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바제인 Dec 07. 2020

C - Chaos (혼돈)

독일어 어학원에서 일어난 갈등

EP. 03

C - Chaos (혼돈)



독일어 초급반을 맡게 된 선생님은 쉰이 조금 넘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사실 그녀의 나이를 한눈에 가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리호리한 그녀의 실루엣은 항상 청바지와 카디건 등 캐주얼 한 옷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게다가 그녀의 금빛 단발 곱슬머리는 그녀의 인상을 더 발랄하고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늘 수업에 열성적으로 임했고, 학생들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학생들의 대소사를 자세히 알고 있었고, 수업 시작 전과 후에는 시간이 있으면 늘 학생들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심지어 학생들은 종종 독일어 수업과 관련이 없는 독일어로 된 고지서나 안내문 따위에 대해서도 질문을 했지만 선생님은 귀찮은 내색 없이 그들을 도와주곤 했었다. 그녀는 하루에 세 시간씩 수업을 받고 헤어지는 우리의 독일어 선생님이었지만 때로는 독일이 낯선 학생들의 상담소 역할을 기꺼이 해주었다.


선생님만큼 나도 늘 어학원에 일찍 오는 편이었던지라 종종 그녀가 수업 준비를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수업 자료들을 꺼내어 놓고 안경집에서 모서리가 각진 안경을 꺼내어 썼다. 그녀가 입술에 립밤을 바르고 핸드크림을 듬뿍 얻은 양손을 꼼꼼히 주무르기 시작하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책을 펼쳐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핸드크림을 바른 후에는 늘 곧 수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녀의 사소한 습관들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성격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늘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수업을 했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할 때는 조금 더 중저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녀는 성실한 학생들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숙제를 못 해왔다고 해서 학생들을 면박 주거나 구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업 태도가 불성실하거나 남들에게 방해를 주는 학생들에게는 늘 엄했고, 성과보다는 수업에 대한 집중과 예의를 더 중요시했다.

 

수업이 한 달 정도 진행되었을 때 계절은 늦겨울에서 초봄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따듯해진 날씨에 따라 학생들의 태도도 풀어졌다. 더 많은 학생이 온갖 핑계를 대며 수업에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숙제를 해오지 않아 수업 시작 전에 다른 학생의 숙제를 베끼는 학생들도 늘어갔다. 하지만 그래도 수업에 오거나, 숙제를 베끼기라도 하면서 수업 진도에 맞추려는 학생들은 말 그대로 양반이었다. 왜냐하면, 몇몇은 수업에 늦으면서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가방과 겉옷을 소란스럽게 늘어놓으며 자리에 앉거나, 무례한 수업 태도로 다른 학생들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하나가 미국에서 온 존이었다. 항상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학원에 오는 존은 첫인상부터 굉장히 강렬했다. 그는 솔직한 성격에 웃음이 많은 터라 그가 수업에 참여한 날에는 교실은 늘 시끌벅적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있던 존은 쉬는 시간이면 아이 사진을 여기저기 보여주며 자랑을 하였고 그럴 때면 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날이면 쑥스러워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그런 존을 볼 때면 다른 학생들도 행복한 미소로 격려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성격은 이내 수업이 익숙해지자 자유분방함으로 바뀌었고, 수업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존은 수업 태도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수업 시간에 늦어 모든 학생의 눈길을 받으며 교실에 들어올 때나 숙제를 해오지 않았을 때도 그는 늘 당당했다. 선생님이 자리로 돌아와 수업을 시작하려 할 때도 그는 때때로 책상에 걸친 다리를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여느 날과 같이 숙제 검사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숙제를 해온 학생들은 발표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열성적으로 그 시간에 임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일찍 오기는 했지만, 숙제를 하나도 안 해온 존은 옆자리 학생에게 괜히 장난을 걸기도 하고 딴짓을 하면서 주위를 산만하게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봐온 존의 성격을 미루어보아 그가 굉장히 무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존의 방해로 점점 숙제 검사 시간이 소란스러워지자 참다못한 선생님은 존을 향해 가시 돋친 말들을 뱉어냈다.


"존, 숙제해오지 않으면 여기 앉아 있는 것은 시간 낭비야"

"숙제를 해올 시간이 없었다고요. 그렇다고 일찍   잘못은 아니잖아요"

"숙제를  해온 것은 그렇다고 .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 방해를 하면  되지!"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있는데 내가  했다고 그래요?"


서툰 독일어로 선생님의 야단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존의 뻔뻔한 얼굴을 선생님은 놀란 듯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 듯 존을 외면하며 수업을 이어갔다.

 

"그럼 다른 학생들 이야기가 잘 안 들리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


존을 제외한 학생들은 선생님이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존만은 자신의 말을 선생님이 반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주위를 의기양양하게 둘러보았다. 비록 수업 분위기는 두 사람의 논쟁으로 가라앉았지만 갈등 자체는 짧고 조용하게 끝을 맺는 듯했다. 하지만 숙제 검사가 끝나고 학생들이 조별 과제를 하러 모여 앉았을 무렵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졌다. 그 이유는 존의 앉아있는 자세 때문이었다. 그는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기대고는 두 팔을 올려 머리 뒤로 기댔다. 게다가 한쪽 다리는 책상 위를 가로질러 놓고는 다른 다리를 그 위에 걸쳤다. 말 그대로 사장님 자세를 하고 앉아있었다. 선생님은 존에게 자세를 바로 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존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수업과 관련이 없는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존을 보고 있자면, 그는 마치 선생님과 기싸움을 하려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같았다. 나를 포함해 수업에 집중하고 있던 학생들은 도저히 존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교실 앞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선생님이 폭발한 것이다. 그녀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존에게 소리를 지르며 책상 위 모든 것들을 바닥으로 엎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책상 위에 정갈하게 놓여있던 종이 뭉텅이와 안경, 안경집과 텀블러 그리고 핸드크림 따위가 마치 느린 동작 효과를 건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교실의 모든 학생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고 있던 찰나 선생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 보폭으로 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존의 가슴팍을 잡아당기며 소리 질렀다.


"난 도저히 너 같은 학생과 수업할 수 없어. 당장 나가!!!"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존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란 토끼 눈의 학생들에게 자신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가와 자신을 교실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자 그는 매우 당황한 듯 보였다. 상황을 파악하려던 그의 놀란 얼굴은 이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갔다. 거친 선생님의 손길을 뿌리치는 그에 얼굴에는 ‘이렇게까지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하는 표정이 잠시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는 그 또한 영어로 선생님을 향해 거친 말들을 쏟아냈다.


"이거 놔요.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나가! 나가라고!"


선생님의 손을 뿌리친 존은 앉아있던 의자와 책상을 걷어차고는 자신의 가방을 낚아채듯 들쳐 메고 교실을 나갔다. 존이 나가며 '쾅'하고 걷어찬 문이 울림을 멈추자,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선생님의 숨소리 만이 교실을 채웠다. 충격에 빠진 학생들의 적막을 가르고 다시 자리에 앉아 텅 빈 책상 위를 잠시 쳐다보던 선생님은 지친 듯 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몰아쉬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오늘은 쉬는 시간을 일찍 가져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는 교실을 떠났다. 소란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교실을 떠나자 학생들은 황당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여학생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우크라이나에서 온 스베르티나가 웅성거리는 소음을 뚫고 교실 앞으로 걸어왔다. 나머지 학생들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춘기 남자아이를 키우는 스베르티나는 마치 아들의 책상을 치우듯 덤덤한 얼굴로 교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선생님의 소지품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학생들도 앞으로 나가서 스베르니타를 도와주었다.    


그날은 어학원에 등원하기 시작한 이후로 수업이 가장 일찍 끝났던 날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자던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았고, 카운터의 독일인 아주머니가 대신해 전달사항을 알려주었다. 다음날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수업 십오 분 전 학원에 도착한 선생님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녀는 침착해 보였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전날 불같이 화를 내던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생님과 우리는 수업 전에 잠시 전날의 일을 갈무리해 보았다. 선생님은 학생 모두에게 자신이 감정을 폭력적으로 분출한 것에 대해 사과했고, 존과 이후에 이야기해서 잘 마무리되었다고 짤막히 설명했다. 그러자 우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학생인 요셉이 나서, 혈기왕성한 나이이니 그럴 수 있지만, 선생님과 함께 수업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베르니타는 그래도 여태껏 선생님이 많이 인내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존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선생님은 쓴 미소를 지으며 핸드크림을 꺼내 손에 바르기 시작했다.


존이 다시 학원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존은 다른 일이 생겨 학원을 더는 못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평소 존과 친하게 지내던 남학생들은 그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평소 존과 친분이 없던 나는 그에게 미소만 조심히 지어 보였다. 후련한 듯 밝은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는 존의 얼굴은 어딘가 씁쓸해 보였고 존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얼굴도 어딘가 슬퍼 보였다.




 사실 이것은 비스바덴의 어학원에서 초급 독일어를 삼 개월간 배우면서 겪은 유일한 사건은 아니었다. 역사를 주제로 독일어로 토론을 하다 감정이 격해진 학생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적도 있었고, 스포츠 이야기를 하다 말싸움이 번진 적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워낙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있게 되다 보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자고 나란 나라가 다른 학생들은 각기 다른 문화를 접하고 자랐으며 그에 따른 편견과 습관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온 개인의 역사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제 독일에서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독일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소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각의 다름과 그로 인한 갈등은 다양한 문화가 서로 교류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게다가 한 나라의 언어에는 그 언어가 쓰이는 나라의 문화와 예절이 녹아있기에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독일 문화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수업 중 생소한 독일의 예절에 관해 토론할 때면 학생들은 서툰 독일어지만 서로 열을 내며 논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급 독일어를 배우던 그 시절은 나에게 독일에서 보내온 시간 중 가장 그리운 시절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에서였는지 서로 정이 넘쳤다. 삼 개월 동안 우리는 아는 것은 공유하고 모르는 것은 함께 고민했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반에서 독일어를 상대적으로 잘하는 친구들은 습득력이 늦은 친구들을 도와주었다. 종종 간식거리를 가져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친구들도 많았다. 아이가 있는 학생들은 서로 아이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보면서 자기 자식처럼 예뻐했다. 아빠같이 모든 학생을 챙기던 요셉은 수업의 마지막 날 같은 반 학생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챙겨 왔다. 시험이 끝나고는 베트남에서 온 빅의 초대를 받아 직접 만든 쌀국수를 대접받기도 했다. 일본인 친구 나미코와는 수업이 끝나면 종종 함께 시내에서 맥주를 마시며 고민 상담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반 학생들은 서로의 문화와 국적의 차이를 잊고 마치 한마을의 이웃들을 대하듯 열린 마음으로 변해갔다. 그래서인지 독일에서 이방인의 처지가 새삼 서럽게 느껴지는 날에는 모두가 이방인이어서 평등했던 그 교실에서의 시간이 그리워진다.




 소란스러웠던 3개월이 지나고 존을 제외한 열아홉 명의 학생들은 독일어 시험을 치렀고 시험을 마지막으로 삼 개월간의 독일어 초급 수업은 모두 종료되었다. 이주 후 다시 학원을 찾아 받은 나의 자격증에는 B1이라는 성적이 적혀있었다. 드디어 독일어의 초급 수준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자격증을 찾으러 온 다른 학생들에게 듣기로는 시험에 떨어진 학생은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험에 합격해서 자격증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 후로 약 일 년 후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비스바덴 시내에서 같은 반 학생이었던 마티아스를 마주쳤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그는 자신은 시험을 본 이후에 근교에서 직업교육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직은 독일어가 어렵지만 그래도 또래 친구들이 많아서 교육받는 게 재밌다며 말하던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에게 듣기로 나타샤는 독일어 B2 수업을 수료한 후 자신의 나라에서 하던 치위생사 일을 이어간다고 했다. 시리아에서 정치 외교를 전공했던 바질은 비자를 획득한 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피난민들을 돕는 단체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각자 갈 길을 갔다. 세계 각국에서 와서 독일 비스바덴에서 함께 삼 개월간 독일어 공부를 했던 우리는 그렇게 다시 자신들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지금도 독일 어디선가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독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길보다 조금은 거칠 것이다. 나의 앞에 놓여있는 길과 닮아있을 길을 지금도 걷고 있을 옛 어학원 친구들의 안녕을 빌어본다.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이전 02화 B - Beweisen (증명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