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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Jan 11. 2021

H - Heimat (고향)

공항에서 마주친 생각들

EP. 08

H - Heimat (고향)



 DSH 시험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드디어 독일어 어학의 모든 단계를 끝낼  있었다. 그리고 합격증을 받고 얼마  있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떠나온     만의 한국행이었다. 출국장 앞에서 남자 친구와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는 홀로 게이트로 걸어갔다.    초록 눈의 남자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공항에 자주 오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매번 공항의 구석을 찾아다니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훔치거나, 이별에 찢어지는 듯한 마음을 추스르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을   있었기에, 이번에는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웃으면서  우리의 작별 인사는 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게이트 앞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내가  예정이었던 비행기 연착이 된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옴짝달싹할  없이 혼자  시간을 기다리게  것이다.   없이 항공사 카운터에서 받아  7유로짜리 교환권을 들고 맥주 한잔을 사서는 활주로가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하늘은 파랬고, 독일의 귀한 햇빛 아래서 활주로의 비행기들은 황금색으로 빛났다. 지난  년간 독일에서 어학 수업을 받으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작이 공항이었기에 이곳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기에 너무나 알맞게 느껴졌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남자 친구와 함께 있고, 한국에서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니  공항에서의  시간은 정말 오롯이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떠나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만날  없는 곳이니까.


공항 곳곳에는 비행시간에 늦어 게이트를 향해 뛰는 사람들, 일찍 도착해서 비행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나처럼 갑자기 시간이 생겨 머물게 된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시간을 흐른다고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는 시간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간다.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조차,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고 만다.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저서 '팡세'(원작은 프랑스어이며 독일어로는 'Gedanken'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로도 잘 알려진 블레즈 파스칼은 시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 wir sind so unklug, daß wir in Zeiten umherirren, die nicht die unsrigen sind, und nicht an die einzige denken, die uns gehört, (...)" (Blaise Pascal, Gedanken (Leipzig: Reclam Verlag, 1987, S. 21))


"우리는 이렇듯 신중하지 못해서 우리의 시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 헤매고, 우리에게 속한 시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 헛되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여,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놓치고 있다." (블레즈 파스칼,  팡세 (을유 세계문학전집, 현미애 역, 2015))


팡세는 출간된 지 삼백 년이 넘었지만 현재의 사람들은 여전히 파스칼이 살았던 시절의 사람들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이다. 흘러간 1 하고도 2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마치 흐르는 강물에 손을 넣고 주먹을 쥐듯이 말이다. 한국에 있으면서 독일을 그리워한 만큼, 독일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한국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워하는 삶을 사는 동안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독일에서 아니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에도  번씩 끊임없이 쌓이는 설거거리와 한밤  내리듯 욕실에 소복이 쌓이는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으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모든 순간에서 엄마의 땀을, 정성을 그리고 사랑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함께 살면서는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독일에서 마주치게  것이다. 우리 아빠, 아빠는 어떠한가. 늦은 밤까지 공부하느라 깨어있는 날이면, 아빠는 항상 간식거리를 방안으로 밀어 넣어 주시곤 했다.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의 내가 불편하지 않게, 아빠는  한마디 덧붙이곤 하셨다. "먹어보니 맛있더라.  입만 먹어보고 먹기 싫으면 밖에 내놔."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밖에 내놓으면 아빠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셨다. 독일로 공부를 하겠다고 떠나는 나에게 오빠는 부모님 곁은 자기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게만 지내라고 했다. 안심하고 떠나라며 나의 어깨를 두들겨 주던 오빠의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마음이 아팠다.


한국과 독일을 왕래하는 동안, 나의 철없는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독일에서 뒤늦게 철이 든 나는,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익숙하던 모든 것들의 고마움을 늦게 알아버렸고 그래서 가끔은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무한한 사랑의 깊이와 그 안의 그 복잡하고 어려운 마음을 잘 알지 못했던 내가 지나간 시간 속에 무엇을 놓치지는 않았나 하는 두려움과 함께.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주문한 맥주가 바닥을 드러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전광판에는 내가  비행기의 새로운 게이트와 탑승 시간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독일을 떠날 시간이 왔다. 앞으로 다시 한국에 영영 돌아가지 않는 이상 나는 항상 그리워하는 삶을 살게  것이다. 그리워하는 삶은 구구절절하다. 조금  슬프고 어떨  조금 많이 외롭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리워하는 삶은, 그래도 내가 살아가는  점의 이유를  덧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빛나게  준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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