 만날 수 있어.”
“환상이 아니야…. 엄마는 정말 날 두고 떠났어.”
“상우야, 내 말을 믿어야 해. 엄마는 널 떠나지 않았어. 엄마는 널 많이 사랑해.”
“거짓말하지 마.”
“엄마는 네가 항상 행복하기를 바랄 거야. 사랑하니까.”
“그냥… 그냥 그렇게 해야 되는 거니까 가끔 그런 척을 한 거야!”
“그럼 넌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라서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라서 아빠도 엄마도 모두 떠나는 거라고.”
직접 말하고 나니 상우는 자신의 상황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 잘못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난 이번에 성적도 안 나오고, 또 방 청소도 제대로 안 해놓고, 엄마는 더 이상 날 견딜 수 없어서 떠난 거야. 난 어른이 아니라서 돈도 못 벌어. 엄마가 힘들게 회사에서 벌어오는 돈도 내가 써버리지. 거기다 다 컸는데도 가끔 이불에 실수도 하지. 당연히 내가 싫었을 거야. 어쩔 수 없이 날 키우고 있던 거야. 난 사랑받을 수 없어.”
“넌 이미 사랑받고 있어.”
“그건 사실이 아니야.” 상우의 생각은 너무나도 단단해서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처럼 느껴졌다.
“사랑은 꼭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어야만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닌 것 같아. 꼭 내가 무언가를 잘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건가 봐. 마법처럼.”
“사랑은 마법이 아니야. 마법처럼 보일 뿐이야.”
눈사람은 사랑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초등학교 놀이터에서 보았던 그리고 준호와 함께 하면서 배운 사랑이었다.
“어쩌면 너의 눈에는 사랑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아주 잘 보여. 다시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봐.”
눈사람은 하얀 숲의 환상에 맞서 상우의 마음이 담긴 환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상우에게 그런 눈사람의 마음이 닿았는지 엄마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생각에 묻혀있던 순간들이었다. 눈사람은 상우의 마음에 떠오른 것들을 자신의 눈결정체를 통해 반사시켜 보여주었다. 상우의 눈앞에는 엄마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던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었다.
“학교에서 어땠어?”
시선은 상우에게만 고정되어 있는 채로 미소 짓고 있는 다정한 엄마의 얼굴이었다. 정작 상우는 그런 엄마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날은 학교에서 친구들이 상우를 빼고 함께 운동장에서 놀기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엄마의 표정은 온화한 표정에서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뀐 것이 보였다.
“친구들이랑은 재밌게 놀다 왔어?”
친구들과의 시간은 두렵다. 상우 뒤에서 어떤 말을 할지 모르겠고,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엄마의 말이 상우를 아프게 했다. 상우는 오늘도 엄마의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상우는 엄마가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려하는 것을 알고는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도하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짜증이 났다. 그냥 관심을 꺼줬으면 했다. 또 문을 쾅하고 닫았다.
“오늘은 뭐가 먹고 싶어?”
학교에서 전화를 받은 것 같다. 친구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계속해서 점심을 먹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난다. 아는 척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아프진 않았어?”
엄마의 표정은 걱정스럽고 초조해 보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미웠다. 제발 가만히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저런 가식스러운 표정 짓지 말고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상우는 엄마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로 또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엄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상우 자신에게 있었다. 어차피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니까 엄마의 관심도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도 아빠처럼 겉으로만 사랑하는 척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빠에게 받은 상처가 여기저기서 곪아터져 자라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 커져있는 상처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사랑의 순간들은 보이지 않았었다. 모든 순간들이 사랑이었다. 모든 순간들이 사랑이어서 보이지 않았다.
상우는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터뜨렸다. 점점 마음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숲의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너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상우의 환상은 사라졌다. 상우는 숲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환상에서 깨어난 상우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우는 엄마의 품에 안겨있었다.
“엄마, 사랑해.”
엄마는 잠결에도 상우를 다정히 안아주었다.
“엄마도 상우 사랑해.”
준호는 한참을 뛰어 숲 속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 버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버블은 없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경계태세를 하며 주위를 살폈다.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 갖자, 경계를 풀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제 누워 쉬려고 하는데, 동굴 안쪽에서는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벌떡 일어나 다시 한번 경계태세를 갖추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뒷걸음질을 치다, 돌을 밟아 넘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벌써 자신의 위치를 노출해 버렸다. 도대체 이곳에 누가 있는 것일까.
얼굴을 들어 무엇이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굴 안쪽에는 이상한 문이 있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준호야! 준호야!”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문 너머로 도대체 누가 있는 것일까. 준호는 옆에 있는 손을 더듬어 돌을 집어 들었다.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누구세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알아요?”
준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호기심에 이끌려 문 가까이로 걸어가 보았다. 계속해서 누군가 준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말하라고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딘가 익숙한 문의 모습이었다.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문 가까이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어느새 준호의 주변은 병원 안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문 너머에는 아빠가 병상에 누워있었다! 준호는 아빠에게 뛰어갔다. 엄마와 할머니가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간호사나 의사도 모두 없었다. 준호는 안심하며 누워있는 아빠를 팔 벌려 안았다. 준호의 손은 아빠를 안지 못하고 통과해 버린 것 같았다. 말이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준호의 간절함은 그 이상함을 덮어버렸다. 더 이상 아빠의 손을 잡으려 시도하지 않았다. 간절함이 환상을 진실로 만들었다.
“아빠, 여기서 뭐 해?”
“준호 기다리고 있었지!” 아빠는 병상에 누운 채로 빙그레 웃으며 준호에게 대답했다.
“내가 올 지 어떻게 알았어?”
“아빠도 준호가 보고 싶었으니까!”
준호는 금세 마음이 편해졌다. 아빠와의 대화는 언제나 마음이 즐겁고 편했다. 아빠는 준호에게 최고의 친구이자, 준호를 보호해 주는 우산 같은 존재였다.
“뭐 하고 있었어?”
“잠깐 아파서 며칠 누워있었지. 이제 준호랑 같이 집으로 돌아갈 거야.”
준호는 여태까지의 일들을 잊어버렸다. 환상을 현실로 믿었다. 영화에서의 컷처럼 준호와 아빠는 어느새 집으로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평소의 준호는 아직도 어렸을 때처럼 아빠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 마음을 억눌렀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엄마 몰래 라면 먹을래!”
“그래! 라면 맛있겠다! 라면, 오늘은 너로 정했다!”
준호는 언제나 그렇듯이 보글보글 소리 뒤로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식탁에 앉아있었다. 왠지 라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라면은 엄마 없이 준호와 아빠만의 비밀을 만드는 날 먹는 음식이었다. 오늘도 엄마는 회사에 일이 있어서 늦게 올 것이고, 준호와 아빠는 몰래 둘만의 비밀을, 추억을 즐길 것이다.
“아빠, 나 캠핑 가보고 싶어.”
“어디로 가보고 싶어?”
“음… 별이 보이는 곳으로!”
“아빠가 알아, 준호랑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아빠는 순식간에 캠핑할 준비를 마쳤다. 아주 긴 낮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준호에게 환상 속 시간은 현실의 시간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환상 안에 빠져있을 때의 느낌일 뿐이었다. 착각일 뿐이었다. 환상은 시공간을 뛰어넘기에 현실과 비교한다면 아주 짧은 시간에 속했지만 환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을 현실처럼 아주 길게 느꼈다. 하얀 숲이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불러와 그 감각을 느끼는 것처럼 만드는 것뿐이었다. 나머지는 간절한 마음이 환상을 채웠다.
아빠가 운전을 하고 준호가 옆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엄마에 관한 작은 습관에서부터 크면 무엇을 해보고 싶은 지에 대해 끊임없는 얘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쯤 둘은 신비로운 마을에 도착했다.
“우와, 여기가 어디야?”
“아빠가 항상 준호랑 와보고 싶었던 곳.” 아빠가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준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나무들이 별을 몸에 휘두르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조명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무들 너머로는 마을이 보였다. 마을의 모습은 익숙한 마을의 모습이긴 했지만, 무언가 조금 달랐다. 알록달록한 색의 집들이 었는데, 레고블록들이 쌓아져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왜 아빠가 와보고 싶다고 했는지 짐작이 갔다.
“저-기에 보이는 크리스마스 마을에 가면 별자리를 볼 수 있어.”
준호는 아빠를 따라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빠가 좋아하던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한 마을은 겨울과 잘 어울리는 나무로 만든 집들이 밝은 조명과 함께 늘어서 있었다. 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에는 큰 트리들이 집들 사이로 가득했다. 한 가지 조금 이상한 점은 활기찰 것 같은 분위기의 조명과는 다르게 마을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저 쪽으로 가야 해.”
아빠가 가리킨 마을 중앙 쪽에는 무엇인지 모를 물건들이 높게 쌓아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딱 저곳에 예쁜 트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마을의 멋진 모습을 방해하고 있었다. 아예 길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와 함께 마을에 들어서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약간 느린 템포의 하늘 위에 수놓아져 있는 별들이 서로에게 다가가 부딪혀 반짝이는 듯한 소리가 나는 곡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아빠가 한쪽 발을 끌더니 한 바퀴 턴을 하더니 장난스럽게 준호 쪽을 쳐다보았다.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만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엄마는 항상 아빠의 춤을 보고, 그냥 이상한 몸짓이라고 놀렸었지만, 아빠는 언제나 굴하지 않았다. 아빠는 엉덩이를 흔들었다.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나는 템포로 움직였다. 양쪽으로 흔들기도 하고, 앞뒤로 흔들기로 했다. 엄마 말대로 정체 모를 춤이었다.
준호는 아빠와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항상 웃음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학교에서 끝나고 오면 준호와 아빠는 여름에는 여름음악을, 겨울에는 아직 오지도 않은 크리스마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곤 했었다. 준호는 아빠가 춤추고 있는 옆으로 달려가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팔을 흐느적흐느적거리며 오징어처럼 움직여 보기도 하고, 아빠처럼 엉덩이를 흔드는 춤도 춰보았다.
시간이 지금보다도 더 느리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아빠와 함께 영원히 있고 싶었다. 아빠는 춤을 멈추지 않고 몸을 흔들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빠, 어디 가는 거야?”
준호는 눈앞에 있는 아빠를 놓치기 싫어하는 갓난아이처럼 아빠 뒤를 쫓아가며 다급하게 물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야지!”
“크리스마스트리?” 준호는 주위에 널려있는 트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빠는 멀리서부터 보였던 커다랗게 정체 모를 물건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준호는 혹시라도 정체 모를 물건들이 아빠에게 떨어질까 긴장하며 아빠 옆으로 뛰어갔다. 아빠는 커다란 박스같이 생긴 알록달록한 것들을 쌓기 시작했다. 준호는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아빠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커다란 박스같이 생긴 것의 정체는 레고조각이었다. 커다란 레고조각들이었다. 아빠가 커다란 레고조각을 톡톡 건드렸다. 커다란 레고조각의 아빠의 손이 닿을 때마다 색이 변하고 있었다. 아빠는 커다란 레고박스의 색을 초록색으로 만들었다. 준호도 아빠를 따라 직사각형의 넓은 레고조각을 톡톡 건드려보았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차례대로 색이 변했다. 색이 변한 뒤에는 조각의 모양도 바뀌었다. 준호도 아빠처럼 커다란 레고조각을 초록색으로 만들었다.
“이걸로 트리를 만들게?”
“그럼, 잘 아네.” 아빠가 씩 미소 지었다.
커다란 레고조각은 공기처럼 가벼워 금방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초록색의 레고조각들에 올라서서 또 다른 조각들을 올렸다. 준호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아빠와 눈사람을 만들고, 트리를 장식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높이 높이 쌓아 올렸다. 중간중간 빨간색의 장식도 만들어 쌓았다. 높이가 점점 쌓이니 밑바닥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와, 진짜 높다.”
준호와 아빠는 이제 트리의 가장 꼭대기 층에 올라와 있었다. 트리 꼭대기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준호는 저 자리에 커다란 별 모양의 장식이 들어가면 어떨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큰 트리를 만들었어, 준호야. 멋있지?”
준호는 트리 아래를 쳐다보았다. 장식모양의 레고 조각들에서 빛이 흘러나와 마을 전체를 비추는 것 같았다. 마을의 모습과 레고 트리가 함께 잘 어우러졌다.
“근데 우리 이제 어떻게 내려가?”
“저쪽으로 가야 해.”
레고조각들을 마을 중앙에 높이 쌓자, 막혀있던 길이 보였다. 그곳에는 언덕 하나가 있었다. 아빠는 그 언덕을 향해 가야 한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갑자기 트리에서 뛰어내렸다.
준호는 너무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준호야, 괜찮아.”
아빠 목소리가 들리자, 준호는 가렸던 손의 틈 사이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인했다. 눈앞에는 커다란 풍선이 떠올랐다. 아빠가 풍선 안에 서있었다. 아빠 옆으로는 아빠보다도 훨씬 큰 크기의 색색의 풍선들이 자신을 쫓아오라는 듯이 두둥실 떠올라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준호야, 풍선에 타면 돼.”
“풍선에 어떻게 타?”
“그냥 거기서 뛰어내리면 돼. 그러면 풍선이 알아서 태워줄 거야.”
“풍선이 알아서 날 못 태우면?”
“할 수 있어~’
“으….”
준호는 아빠의 말을 따라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트리에서 뛰어내렸다. 어느새, 준호는 아빠처럼 풍선 안에 두둥실 떠올라 언덕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언덕을 향해 가는 동안, 준호는 뒤로 돌아 트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빠는 풍선을 타고 별 하나를 향해 가더니 별 하나를 따서 트리 꼭대기에 달았다. 완성된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는 마을 풍경이 보였다.
풍선은 언덕으로 데려다주었다.
아빠는 언덕에 드러누웠다.
준호는 아빠를 따라 누웠다.
둘은 멀리 별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와…”
이대로 이렇게 계속 있고 싶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여기에 있자.
그냥 여기서 모두 잊고, 이렇게 그냥 같이 누워있자.
아빠는 이걸로도 충분해. 준호가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준호가 하고 싶던 말을 아빠가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아빠는 준호에게 팔베개를 해주었지만, 마치 땅에 머리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우는 돌아가고 눈사람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혼자가 된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두려움이 없어진 눈사람은 여기저기 숲 속을 헤매며 준호를 찾아다녔다. 눈사람은 무언가에 걸려 철퍼덕 넘어졌다. 눈사람의 눈앞에는 잠들어있는 준호가 있었다. 준호는 하얀 숲의 환상 속으로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준호야, 일어나! 준호야! 일어나야 해!”
준호는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준호가 있는 동굴에서 눈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희미했고 아빠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준호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눈사람은 정신 차리지 못하는 준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일어나라고!!! 여기에 평생 있을 수 없어!!!”
하지만 준호는 꿈쩍도 안 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준호가 아빠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질 수는 없어. 준호는 손에 느껴지는 빈 공간을 느꼈다. 준호의 손에 와닿은 것은 그저 차가운 수증기뿐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 신경 쓰지 않았다. 준호에게 진실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준호는 아빠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빠가 어디에선가 나뭇가지를 주워와 팔을 만들어주었다. 준호 주머니에는 준호가 간식으로 먹던 젤리와 초콜릿이 있었다. 젤리와 초콜릿으로 눈사람의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눈에는 샛노란 타원형의 레몬맛 젤리, 코에는 복숭아 맛의 분홍색 하트 모양 젤리 그리고 몸통에는 버튼처럼 동그란 아몬드 초콜릿 세 개를 쪼르르 붙였다. 머리 위에 귀엽게 작은 초록색 나뭇잎도 붙여주었다.
눈사람은 하얀 숲이 만들어낸 준호의 환상 속에서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냈다. 눈사람은 준호아빠의 환상을 불러냈다. 준호의 뒤쪽에서 또 다른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호야, 여기서 빠져나갈 시간이야.” 또 다른 아빠가 말했다.
준호는 뒤쪽으로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여기서 나가면 더 이상 아빠를 못 보잖아.”
“아빠를 왜 못 봐-” 아빠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빠가 영원히 사라지는 거잖아.”
“내가 왜 사라져- 준호야,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안 사라지면 되는 거잖아. 내 앞에서 사라지지 마. 절대 가지 마.”
“아빠는 항상 같은 곳에 있어.”
“아니야, 아빠는 이제 없어…. 그러니까 이상한 말 하지 말고 계속 내 옆에 있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해. 사랑은 영원하니까. 사랑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강해서 우리가 헤어져도 절대 사라지지 않아.”
준호는 눈사람이 만들어준 아빠에게서 진짜 아빠를 느꼈다. 아빠가 있었다면 분명 저렇게 얘기해 줬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제 아기 곰은 아빠 곰이 되어 준호에게 그 이야기를 다시 전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아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아빠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준호야, 아빠는 항상 똑같은 곳에 있어.”
“똑같은 곳에?”
아빠는 준호의 심장 쪽을 가리켰다. “항상 여기에 있어. 준호 안에. 그러니까 언제든지 마음껏 슬퍼해도 돼.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이곳에서는 떠나야 해.”
준호는 아빠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 마지막 한 번이라도 꽉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준호는 알면서도 허공의 환상을 꽉 끌어안았다. 이상하게 준호는 아빠를 정말로 끌어안은 것 같았다.
준호는 그렇게 눈을 꼭 감았다. 아빠와의 이별을 하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