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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Aug 19. 2024

뜨겁고도 애잔한

부모와 자식 사이

남편이 내손을 지긋하게 누른다. 그러면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엄지손가락의 살갗을 떼어내다 멈추고 그 손을 꼭 쥔다.


     “제인, 괜찮아? 언제부터 다시 시작한 거야.”

심각하게 들리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나의 오랜 나쁜 습관은 손톱을 물어뜯는 것이다.


     “나도 몰라. 근데 잠깐 놔봐. 이거는 마저 뜯어야 해.”

남편은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지만 별말 없이 내 손을 놓아준다. 나는 오른손으로는 벌건 손끝을 뜯으며 왼손으로는 핸드폰 액정을 보고 있었다. 한 달 후에 독일에 손자를 보러 오는 부모님을 위해 숙소를 예약해야 했기 때문이다.


임신을 한 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 나쁜 습관을 고쳐보려 했다. 아이에게 이런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에도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어야 할 부모가 옆에서 손톱을 뜯고 있으면 되겠냐 싶었던 것이다. 아이의 첫 유치원 등원을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바라보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은 성공한 듯도 했다. 십 년 넘게 늘 짧았던 손톱이 제 모양을 찾아갔고 임신 중이라 매니큐어를 바르지는 못해도 가지런한 손끝을 바라보며 뿌듯해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오랜 나쁜 습관을 고치는 데는 일 년이 걸렸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뭉툭하고 못생겨진 손끝이 창피해 슈퍼에서 계산을 할 때도 슬그머니 숨겨야 했지만 못된 습관은 끈질기게도 내 손끝을 떠나지 못했다.


그 습관이 다시 생긴 것은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어린 시절 상처들로 얼룩진 나의 트라우마가 깊은 곳에서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트라우마는 마치 불덩이 같아서 깊은 바닷속에 있을 때는 그 온도가 느껴지지 않지만, 얕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평온했던 물의 온도가 들끓기 시작한다. 불덩이는 순식간에 차갑고 고요했던 나의 마음을 마치 근처에만 가도 위험한 용암처럼 뜨겁고 위험한 상태로 둔갑시킨다. 타지에 살면 부모는 늘 그리운 존재지만, 한편으론 매번 부모님을 마주할 때마다 삼켜도 삼켜지지 않고 지우래도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비행기가 착륙한 지 오래였지만 부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옆에서 급하게 빵을 먹고 있고 아기띠에 안겨있는 아기는 칭얼대고 있었다. 나 또한 아이를 안고 눈은 입국장에 고정한 채로 서서 빵을 먹고 있었다. 그때 부모님의 모습대신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자마자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인아, 우리 여기서 나가는 길을 잘못 찾아서 모르고 출국장으로 나갔어. 근데 여기 공항경찰이 면세품을 압수하려 하는데? 근데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 네가 한번 받아봐!"

엄마는 다짜고짜 핸드폰을 공항경찰에게 넘긴 듯했다. 살짝 짜증 돋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당신네 부모가 입국장과 출국장을 혼동한 모양인데, 아무튼 여기서는 면세품을 들고 올 수 없으니 압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억지논리였지만 독일이었다. 알겠으니 부모님을 무사히 입국장으로 안내해 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다시 삼십 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아빠는 뾰로통한 얼굴이었고 엄마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아니, 너네 아빠가 저기로 가야 한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휙 나가버리는 탓에 그랬어! 진짜 고집하고는. “

엄마의 변에 아빠의 얼굴은 더욱 경직되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고 그래도 잘 나와서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부모님은 공항에서 나와 집으로 갈 때까지 서로의 잘못을 들추고 꼬집고는 빼앗긴 면세품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근 일 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전보다 조금 더 마른 것 같았고 엄마는 지쳐 보였다. 그래도 투닥거리는 모습은 놀랄 만큼 예전 그대로였다.


그렇게 부모님은 일주일간 독일에 머무셨다. 그리고 일주일은 부모님과 나의 다른 육아방식을 확인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 며칠간은 부모님은 마치 둘이서 무언의 다짐을 한 듯 보였다. 추측 건데 타지에서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는 딸에게 불평이나 잔소리를 하지 말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독일 식당에서 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가 나와도 아기가 자느라 밥시간이 조금 늦어져도 두 분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하지만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것이 감기나 사랑뿐만은 아닌 듯했다. 이렇게 입히면 춥다고, 아이베개는 왜 안 해주냐고 또 쪽쪽이는 왜 안 물리냐며 부모님은 참았던 잔소리를 조금씩 기침처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의 절반이 지난날 우리는 근교의 한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아직 4개월뿐이 안 된 아기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휴게소에서 달래도 다시 태우면 또 울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앞 좌석에 앉아있던 아버지는 동요를 튼 핸드폰을 슬쩍 들이밀며 아기의 관심을 돌리려 하셨다. 평소 아버지에게 말을 편하게 못 하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다급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말렸다. 이내 벌줌 해진 아버지는 핸드폰을 치우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요즘은 다들 일찍 보여주던데…” 이어서는 조카가 이미 둘 있는 새언니와 나를 비교하며 내가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잠시 울컥 무언가 밀려와 대꾸를 하려던 찰나에 아기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기가 졸려서 우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엄마와 아버지 모두 아이를 카시트에서 내려서 안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달리는 차에서 아기를 카시트에서 내리는 것은 독일 교통 법규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단호한 태도를 고집했다. 그렇게 다음 휴게소가 나올 때까지 아이는 차에서 십 분가량 울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간간히 나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눈치를 주었지만 남편과 나는 정차를 할 때까지 기다렸고 차에 내려서야 아이를 바로 안아 올려 달래기 시작했다. 그때 차에서 내리던 아버지의 한마디엔 웃음기가 실려있었지만 가시도 함께 나있었다.


     “아휴 아기가 초보 엄마 아빠 만나 고생하네.”

아, 맙소사! 그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들끓었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애꿎은 손톱을 뜯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우리는 다시 공항에서 이별을 했다. 서로 많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눈에 맺힌 눈물에,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던 아버지의 고개에서 알 수 있었다. 불구덩이를 감싸주는 아주 큰 바다를 말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어느 정도는 식상하게 들리지만 또 아직도 유효한 소설의 한 문장이 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모습으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로 불행하다.’ 우리 가족도 그랬다. 겉으로는 여느 가족과 비슷하게 행복해 보였지만 우리는 때때로 나름의 이유로 불행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아이였다. 막내인 내가 모든 갈등의 순간을 더 강렬하게 받아들였던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많은 엄마들처럼 내 엄마도 ‘너 같은 자식 낳아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어릴 때는 그 말을 너무나 싫어했지만 분하게도 이제는 그 말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의 말은 너도 너 같은 자식을 낳아 고생을 해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은 네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중에 나와 같은 입장에 처해보면 너도 나를 조금은 이해할 거야.‘가 아니었을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소와 사자가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소는 사자를 위해 풀을 준비하고 사자는 소를 위해 고기를 준비했지만 결국 아무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부모와 자식의 사랑도 결국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게 아닌가 싶다. 서로를 애잔하게 사랑해서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주려하지만, 서로의 방식을 고집하면 결국엔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이제 시간은 흘렀고 나에겐 자식이 생겼다. 부모님은 그동안 많이 늙으셨고 나도 하나둘 새치가 나기 시작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어제일 같던 슬펐던 시간들도 이제는 무뎌져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지워지지 않은 트라우마는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한밤중 꿈을 꾸다가, 자고 있는 아기의 얼굴을 보다가도 흠칫 떠오르는 아픈 기억들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앞으로 아이가 한두해 자라면서 나는 부모님을 더욱더 이해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러다 언젠가는 부모님에게 ‘이건 그래도 이해가 안 돼요. 그땐 왜 그러셨어요?‘라고 물을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고 괘씸해 여길수도 있을 테지만, 그게 깨달음이 되었던 물음이 되었던 그때가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한다. 아직 우리가 뜨겁고도 애잔하게 서로를 사랑할 시간이 있을 때 말이다. 그동안 손톱은 자라고 또 다시 자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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