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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Nov 30. 2020

B - Beweisen (증명하다)

비스바덴에서 시작한 독일어 공부의 시작

EP. 02

B - Beweisen (증명하다)



 열 시간의 비행 후 도착한 독일은 마치 어제 다녀간 것처럼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거리 모습이 계절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하는 한국에서 열 시간을 날아오면 이런 세상에 도착하는 것이다. 다만 이 년 전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봄이 다가오는 늦겨울이었지만 지금은 겨울이 무르익어가는 초겨울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독일 사람들은 이르면 석 달, 늦으면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 준비를 시작한다. 다시 돌아온 비스바덴(Wiesbaden) 시내에 형형색색의 화려한 조명들이 거리 장식되어 있었다. 번화가를 벗어난 주택가에도 집들마다 창가와 지붕에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꾸며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조명을 발코니에 설치해 놓은 집들이 있는가 하면 굴뚝을 오르는 산타 인형을 걸어놓은 집들도 있었다. 주말에 시내에 나가면, 밀린 숙제를 하듯 가족과 지인들의 선물을 사느라 분주한 중년의 부인들과 렙쿠흔(Lebkuchen)을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하고 있는 빵집의 종업원을 볼 수 있었다. 12월에 접어들면서는 시청 앞 광장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마켓 입구에는 회전목마와 관람차가 설치되고 그 앞으로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꼬마 손님들이 꿈꾸는 표정을 지으며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분주한 도시에도 익숙했던 빵집과 자주 가던 골목의 백 년 넘은 케이크 가게는 그대로였다. 자주 가던 미술도구점, 여웃돈이 생기면 친구들과 함께 가던 커리부어스트 가게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 아래 도시의 알맹이들은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다. 내가 독일에 도착한 2014년은 또한 유럽 난민사태가 시작된 해였다. 한국에서는 난민 사태가 2015년에 되어서야 언론을 통해 주로 다루어졌지만, 그무렵 독일 현지에서는 이미 난민의 유입으로 변화된 사회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독일은 서유럽 국가 중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한 나라들 중 하나였고 내가 지내게 된 비스바덴에도 많은 난민이 보금자리를 찾아 밀려 들어온 뒤였다. 처음에는 비자 신청을 위해 외국인청에 갈 때 특히 복도에 줄을 지어 서 있는 난민들을 보며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시간이 흐르면서는 주로 시내 광장이나 벤치 주변 혹은 골목길에서도 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우연히 시선이 닿게 될 때면, 청년들은 호기심과 경계심을 품은 눈빛으로 돌아봤고 중장년들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어린 자식들을 내려보았다. 빛나는 검은색 눈을 갖은 어린이들은 낯선 얼굴의 행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때로는 눈을 제외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가린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모습과 태도는 다양했지만, 그들은 공통으로 독일이 낯선듯해 보였고, 독일도 그들을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난 독일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의 화려한 불빛이 없는 곳에서는 예전보다 조금은 더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겨울 분위기를 만끽하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어학원에 등록하고 비자 신청을 마쳐야 했다. 거리와 가격이 적당한 어학원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방문해 간단한 독일어 테스트를 보고는 어학원 3개월 치의 시험비를 지급했다. 그렇게 수업에 등록한 후 며칠 후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요청하기 위해 어학원의 카운터를 찾았을 때였다. 카운터에서 근무하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는 건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꿈에서 깬 사람처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준비해 간 문장들을 블록 쌓기 하듯 꺼내며 그녀에게 필요한 서류를 설명했다. 작년 독일에서 반년 한 귀동냥과 한국에서 세 달여간 배운 독일어 실력은 긴장만 하면 늘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알고 있던 단어들조차 필요할 때면 늘 미꾸라지처럼 머릿속에서 빠져나갔다. 두서없는 독일어를 곰곰이 듣던 아주머니는 이내 내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빠른 독일어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서는 서류들을 준비하기 위해 혼잣말을 하며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어딘가 조금 허둥지둥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나 같은 경우가 흔치 않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 같은 반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스무 명의 사람 중 모든 금액을 내야 하는 것은 나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를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 출신은 일본과 태국인 둘이었는데, 둘 다 독일인 배우자를 두고 있었다. 그 이외에는 모두 다른 국가에서 온 난민이었다. 





총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반 학생들의 출신은 아주 다양했다. 기억이 나는 것만 해도 미국,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네덜란드, 시리아, 파키스탄, 세르비아, 터키, 일본, 태국 그리고 한국 등 열네 국가에 달한다. 출신 국가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연령 폭도 다양했다. 그중에는 쉰이 다된 중년에 들어서는 학생들도 있었고, 아직 고등학교도 마치지 않고 온 나이가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아이를 갖은 사람이 다섯이었고 아직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게 한창 좋을 나이인 고등학생들이 두 명 있었다. 그렇게 마치 세계의 축소판 같은 비스바덴의 한 어학원에서 독일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독일어로만 진행되던 수업 시간이 종료되고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은 마치 과거 지중해의 한 상업 도시를 연상케 했다. 한쪽에서는 이탈리아어로 친구와 통화를 했고, 서로 언어가 통하는 아랍권 국가에서 온 학생들은 모여서 수다를 떨곤 했다. 교실 뒤편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온 나이 어린 학생이 이어폰을 끼고 자기네 나라의 음악을 들었다. 장난기가 많은 시리아에서 온 남학생은 나의 옆자리에 앉을 때면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적어 달라고 부탁했고, 나에게 아랍어를 알려주려고 열을 내기도 했었다. 독일어가 사라진 삼십 분 동안 다양한 언어들이 교실을 채웠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연령대의 학생들이 섞여 있는 반이어서인지 학생들의 수업 태도도 가지각색이었다. 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은 주로 선생님이 자리로 돌아오면 바로 하던 일을 멈추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장 숙제를 성실히 해오면서도 질문은 가장 적게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들이었다. 러시아나 아랍권에서 온 학생들은 숙제를 성실히 해오거나 수업에 집중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독일어 선생이 지도에는 그래도 수긍하는 기미를 보였다. 한편 독일어와 비슷한 언어를 가진 네덜란드 학생은 대체로 성실하지 않은 수업 태도에 비해 말하기 시간에는 늘 가장 여유롭게 발표를 하기도 했다. 물론 출신 국가만이 수업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연령대에 따라서도 달랐다. 주로 나이 많은 학생들은 어린 학생들에 비해 이해도가 늦었지만 늘 성실하게 숙제를 해왔고, 그만큼 질문도 많이 했다. 그에 반면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수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습득력이 빨랐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우리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그건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모였다는 것이었다. 태도의 차이는 있어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거나 수업이 시작되면 대다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쉬는 시간에는 서로 어려운 것을 알려주었다.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서로 나이에 상관없이 두츤(dutzen, 독일어로 서로 너, 나 하며 편하게 이야기하는 방식. 공손하게 이야기할 때는 sitzen을 쓴다.)을 했다. 그룹을 이루어 과제를 수행할 때는 50대의 시리아 아저씨와 20대 초반의 태국 아가씨가 조를 짜기도 했고, 애가 둘이 있는 40대 후반의 우크라이나 아줌마와 30대 초반의 시리아 아저씨가 같은 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두츤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모두에게 독일어 수업이 익숙해지자 수업에는 점차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교실은 점차 번성한 중세 상업 도시보다는, 마치 신이 노해 사람들의 언어를 각기 다르게 만들어 버려 무너지는 바벨탑을 더 연상케 했다. 매번 더 많은 학생이 지각을 하기 시작했고 점차 소수의 학생만 주어진 숙제를 해왔다. 그 이유로는 '집안일을 하느라', '아이를 학교에 보내느라' 혹은 '외국인청에 다녀오느라' 등 다양했다. 수업 시간이 길어지거나 숙제가 많은 날에는 몇몇 학생들이 독일어 선생에게 대놓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한편 독일어를 빨리 배워야 한다는 조급함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온 후 나의 마음속에서 유독 크게 자라났다. 쫓기는 듯한 마음은 한국에서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에 대한 생각과, 무작정 독일로 떠나겠다는 말했을 때 나에게 돌아온 지인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 하지 마"라는 대답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일 같이 자라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3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시험이 다가올수록 나의 조급함은 예민함으로 변해갔다. 늘 재미있게만 느껴졌던 친구들이 잡담이 거슬리기 시작했고,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수업을 빨리 끝내 달라는 학생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생들 분위기가 유독 산만해 수업이 엉망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 날에는 혼자 수업료를 모두 내고 듣는 나의 처지가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염증처럼 자라나는 조급함에 매일이 괴로웠지만, 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너무나 느긋하고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의 장식이 부활절 장식으로 바뀌는 계절에 어학원이 떠들썩해진 일이 일어났다.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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