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완벽한 세상 속에는, 우리 모두 한가히 지상낙원에 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우린 그런 완벽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않았요." - 존 제르잔
"In a perfect world, we'd all be unemployed and living in a utopian paradise. But we don't live in a perfect world." - John Zerzan
사실 우리에게 '완벽한 곳'은 존재하지 않다는 걸 캐나다 와서 깨달았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희망이라곤 한 줄기 보이지 않는 곳일수록 미지의 다른 세계를 더 갈망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때는 입사 2년 차도 안 된 신입사원이었지만 매일 출근하고 야근하는 게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또다시 시작된 아침 출근길,
회사 정문까지 길게 늘어져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줄,
형식적인 인사, 뭔가 답답하고 어색한 분위기,
퇴근 전 정리했지만 어느새 두 자리 숫자가 된 빨간 메일함 숫자,
탕비실에 사람이 없기만을 기다리다가 빨리 가서 커피를 내렸지만 전자레인지에 30초만 데운듯한 미지근한 아메리카노,
숨도 돌리기 전에 울리는 전화,
오늘따라 갑자기 업데이트를 강행하겠다는 윈도우까지...
누군가가 제게 직접적으로 나쁘게 대하진 않았지만 이 작은 불편한 것들이 쌓이고 계속되면서 적응하겠다는 마음보다는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퇴사 후 1년 동안 준비기간을 가진 뒤 캐리어 달랑 두 개 들고 캐나다로 왔습니다.
네,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어요.
캐나다.
예전 나의 첫 중학교 원어민 영어선생님의 고향,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가수 Sum41과 Alanis Morissette이 태어난 곳.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곳. '겨울의 왕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낫기에 괜찮을 거란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캘거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자정이 넘었지만 저를 픽업해 주셨던 고마운 홈스테이 백인 부부,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학교관계자, 상쾌한 공기와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친근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룸메이트들 등 저의 첫 캐나다에 대한 인상은 완벽했습니다. 직접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부딪히기 전 까진 말이죠. 어느 나라든 돈을 벌어 먹고사는 일엔 힘든 점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 10년간 살면서 힘들었던 점, 지금도 적응하려고 하는 것들이 몇 개 있지만 우선 세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인종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실 장점이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선 여러 나라 음식을 그 나라에 직접 가지 않고도 맛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베트남, 태국, 중국, 아랍, 아프리카 음식 등 한국에서 많이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집 앞에 있는 분식집 가듯이 바로 갈 수 있고 맛도 괜찮습니다. 또한 저 혼자만 타국 사람이 아닌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이민자들이 있기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캐나다는 좋게 말하면 다양한, 사실대로 말하면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무척이나 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상식밖의 사람들도 그만큼 많아서, 어느 정도 상식이 통하는 한국에 비해서 경험하는 인간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습니다.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살다 보니 백인위주의 사회라는 것도 점점 느끼게 됩니다. 우리 회사 조직도만 보더라도 팀장 위로는 모두 백인이고, 뭔가 유색인종을 가르치려는 태도, 다른 인종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뉘앙스, 말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는 것 같아요.
백인 다음으로 우리가 우세하다고 주장하며, 거짓말이 생활화된 인도 사람들, 눈 작다고 아시아계 인종을 무시하는 필리핀 사람들도 많이 보았죠. 뭐 어디까지나 10년 동안 살면서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이고 생각들이니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인종에 관계없이 정말 친절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멀리서 보면 여러 재료들이 다채롭게 어우러져 먹음직스러운 샐러드 같아도, 자세히 보면 뭔가 뒤죽박죽 된 뭉개진 와중에 이기적인 사람들과 이타적인 사람들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 캐나다라고 느꼈습니다.
한국 직장생활에 비해서 캐나다에서 직장생활이 가지는 장점은 아마 워라밸 일 겁니다.
회식은 1년에 한두 번 점심시간 때 '런치 회식(?)'을 하고,
야근도 없고,
회사 행사나 연말 성탄절 행사는 회사에서 깔끔하게 하며,
사정이 있어 늦게 출근해도 일찍 퇴근해도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문제없는 곳이 대부분의 캐나다 회사의 모습일 거예요.
한국에서는 야근도 많고 그 와중에 회식도 잘 소화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는데, 여기서는 회식이 그리울 정도입니다. 그렇게 사람들과 한국말로 얘기하고 직장 내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여긴 드물거든요.
하지만 이런 모습 뒤엔 몇몇 단점이 있습니다.
우선 잘 자릅니다. 가차 없이 자르죠. 서로 전혀 몰랐다가 바로 다음 날 잘린 동료들을 많이 봤습니다. 정직원이라는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회사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되면 바로 해고당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다른 부서로 발령하거나 승진을 안 시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칼 같습니다. 미국에서 나쁜 건 잘 가져온 것 같아요.
그리고 자기 할 일을 프로페셜널 하게 잘하는 사람만 살아남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단점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자기 할 일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항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일해야 한다는 말인 것 같아요. 내 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사가 말하기도 전에 '주도적으로' 다른 부서에 미리 연락해서 관련 정보를 확인해야 하고, 매주 해야 할 업무가 주어지면 잘 마무리하고 보고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엉덩이가 오늘 의자에 몇 시간 동안 붙어있었냐가 중요하기보다는, 업무를 얼마나 잘 마무리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잘 안 됐으면 무엇 때문에 안 됐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할 필요도 있죠. 즉, 주도성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그리고 남의 개인사에 별로 신경 안 쓰고 자기 일만 신경 쓰기가 회사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인데, 여태껏 수동적으로 일을 해왔고 말도 조리 있게 잘 못하는 제게는 아직까지 힘든 부분이긴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를 거의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드를 많이 봤고 에미넴, 린킨파크 같은 미국 힙합, 락 아티스트들을 좋아했죠. 하지만 한국문화 총량의 법칙 때문일까요? 여기서는 오히려 한국 것을 많이 찾게 되더라고요. 고국이 그립기도 하고, 다른 인종 친구들과 마음속 깊은 유대관계를 이루기도 힘들고, 밤 8시만 되면 가게가 문을 닫고 할 게 없어서, 한국적인 것을 많이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떡볶이와 된장찌개도 해 먹으면서 한국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소한 행복을 즐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캐나다에서 잘 융화되지 못하고 여기도 저기도 속해있지 못한 이방인이 되어가는 씁쓸함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불효자가 되는 느낌입니다. 울산에서 태어나서 20대부터는 수도권에서 자취를 했기에 자주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지만, 한국에 살면서 자주 뵙지 못하는 것과 태평양 건너 타국에 있어서 뵙지 못하는 것은 아주 많이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12시간 만에 갈 수 있는 한국이지만 아이가 클수록, 여기 더 오래 살 수록 그렇게 자주 못 가게 되더라고요. 한국에 갈 때마다 깊어져 있는 부모님의 주름, 2주일 밖에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 이번에 가면 내년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드는 걱정은 비단 저뿐만 아닌 타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 1세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주에 다시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2주 정도 있을 예정이고요, 다시 그리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가 됩니다. 그래도 캐나다에서 계속 살고 있는 이유는 다음 주에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