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산토리니까지
산토리니에 가보고 싶었다.
그때 당시 손예진 배우가 나오던 포카리스웨트 CF가 있었는데 그곳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는 곳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곳이 그리스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설렜는지 모른다.
https://youtu.be/KZAbjK42U7I?si=E8u41wk6OPM3d5ni
지금 보니 미코노스, 산토리니를 오가며 여러 포인트에서 촬영한 것 같은데, 그때는 여기가 그리스 산토리니라는 정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나의 첫 유럽 여행지는 그리스 산토리니가 되었다.
아테네 공항에 내려 숙소로 예약해 둔 한인민박에 체크인을 했다.
짐을 대충 내려두고 신타그마로 가서 교대식을 잠깐 보고 아크로폴리스로 걸어 올라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던 것 같다. 우산은 없고 그냥 맞고 가기엔 비가 너무 세서 근처에 있던 아무 카페나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소중하게 분철해 온 론리플래닛이 젖을까 봐 제일 걱정을 했었다.
그때 내가 구입해 간 가이드북은 론리플래닛 유럽 한글판이었다. 두께가 거의 백과사전에 육박하는 엄청 두꺼운 가이드 북이었는데 그걸 나라별로 분철하고, 내가 가고자 하는 나라의 낱권만 챙겼는데도 상당히 부피가 컸다. 유일한 여행 정보였기 때문에 이걸 잊어버리거나 훼손하면 곤란했다. 계획대로라면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려 시내 지도를 받았어야 했는데 비가 와서 못 갔는지, 못 찾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여행은 내 인생의 첫 해외여행이었고, 첫 배낭여행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첫날의 몇 장면만은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그중 하나가 비가 그치지 않아 한인민박으로 찾아가는 내내 어둡고 습한 길을 걸으면서 매우 무섭고 우울했던 그때의 그 기분이다.
엄청난 기대와 설렘을 갖고 도착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설렘보다는 낯설고 어리둥절해서 모든 게 무서웠다. 특히 해가 지고 난 후의 깜깜한 주택가를 몇 바퀴인가 돌았는데 그 집이 그 집 같아서 내 숙소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하면 좋겠는데 핸드폰은 한국에 두고 왔기 때문에 - 피처폰은 로밍을 하지 않는 이상 해외에서 큰 쓸모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중전화를 찾아야하는 미션이 하나 더 추가될 뿐이었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캄캄한 주택가를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결국 찾아들어가긴 했지만 춥고, 우울하고 두 달이나 남아있는 이 긴 여행을 잘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저녁을 챙겨주겠다는 민박주인의 제안도 거절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산토리니로 가던 날도 그랬다.
아테네에서 항구까지 이동, 배를 타고 8시간인가 꽤 한참을 가야 하는 무척이나 먼 길이었다.
태어나서 배를 몇 번 타본 기억도 없는데 8시간이라니....
나는 가장 싼 표를 샀기 때문에 배 안에 있는 자유석을 왔다 갔다 하면서 8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산토리니에 도착 예정 시간은 밤 11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의 배낭여행자들에겐 호텔을 미리 예약한다는 개념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우선 내려서 항구에 많다는 호객꾼들 사이에서 호텔을 골라야 했다. 그 현실 역시 마음을 무겁게 했고 우울감에 크게 한 몫을 했다. 영어도 자신 없고, 도무지 호텔이란 것을 고를 때 뭐가 장점이고 뭐가 비교 포인트인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호텔을 구하지...? 혹시 아무것도 구하지 못해서 노숙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항구에 도착하고 나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호객꾼이 나와있었다.
사람들이 보여주는 호텔 사진을 구경하다가 금액이 저렴한 한 곳을 골라 숙박하기로 하고 그의 봉고차에 올라탔다. 가는 내내 내가 본 것은 새카맣게 까만 풍경뿐이었다. 여기가 그 환상적인 풍경을 가진 산토리니가 맞긴 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는 방에 짐을 풀고 씻고 바로 잠에 들었다. 어쩌면 이 여행은 내내 지루하고 우울하고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다음 날 아침
이 날의 기억도 선명하다. 새카만 풍경만 보고 달려와 잠들고 나서 테라스로 이어지는 방 문을 열었을 때.
좁게 열린 문 틈으로 온통 새하얀 풍경이 가득했다.
호텔은 작은 규모였지만 내가 그토록 꿈꾸던 하얗고 파란 산토리니만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밤에 도착했을 때는 가로등 하나도 없어서 주인이 비춰주는 손전등 불빛을 따라 들어와서 내가 체크한 호텔이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2004년 5월
아직은 성수기가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라 호텔의 손님은 얼마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호텔 주인은 손수 만든 지도를 나눠주었고 거기엔 산토리니의 주요 관광지 정보가 꽤 많이 적혀있어 유용했다.
기분은 당장 좋아졌다.
어젯밤까지 가득했던 우울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공기는 맑고 깨끗했고, 햇빛은 뜨겁지만 바람은 서늘할 만큼 차가워서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공기였다.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여행을 떠나고 만 이틀만의 제대로 된 식사였다. 두꺼운 페타치즈도 이때 처음 먹어보았다.
길어봐야 하루이틀쯤 묵는 경우가 많은 산토리니에서 나는 5일을 넘게 체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좋았다. 페리사 비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고, 목적도 없이 이아(Oia)나, 피라(Fira) 같은 곳에서 종일 산책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아테네에서의 하루는 우울하고 답답한 회색으로 가득했는데(날씨 탓도 있었겠지만) 산토리니에서는 갑자기 모든 세상에 총 천연색이 된 기분이었다.
같은 지구 안에 이런 세상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전까지는 책이나 영상 속 세상이었던 곳에 직접 와보니 정말 나는 얼마나 별 것 아닌 인간인가-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이 배낭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꼬박 1년을 돈을 모았었다. 그만큼 그 당시의 나에게는 인생 최대의 큰 지출이기도 했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왔기 때문에 내 인생에 두 번째의 여행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결심과 저금을 다시 열심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때만 해도 해외에 여행을 간다는 것이 지금처럼 쉽게 생각되는 시절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산토리니에 머물면서 굳은 결심을 했다. 무서워도, 힘들어도 이 여행 기간동안 하고 싶은 것은 다해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