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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Aug 12. 2024

나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는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출산 한 달 후 간단한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다 다시 갈색 푸들과 산책을 나온 나를 보며, 평소 인사를 건네던 이웃들은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며 안부 인사를 건네고는 했다. 그중 아이가 있는 이웃들은 "viel Spaßmit Schlaflose Nächte(이제 잠은 다 잤네!)"라며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로 우리를 골려주기도 했다. 마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처럼.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난 시간은 새벽 한 시였고 이게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면,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복선이었을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한동안 두 시간 이상 잠을 이어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유를 먹는 아이들은 잠을 길게 자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나의 아기는 수시로 젖을 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낮과 밤의 구별, 24시간이라는 익숙했던 시간관념의 상실을 의미했다. 나의 시계는 아기였다. 아이가 울면 나의 아침은 시작되고 아이가 잠이 들면 밤이 찾아왔다. 남편의 경우는 나보다는 나았지만, 평소 잠을 사랑하던 그에게 수면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은 커다란 형벌과 같았을 것이다. 평소 8시간을 자던 사람이 5시간을 겨우자고 그마저도 아이 울음소리, 수유하느라 뒤척이는 내 소리에 잠을 설치니 얼마나 신경이 곤두섯으랴. 하지만 당시 나는 그런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피곤해하며 하품을 하거나 잠을 못 자 투덜거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청난 분노가 밀려올 뿐이었다. '아이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나!'라는 생각은 수시로 들었고 화를 참을 수 없을 때는, "네가 아무리 피곤해봤자 나보다 피곤할 수는 없어!"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도 했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 본인이 얼마나 더 힘든지, 얼마나 수고하는지를 내세우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말로 고맙다, 사랑한다 표현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그것은 의례적인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자, 서로를 사랑해서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태어났는데 왜 우리는 더 불행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수유 중 남편이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불쑥  그 뒤통수를 쥐어박고 싶었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뛰어가서 엉덩짝을 시원하게 걷어차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는가.'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일주일간 우리는 아이의 황달 수치와 싸워야 했다. 집으로 방문한 조산사는 퇴원 후 삼일째 되는 날 우리에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내가 보기엔, 아피부가 꽤 노랗게 보이는데 아무래도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분명 병원에서는 괜찮다고 해서 퇴원한 것인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바로 남편과 동네 병원에서 피검사를 받았다. 작디작은 아기의 발바닥에 굵은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삼일 후 나온 결과 수치는 기준치 경계에 있었다.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우리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삼일 후 아기는 다시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려는 차 남편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 목이 좀 가려운데…”

코로나였다. 때는 이미 코로나 끝물이었기에 독일에선 코로나 환자들은 자가격리를 했다. 문제는 우리 집엔 생후 한 달도 되지 않은 신생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내리 자기 시작했다. 벽 너머로 기침소리가 들릴 때면 아픈 남편이 안쓰럽다가도 그가 침실에서 자고 있단 생각을 하면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도 아파서라도 자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은 아주 더디게 하지만 결국은 지나갔다. 자가진단 테스트를 한 남편의 표정이 밝았다. 다행히도 아이가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간 것이다. 근 일주일 만에 아기를 받아 든 남편은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도 침실과 감격스러운 상봉을 했다. 출산을 한 몸으로 일주일간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것은 꽤나 곤욕스러웠다. 그날밤 오랜만에 침대와 그리고 남편과 모두 함께 잠을 자는데 오른쪽 가슴이 찌릿! 하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젖몸살이 온 것 같네요. 미열도 좀 있죠?

다음날 방문한 조산사는 내 오른쪽 가슴 위에 파란색 스포츠 테이프를 붙여주었다. 테이핑을 마친 가슴은 흡사 파란색 과녁같이 보였다. 가슴은 아이의 보드라운 입술이 닿기만 해도 칼에 베인 듯 아려왔지만 그래도 젖은 물려야 했다. 그렇게 또 힘겨운 일주일이 지나갔다. 매일 오후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임신기간이 마치 전생처럼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의 수면부족과 비례해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오동통 젖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젖몸살이 지나가고 남편은 지쳐 보이는 나를 위해 마사지를 받기를 권유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바로 집 앞 근처 마사지샵에 다녀왔다. 그런데 마사지사가 유독 기침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야. 나 목이 따끔해..."

그렇게 나는 유행성 독감에 걸렸고 엄마와 24시간 붙어있는 아기가 그에 옮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조그만 아기의 작디작은 콧구멍이 막혀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는 것은 수면부족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나의 출산 후 한 달은 요란하게도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무엇이든 내가 희생하고 고생하는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생긴 후 내 인생은 너무 많이 변했는데 남편은 아닌 것 같았다.




”김치를 얼마나 넣어야 한다고? “, “국간장은 진간장이랑 뭐가 다른데?”

독일 남편의 입에서 낯선 말들이 들려왔다. 남편의 질문에 대답을 하니 그는 파란 수첩에 작은 글씨로 빼곡히 김치찌개 레시피를 받아 적었다. 남편이 나에게 한국 요리 몇 가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임신 막달에 접어들어서였다. 남편의 첫 김치찌개는 어딘가 밍밍한 맛이 났다. 미역국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장을 보러 슈퍼마켓에 가면 늘 같은 것만 사 오곤 했다. 식기세척기를 정리하는 법도 나와 달랐다. 내가 평소에 밥그릇을 놓는 곳에 그는 컵들을 쌓아놓았고 어떨 때는 그 안에 물이 한가득 고여있곤 했다.


남편은 서툴렀고 어설펐다. 처음 엄마가 된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의 발바닥에서 혈액 채취를 하는 순간 내 손을 꼭 잡아 준 것은 남편이었다. 주사를 맞고 자지러지게 우는 아기 때문에 내가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아기의 옷을 입히고 꼭 안아준 것도 남편이었다. 남편이 코로나에 걸린 것은 내가 집안에서 아기를 돌보는 동안 장을 보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젖몸살이 온 나를 위해 찜질팩을 가져다주고 마사지를 받으러 가라고 등을 떠밀어 준 것도 물론 남편이었다.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십 년간 변함없었던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새벽까지 함께 보던 영화가 늦은 주말 꼭 껴안고 낮잠을 자던 것이 얼마나 큰 사치였는지 우리는 아이가 생기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피곤한 날이면 '그래,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루 푹 쉬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관계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여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피곤함까지 돌보는 것은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그 힘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이 아닐까. 래서 오늘도 나는 남편 뒤통수를 때리려던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엉덩짝을 걷어차려던 발을 내리고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서툴러도 어설퍼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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