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Bulgari) x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콜라보 '비제로원' 밴드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명품 반지가 있다?
예물반지 하면 빠지지 않는 후보 중 하나인 불가리의 '비제로원(B.Zero1)'. 그저 결혼반지 후보 중 하나로 진열장에만 있기에는 그 강렬한 색과 향이 아쉬워, 볕 잘 드는 곳에 꺼내 마음껏 빛나게 하고 싶은 그런 친구다. 비제로원은 1999년에 태어났다. 140년쯤의 오랜 역사를 지닌 불가리라는 브랜드에게 이 밴드 형태의 반지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우쭈쭈 어린 아기쯤 될 것 같다. 뉴 제너레이션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다소 독특한 이름도 흥미롭다. 불가리의 첫 알파벳 'B', 무한함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0'과 '1'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이름. 컴퓨터가 새로운 천년을 인식하지 못할까 걱정했던 뉴 밀레니엄 직전의 시기를 떠올려보면, 시대상이 네이밍에 미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Y2K라는 이름의 밴드가 인기리에 활동했던 걸 감안하면 그래도 얌전한 네이밍이 아닌가 싶다.
불가리(Bulgari) x 자하 하디드(Zaha Hadid) 콜라보 '비제로원' 밴드
비제로원은 예술로 태어나 현재까지도 예술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로마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의 디자인 유산을 계승한 덕분에, 비제로원은 건축, 문화, 예술 등 그 어떤 방면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얻었다. 그런 그녀는 자라면서 몇 명의 예술 대가들을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와의 만남도 그중 하나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디자인한 것으로도 알려진 자하 하디드는 특유의 해체주의 건축을 비제로원에게 선물한다. 뼈대와 공간으로 재구성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하 하디드의 건축물이자 반지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
불가리(Bulgari) x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콜라보 '비제로원' 밴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제로원은 아니쉬 카푸어라는 멋진 인도 남자도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해 비제로원이 철의 여인으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그와의 만남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아니쉬 카푸어는 불가리에게 자신의 작품 철학 중 소재에 대한 집념을 투영했다. 그는 본인의 시그니처 소재 중 하나인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하고자 했고, 하이주얼러로서 일평생 화이트 골드나 플래티넘만을 사용해 하얀 빛깔을 빚어왔던 불가리는 아니쉬 카푸어라는 과감한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아니쉬 카푸어의 스틸이 비제로원 반지 중심부에 매끈하게 자리 잡는다. 기브 앤 테이크의 세상. 아니쉬 카푸어가 하나를 받았으니, 하나를 줄 차례가 됐다. 당연히 예술성을 한 스푼 듬뿍 떠 넣어줘야겠지. 그는 미러 폴리싱을 마친 매끈한 스틸에 오목한 왜곡을 가했고, 반지 주변의 사물과 환경이 반지에 독특하게 반사되도록 만들었다. 반지에 사람도, 하늘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오목하게. 그래서 반지가 예술이 되어버리게.
미워할 수 없는 소재 탐닉자
스테인리스 스틸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소재다. 주방 식기는 물론 만년필과 수술용 도구, 더 나아가 항공우주 구조물까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스틸은 매력적인 소재다. 비교적 쉽게 구하고 제련해낼 수 있으며, 강한 내구성과 엄청난 광택이라는 특징 덕분에 작가의 손을 통해 아름다운 스틸 작품이 탄생하곤 한다. 1954년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사실 그는 돌, 스틸, 붉은 왁스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기로 유명한데, 1990년대 중반부터 광택이 나는 스테인리스 스틸을 자주 사용했다. 그의 스틸 작품은 세상을 담아냄과 동시에 비틀어버리며, 관람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Cloud Gate> , 2006
2006년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클라우드 게이트>를 보자. '더 빈(The Bean)'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시카고의 스카이라인과 하늘과 구름,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관람자를 때론 볼록하게, 때론 오목하게 담아내며 마치 비밥 재즈의 변주를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이런 작품들을 통해 존재와 부재, 물질과 비물질 성의 경계에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의 작품에 반사된 하늘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거울처럼 말끔하게 빛나는 스틸판에 비친 하늘을 보는 순간, 우리는 스틸이라는 무겁고 둔탁한 본연의 물질성을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하늘일까, 철판일까?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Sky Mirror>, 2018
식을 줄 모르는 소재에 대한 탐닉을 지속했던 아니쉬 카푸어. 그는 비교적 최근 소재로 인해 좋지 않은 일로 이슈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2014년 영국 서리나노 시스템이라는 회사가 개발한 반타 블랙이라는 신 물질에서 시작된다. 빛을 99.96% 흡수하는 이 놀라운 물질은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 활동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공간감을 상실하게 하는 놀라운 물질의 특성을 이용해 <림보로의 하강>과 같은 작품을 선보이게 된 것. 반타 블랙을 덧칠한 구덩이 작품을 보고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관람객이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그는 신 물질을 활용해 관람객에게 더욱 깊은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림보로의 하강(Descent into Limbo)>, 1992
문제는 언제나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아니쉬 카푸어는 이 소재가 정말 좋은 나머지 본인의 재력을 이용해 예술적으로 염료를 사용할 '독점'적 권리를 사버렸다. 독점이라니. 전 세계 예술가들은 재력과 권위를 이용해 다른 예술가들이 소재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다며 아니쉬 카푸어를 맹비난했다. 이 사건은 예술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과 기사 작위까지 받은 그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남기게 됐다. 이른바 '반타 블랙' 사건으로 불명예를 얻게 된 아니쉬 카푸어. 그의 치사함은 질타받아 마땅하지만, 맹수처럼 소재에 달려드는 그의 욕망은 미워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그의 예술혼이 앞으로 또 어떤 소재와 방법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할지 궁금하다, 약간의 걱정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