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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Dec 21. 2020

E - Erfahrung (경험)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불쾌한 경험

EP. 05

E - Erfahrung (경험)


 2015 새해, 쾰른 중앙역 근처에서 새해를 맞아 폭죽을 터트리려는 인파들 사이에서 집단 성추행이 일어났다.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난민 출신의 다수의 남자들이 집단으로 현장에 있던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성폭력, 성추행 그리고 강도행위를 범했다고 한다. 당시  사건과 관련해  1,200건의 범죄 신고가 접수되었다. 기사가 보도됨과 동시에 소셜 미디어에서는 현장에서 촬영된 동영상이 나돌았는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폭죽 소리 그리고 현장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들의 비명이 영상에 생생하게 담겨있었. 몇몇 영상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이 여성들을 둘러싸거나 끌고 가는  눈뜨고는   없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담겨있었다.  때문에 보통과 같았으면 새해(Silvester) 맞아 활기찬 분위기였을 독일의 여론은 새해부터 떠들썩해졌다. 유럽 난민 사태가 발발한  얼마  되었을 무렵이었고, 독일 국민 여론은 아직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으로 들끓고 있었다. 독일의 공영 방송에서부터 타블로이드지들까지 많은 언론들이 모두  사건에 대해 앞다퉈 보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쾰뿐만 아니라 함부르크, 빌레펠트,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독일 여러 도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추행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심각하게 비쳤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15 새해 독일 전역에서  881건의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당시 경찰의 늦장 대응으로 독일  치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생겨났고 그로부터  달간은 페퍼 스프레이를 비롯한 호신용품이 가게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래도 나는 당장 호신용품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정도로 일상생활을 하는데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새해의 소란은 계절이 변하면서 점차 잊혀갔기 때문이다. 치안을 걱정하던 독일 언론의 분위기도 여름이 다가오면서는 ‘올여름 인기 휴양지  10’, ‘자외선을 차단해야 하는 이유  가지등의 기사로 그들의 지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독일의 여름은 시원하다. 물론 기온이 35도를 훌쩍 넘는 날들도 있다. 하지만 습도가 한국처럼 높지 않아,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에도 바람만 불면 살결이 금세 뽀송뽀송해진다. 2015 독일의 여름 그날도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 좋은 날씨였다. 그날은 독일어 B2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는 날이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기에 얇은 원피스에 독일어 교재와 연습장으로 가득  배낭을 메고 비스바덴 중앙역 안으로 들어섰다. 비스바덴 중앙역은 분주했던 오전 시간을 지나 조금 한산해져 있었다. 역사에는 기차를 기다리며 신문을 보고 있는 노인들과 유모차를 끌고 있는 여자들 그리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과 대부분 시간을 하릴없이 역사에서 보내는 듯한 청년들이  있을 뿐이었다. 잠시 간을 확인하 역사 안의 작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인파가 적은 시간임에도 앞으로는  명의 사람들이 줄을  있었다. 카페 안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잠시   차례가 돌아왔고 듣고 있던 오디오 파일을 멈추고 주문을 하기 위해 계산대로 다가갔다.


한여름의 평화는 그렇게 깨졌다. 독일어로 주문하는  집중하고 있던  순간 뒤에서 불쑥 엉덩이 쪽으로 손길이 느껴진 것이다.  손은 침착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이건 남자 친구가 아니고는   없는 행동이었다. 당시 인턴십과 학교를 병행하던 남자 친구가 중앙역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순간 바람과는 다르게 어두운 피부색과 머리카락을 갖은 낯선 남자가  있었다.


"Oh, Entschuldigen Sie. (오, 미안합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서툰 독일어 발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놀랍지도 미안하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라서 벙쪄있는 나를 두고 태연하게 카페를 나갔다. 잠시 우리를 쳐다보던 가게 안의 사람들도 그가 나가자 이내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같이 느껴졌다. 불쾌감이 몰려오고 화가 났지만 정작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뻔뻔한 표정이 어딘지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지만 잠시 멈춰 서서 그가 향한 곳을 쏘아보고는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마냥 도망치듯 가게를 나갔다.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했다. 가게를 나서자 기차 안의 보안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다가가 도움을 요청할까 했지만, 망설여졌다. 아직은 서툰 독일어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막막했고 게다가 만약 알아들었다 해도 그들이 나를 도와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일같이 오는 역사인데, 신고했을 경우  남자가 보복하지는 않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다.   없는 것들이 생각날수록 몸이 굳어져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단념을 하고는 쫓기는 사람처럼 승차장으로 뛰어갔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만 안전한 기분이   같았다. 기차에 타자마자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독일 역사의 인터넷이 얼마나 느린지를 새삼 깨닫고는 단념해야만 했다. ‘망할, 독일 인터넷!’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겁에 질려 치한에게 하지 못한 욕을 독일 인터넷 업계에 종사하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것이었다.


 결국 기차 구석에 앉아 손톱을 뜯으며 기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내다본 창밖에서  남자를 다시 보았다. 그는 선로 두어 개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기차가 플랫폼을 떠나 역사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그는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이 떨렸다. 학원에 도착해서야 남자 친구에게 연락을   있었다. 그날 독일어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원이 끝나고 내가  기차가 비스바덴 중앙역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남자 친구가 플랫폼에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일에 살면서 여태까지  번도 주변의 여자 지인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역사를 나서며 남자 친구는 퇴근하면서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페퍼 스프레이를 건넸다. 가게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페퍼 스프레이 겨우 샀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스프레이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후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만하임(Mannheim) 괴테 어학원 근처를 걷고 있었다. 독일어 B2 언어 증명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전에는 필기시험이 치러졌고, 오후에는 말하기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시내 외곽에 위치한 어학원 주변에는 흔한 카페나 빵집 하나 없었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략 이십  정도를 걸어야 했다. 도시는 점심시간을 조금 지나 한창 바쁠 시간이었기에 거리 위와 차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인터넷에서 확인했을 때에는 슈퍼마켓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같았는데, 막상 낯선 도시에서 혼자 길을 찾아가려니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말하기 시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을 나타내듯, 나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이따금 시간을 확인하려 시계를 보는  외에는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휘익-!"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누군가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생각한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발걸음을 뗀 지 얼마 안 되어 같은 방향에서 휘파람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저번보다 조금 더 크고, 긴소리였다.


"휘이이익-!!"


휘파람 소리가 4차선 도로를 지나 나의 신경을 거스르자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쳐다보았. 소리의 출처는  건너편의 공사장이었다. 4층짜리의 건물을 올려다보니 건물 주위에는 임시 건설 현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꼭대기 위에 인부들이 모여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을 올려다보니 휘파람 소리는 신이    커졌다. 그중 몇몇은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차도를 건너 들려오는 그들의 말을 정확히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몇몇 들려오는 독일어 단어들은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멀리 있는 인부들이 나의 불쾌한 기분을 느낄  있기를 바라며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고는 다시 길을 걸었다. 집에서 챙겨  가방  스프레이도 해결해   없는 일이었다.




 후로도 얼마간은 혼자서  곳을 방문할   가방이나 주머니에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녔지만, 어느샌가부터는 서랍  깊은 곳에서 잠자게 되었다. 하지만 문득 서랍  스프레이를  때마다 2015   겪었던 일상의 불쾌하고 끔찍한 경험이 떠오른다. 2015 쾰른 대성당을 비롯해 같은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성추행 사건에서  1,200 명의 여성들이 피해를 보았지만 그중 120 정도만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검거되어 처벌받게  범인들이 소수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것이 아마도 호신용품이 동이 나도록 팔리게  이유일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는 여성뿐만 아니라 몇몇 남성들에게도 폭력, 강도 등의 행위가 자행되었지만 대다수 피해자는 여전히 여성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난민을 수용한 오스트리아, 스위스, 핀란드 등에서도 난민들에 의한 집단 성폭력, 성추행 사건들이 일어난 것이다. 이점에서 나는 가해자 대다수가 ‘난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민으로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해야 하는 것은 분명 엄청난 시련을 의미한다. 낯선 언어, 사람들 그리고 문화 사이에서 개인은 ‘난민이라는 낙인을 딛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이 새로 속한 사회에서 쌓인 분노를 풀려고 폭력 행위를 공모하고 자행할  표적이  것은 약자였다. 그들의 분노는 결국 자신들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여성으로 향한 것이다. 난민과  난민들을 받아준 정부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지속되는 동안 소수의 사람들만이 처벌받았다. 그리고 다수의 피해자들은 그저 호신용품을 사거나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는 것밖에   없었다.


자유론의 창시자로 꼽히는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덜 알려진 것은 <자유론>이 그의 부인 해리엇 테일러 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 둘은 함께 집필한 <여성의 종속>에서는 노예제와 비롯한 역사의 악습들이 사회 공통의 미덕, 정의의 가치와 인간성의 부상으로 다수 폐지되었지만 여성 차별의 악습의 흔적은 아직도 우리의 삶에 많이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Das Einzige, was man vielleicht zu ihren Gunsten anführen könnte, müsste sich darauf gründen, dass sie sich bis auf den heutigen Tag erhalten hat, während so viele andere Sitten, die ihren Ursprung in delselben trüben Quelle haben, abgeschafft sind. Dieser Umstand führt dazu, dass die Behauptung, die Ungleichheit der Rechte zwischen Mann und Frau habe keine andere Quelle als das Recht des Stärkeren, für die meisten Ohren seltsam klingt. (그것에 대해 아마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뿌리를 갖은 많은 악습들이 사라진 동안에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리에 대한 불평등이 강자의 권리 이외에는 없다는 주장을 대다수에게 이상하게 들리게 만듭니다.)”


지금으로부터 152 전에 쓰인 책의 글귀가 여전히 현재형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렇게 느끼는 사람은 단연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만약 지금은 과거가  2015 쾰른 대성당  광장에 여성 대신 건장한 남성들만이 있었다면, 그해 새해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지나가지는 않았을까? 카페 안에서 줄을  있던 사람이, 공사장 밑을 지나가던 사람이 젊은 여성인 내가 아니었다면?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뒤로한   세상 모든 호신용품이 평화롭게 서랍 속에서 영원히 잠들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서랍을 닫는다.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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