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한 이유
흔히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요즘 같이 공동체개념이 희박해진 시대에도 이 말은 맞는 듯하다. 아이가 생기고 난 후 온갖 사람들의 참견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와 함께 장을 보러 가면 아기는 몇 개월이에요?라는 말 뒤에는 늘 ”근데 모유수유 하시나요? “라는 말이 늘 붙어 다녔다. 정육점에 가도, 우체국을 가도 심지어 길을 가다가도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모두들 ”아유 너무 잘하고 계시네요. 모유가 최고죠! “라는 말을 했는데 반대의 경우라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지곤 했다. 사실 규칙에 관련된 것이 아닌 이상 남의 일에 간섭을 잘하지 않는 독일사람들이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참견은 모르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아기는 생후 육 개월간 흔히 옛말로 ’쇠똥‘이라고 불리었던 태지가 두피에 오돌토돌 남아있었다. 이걸 본 시댁에서는 이런저런 민간요법을 알려주며 또 한마디를 남기곤 했다. ”우리 쪽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더군다나 한국에서 잠시 방문한 친정엄마는 당시 4개월이었던 아기가 하루에 네 번 이상 변을 보는 것을 보시고는 나의 모유상태를 의심하곤 했다. “독일에는 분유 좋다는 것도 많은데, 아기는 그 좋다는 독일분유 한번 못 먹어보네.” 한국에서 악명 높다던 ‘물젖’공격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가 농담처럼 던진 한마디에 모유수유를 하기 위해 고생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하지만 이런 말을 엄마만 듣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내 귀를 스칠 때마다 그 옆에는 늘 남편이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남편은 나만큼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는 듯싶었다. 성격 탓도 있겠지만 엄마만큼 전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없기에 아기에 대한 모든 코멘트는 엄마에게 세상이 다는 악플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나 스스로도 아이가 유독 잠을 못 자는 날에는 낮에 마셨던 커피를, 아이의 변이 어딘가 무른 날에는 전날 먹은 라면을 의심하게 되었다. 아이가 잘 먹지 못해도 혹은 너무 잘 먹어도, 변을 너무 오래 못 보거나 또는 너무 자주 보거나 해도 모든 게 엄마의 탓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엄마들은 모두 서툴러도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길을 찾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기의 탄생달력을 180번째 넘기기 며칠 전부터 나는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모유수유를 하는데 익숙해졌는데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도 스트레스였지만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앞으로 할 일이 느는 것도 너무나 두려웠다. 게다가 인터넷에 정보는 어찌나 많은지, 차라리 국가에서 이유식은 이렇게 하라 법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일단 한국과 독일은 이유식 식단부터가 달랐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은 아기들도 쌀미음을 많이 먹고 독일은 역시나 감자를 주된 탄수화물원으로 삼는 듯했다. 그리고 삼시세끼 쌀을 먹이는 한국에 비해, 독일에선 저녁에는 과일이 섞인 뮤즐리를 이유식으로 먹이는 것도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아이가 직접 음식을 탐색하며 먹는 ‘자기 주도 이유식’, 죽 형태로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먹이는 ‘죽 이유식’, 쌀미음을 베이스로 여러 가지 재료들을 곁들여 먹이는 ‘토핑 이유식’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유식 메이커, 찜기, 전자레인지 용기부터 이유식 식기, 도마, 칼까지 이유식 장비 또한 알아볼수록 끝이 없었다. 아이가 잠에 들면 마치 입시공부를 하듯 여러 가지 책을 펴놓고 아이패드로는 이유식 만드는 법을 핸드폰으로는 이유식 도구들을 아마존에서 주문하며 며칠을 보낸 후 나는 남편을 향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이제 아기 이유식해야 하는데… 너무 막막해. 어쩌지? “
그러면 남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냐? “
그러면 나는 발끈해서 하지만 이내 다시 울상이 되어서는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이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하루에 몇 그램씩 먹여야 하는지, 또 새로운 재료도 꾸준히 추가해 줘야 한다고. 그리고 몇 개월 이전에는 알레르기 테스트도 다 마쳐야 한대. “
“제인, 그렇게 어려우면 우리 그냥 사 먹여도 되잖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속 편하게 말하는 남편을 흘겨봤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적의 ‘시판 이유식‘이었다. 하지만 독일에는 한국만큼 다양한 이유식 업체가 없는 데다 주로 먹이는 것은 상온에서 일 년 동안 보관이 가능한 이유식들 뿐이었다. 스스로 까다로운 엄마 대신 완벽하진 않아도 행복한 엄마가 되자고 되뇌던 나였지만, 아이 피부에 작은 부스럼만 올라와도 유독 오늘따라 목덜미가 뜨끈한 것 같아도 가슴이 철렁하게 되는 게 엄마마음 아닐까. 그렇게 결국엔 나도 유기농 채소들을 고르고 주말에는 몇 시간씩 부엌에 서서 일주일간 먹일 이유식을 만드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이유식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하루는 아기새처럼 입을 쩍쩍 벌리며 이유식을 잘 받아먹다가도 어떤 날에는 한 숟가락 먹어본 후에 몸을 격하게 뒤로 젖히며 온몸으로 먹기 싫다는 의사표현을 하기도 했다. 몇 시간씩 만든 이유식을 아이가 반도 먹지 않는 날에는 걱정과 속상함에 하루종일 고민이었고 한 그릇을 깨끗이 다 비운날에는 하루종일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도 내 아이가 밥을 잘 먹으면 그것으로 족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저녁에 육퇴를 하고 나면 피곤함에 눈을 비벼가면서도 이유식 공부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공을 들여도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루는 시댁에 갔는데 시어머니께서 아이 생각이 났다며 마트에서 간식을 사 오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간식에는 망고, 딸기 등 아직 아이에게 먹여보지 않은 여러 가지 과일들이 섞여있었다. 조심스레 사양하니 어머님은 알겠다 하시며 다시 찬장으로 간식을 넣으셨지만 나는 그날 하루종일 ‘우리 아가 간식 먹고 싶지? 근데 너네 엄마가 안된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다시 시댁을 방문했다. 그날 점심은 아버님이 좋아하는 오븐에 구운 오리고기였다. 아기는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에 앉아 집에서 싸 온 이유식을 먹었다. 모처럼 아이와 단둘이 밥을 먹이느라 씨름을 하지 않아 홀가분해진 나도 마음 편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조카들과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다 문득 돌아보니 아기 손에 웬 오리 다리가 들려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이 다 먹고 남은 오리 다리를 준 듯했다. 시어머니는 핸드폰으로 그 모습이 귀엽다고 사진을 찍고 계셨고 남편도 웃으며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기는 생후 8개월에 처음으로 양념이 된 오리 닭다리를 먹게 되었다. 심지어 남편은 내가 먹은 닭다리도 줘도 되냐고 다시 천진난만하게 물어왔다. 맙소사. 눈은 웃으며 하지만 이를 악물며 말했다. “Nein(안돼)” 그제야 남편은 상황을 파악한 듯 시어머니께 말했다. "Das reicht.(이걸로 충분해요.)"
그날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기를 재운 후 작은 가족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남편과 나 둘이었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강아지는 그 사이에 앉아 조용히 똬리를 트고 엎드렸다. 나의 주장은 아직 어린아이가 양념된 음식을 먹는 것은 좋지 않다. 그리고 최대한 재료 본연의 맛을 먼저 알아가는 게 좋지 않냐였고, 남편은 경험 많은 어른들이 어련히 다 알아서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잠시 우리는 투닥투닥하다 다른 잡담으로 넘어갔다. 십 년간 함께한 우리는 결론이 쉽지 나지 않을 것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론이 나지 않은 가족회의가 있고 이주 후 우리는 다시 시댁을 찾았다. 한낮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아주 더운 날이었다. 형님네 가족도 함께 와 우리는 지하실의 다목적실에 모여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이미 아이 옆에 앉아 이유식을 먹여주시고 계셨고 나는 덕분에 그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이가 이유식을 먹는 내내 그 곁에는 형님과 조카딸이 아이를 귀여워하며 밥 먹는 것을 구경했다. 아버님은 오전에 낚시를 갔다가 민물고기를 몇 잡아오셨다고 했다. 갓 튀긴 민물고기가 식탁에 놓였다. 생선을 좋아하는 며느리를 늘 이렇게 챙겨주시는 것이다. 후식은 수박이었다. 아버님이 투박한 손으로 큼직하게 자른 수박을 온 가족이 나누어 먹었다. 이제 이가 두 개 나온 아기도 오물오물 수박을 먹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며 나는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건 한 아이를 키우는데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가 여러 사람을 접해보고 그를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또한 부모도 자신의 생활방식 또는 사고방식을 넘어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세상을 조금 더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늘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완벽하게 조금 더 좋은 것들을 아이에게 주려할수록 세상엔 거슬리고 불편하고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수두룩 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그 과정에서 타협을 하고 양보를 하고 관용을 보여주며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을 보며 아이는 자랄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가 세팅해 놓은 완벽한 온실이 아닌, 조금은 어수선해도 사랑이 가득한 오두막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