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계여행자
“내일은 발리에서 마사지
모레는 파리에서 쇼핑을!
그다음 주엔 하와이에서 서핑을!!!”
“벌써 벤쿠버만 열 번째야.이번엔 또 뭐 사 올까?”
“ 나 또 하와이 떴어. 누가 여름옷 좀 빌려줘!!”
불가능할 것 같지만 승무원이라 가능하다. 나의 한 달 스케줄 또한 이러했고 , 장거리부터 중단거리까지 많은 곳을 비행하고 여행했다. fsc(대한항공/아시아나) 와같은 메이저 항공사는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니 유럽, 미국을 여행할 수 있다. 보통 일반의 직장인들은 연차나 , 긴 휴가를 제외하고선 여행을 다니기 힘든데 승무원의 경우 해외 체류시간이 길게는 5-6일(장거리) , 짧게는 반나절-하루정도(중단거리)의 시간이 주어진다.
체류하면서 체류비라는 소정의 금액도 받고 , 맛집 , 관광 쇼핑 등의 활동을 하며 다양한 문화와 경험을 비교적 많이 접할 수 있으니 젊었을 때 하기 좋은 직업인 건 분명하다.
여섯 번의 하와이를 갔을 때였다.
호텔 앞 카페 직원이 물었다.
“너는 왜 항상 혼자 오니?"
“나는 잠깐 비행으로 왔어 곧 내일이면 떠나”
하긴.. 혼자 수영하고 혼자 사진 찍고.. 신혼여행으로나 오는 하와이에 혼자 처량하게 혼자 커피를 마시니.. 분명 친구나 연인과 싸웠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혼자 마시는 커피였지만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하와이의 코나 커피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언니 이번 달 몇 시간 비행했어요?"
" 나 이번 달 100시간 채웠어 , 오늘은 내가 쏜다"
" 도저히 몸이 아파서 안 되겠어.
내일 병가 쓰고 쉴래"
승무원의 연봉은 기본급에 비행수당 , 체류비가 플러스되는 시스템이라 매달 월급이 다르다. 비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높게 받는데 보통 월평균 80-100시간을 비행한다.나의 경우 한 달마다 3번 정도의 장거리 비행을 했기 때문에 평균 70-80시간을 채울 수 있었고 대략 300대 중반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한중노선 제외). 비행이 많으면 많을수록 ,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몸은 고단했지만 , 그만큼 주어진 오프(휴일)도 많았기에 별다른 불만 없이 만족하며 일했던 것 같다.
확실한 건 , 적게일 해도 주변 일반 직장인 친구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한 달에 유럽 세 번만 다녀와도 300대 후반,거기에 휴일도 월평균 14-15 회 이상을 쉬게 해 주니 여행을 하며 돈을 벌고 워라벨이 보장되는 꽤나 만족스러웠던 직업이었던 것 같다.물론 체력적으론 늘 힘들었지만!
어느 누군가는 적게 받아도 되니 비행 없이 쉬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 반면 쉬지 않아도 되니 많은 돈을 받으며 비행을 하고 싶다는 동기들도 있었다.각자가 생각하는 일과 휴식에 대한 기준이 달랐고 그 어떤 것에도 정답은 없다.
“너희는 좋겠다.. 공짜로 비행기도 타고.."
우리 회사는 1년에 한 장씩, 2년엔 두장씩 국내, 국제 티켓이 각각 나왔다. 국내는 말 그대로 중국 국내용이고 국제는 중국 외의 나라를 갈 수 있는 티켓이다. 항공사에는 연맹 업체가 있는데 스카이팀인 대한항공 , 동방항공 등의 같은 항공사 소속일 경우 코드쉐어가 가능하다.
즉 회사가 제공하는 무료항공권으로 대한항공의 비행기를 타고도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국내 , 외항사 모두 직원에게 제공하는 무료항공권은 스탠바이 티켓(stand-by)이라고 항공기에 빈 좌석이 있어야 직원이 탈 수 있다. 즉 그날항편에 예약이 다 꽉 차면 항공권을 쓸 수가 없다. 하지만 간혹 노쇼 (no-show) 승객이 생기기도 하니 , 이때 체크인 마감 때까지 기다렸다가 빈 좌석이 나면 그때 항공권을 받아 탑승할 수 있다.
아쉽게도 여태껏 나는 무료항공권을 쓴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이상하게 일말 고는 비행기에 타는 게 너무나 싫었다. 쉬는 날까지도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로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기분이랄까?
여행은 좋아했지만 비행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응급상황 발생!
기내에 의사분이 계시다면 급히 갤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
" 도와주세요! 아내가 숨을 쉬지 않아요.!!!!!!!.."
" 너 누가 기내서 커피 마시래?
너네 한국인 총괄 담당자 누구야?
너 당장 면담 갈 준비 해!"
승무원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하느라 힘들겠다고 얘기하지만사실 제일 힘든 건 예기치 않는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퀵턴을 가든 단거리, 장거리 비행을 하든 온갖 무수한 일들이 발생하는 곳이 바로 기내이다.
멀쩡하게 주무시던 분이 갑자기 쓰러지시기도 하고 ,이륙 전까지만 해도 방긋방긋 잘 웃어주던 손님도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진상 손님으로 변해버리시고 , 취한 손님 간에 싸움이 벌어지시기도 하고 , 갑자기 태풍으로 인해 딜레이가 되어 8시간 내내 쇼업실에서 멍 때리며 기다려야 하기도 하고 , 갑자기 닥쳐오는 난기류에 벌벌 떨며 점프싯에 앉아있어야 할 때도 있고 , 이상한 사무장을 만나는 날엔 잠을 깨기 위해 마신 커피 한잔으로 승무부 면담까지 이어지는 최악의 경우도 발생한다.
즉 ,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곳 기내이다.
승객의 생명과 직결되는 직업이기에 혹여라도 승객의 안전에 문제가 생기는 비상상황에서는 주변 승객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예민해지기 마련이고, 그때 대처하는 능력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교육생 때 수없이 많은 이론과 실습교육을 배워왔지만 실제상황에선 누구나 당황하기 일쑤고 머릿속이 하얘져 그렇게 닳고 닳아 외웠던 5대 설비가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 이 상황이 얄밉고 야속하기만 할 뿐이다.
*최악의 기내 썰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잊지 못하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밴쿠버행의 인도 부부 중 아내분이 갑자기 숨을 쉬지 않고 쓰러지셨다. 놀란 나는 사무장님을 긴급 호출했고 얼른 구급상자를 꺼내 맥박을 재고 , 산소호흡기로 산소공급을 해드렸다. 다행히 환자의 상태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호흡 또한 진정되었다. 지속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며 몇 시간의 장시간 비행에도 불구하고 모든 승무원이 쉬지 않고 돌아가며 환자를 돌보며 착륙할 때까지 무탈하기를 한마음 한뜻으로 바랬다.
환자의 상태는 나아졌지만, 그 후에도 밀 서비스를 하면서, 잠깐 갤리에서 쉬어도 머릿속엔 온통 그 부부만 생각이 나고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아마 나를 포함한 모든 기조들이 다 같은 마음이었겠지... 남편분은 마지막 밀 서비스가 나갈 때까지 식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 아내 옆에서 계속 기도를 하며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기만 하셨고. 그 모습이 안쓰럽고 마음이 불편해서 나의 구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더 필요한 게 있는지 계속 오며 가며 몇 차례나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그때 다급히 나를 불렀던 남편분의 목소리가 생생히 기억난다. 1초라도 늦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당장 응급실을 갈 수도 없고 , 구급차를 부를 수도 없으니..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뿐이다.그 밖은 신의 영역이니까.탑승부터 착륙까지 , 짝을 지어 공항을 지나 기내에 들어서는 매 순간이 마냥 들뜨고 설레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불안했고 두려웠다.
예기치 못한 사고는 늘 불시에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 여러모로 강한 멘탈을 요구하는 직업.
괜찮아.
그렇게 성장하는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