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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Jan 18. 2021

I - Identität (정체성)

나의 이름은

 

EP. 09

I - Identität (정체성)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한국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도착 시간  시간도 전에 공항에 나와 있으셨다고 했다. 입국장에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나의 얼굴을 찾고 계셨다며, 아빠는 말을 하며 반갑게 웃으셨다. 차를 타고 공항을 벗어나니 시야에는  바다가 나타났다. 2 초의 한국은 여전히 추웠지만, 오랜만에 보는 파란색 하늘과  아래에서 비단같이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니 가슴이  트이는 듯하였다. 얼마만의 바다인가! 삼면이 바다인 한국과 반대로 독일은 삼면이 육지이다. 독일에서 내가 지내는 곳에서 바다를 보려면 독일보다는 차라리 네덜란드로 가는 것이 . 휴가는커녕 독일어 시험에 파묻혀 보낸 지난  년간 바다를  기회는 당연히 없었다. 잠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생각에 빠졌다. 처음 가본 갯벌과 오후 해안가 수산물시장의 비린내와 좌판에 진열되어 있던 건어물들. 가족여행으로 떠났던 설악산에서 내려다본 아득한 동해의 수평선. 수능시험을 치르고 친구와 떠났던 정동진 바닷가, 추위에 떨며 나눠 먹었던 라면과 털어놓았던 고민들. 한국에 남겨두고  나의 지난 추억들이 수면 위에 반짝이는 빛을 따라 빠르게 지나갔다.   


한국에서 나의 하루는 조금 특별했다. 점심이 조금   시간 느지막이 일어나면, 발치에는 우리  강아지가 나를 기다리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일을 보러 집을 떠난 후라 집안은 고요했다. 티브이를 틀어 집안을 조금 소란스럽게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침  점심을 먹고는  강아지와 동네를  바퀴 산책했다. 독일에 반려견을 하루에 적어도  번은 산책시켜야 하는 법이 있다. 내가 한국을 떠난 2014년에는 아직 동물의 기본권에 대한 대중의 상식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는데, 마침 내가 한국을 떠난 해에 가족이 반려동물로 작은 시츄  마리를 들였었다. 봄에  식구가 되어서 이름은 ''이다. 나는 독일에서 공원과 식당 그리고 버스나 지하철에 매일 마주치는 독일의 개들을 보며 한국에 있는 봄이를 생각했다. 한국의 가족들은 모두 일을 하는 터에 봄이는 매일 반나절을 꼬박 혼자 집에 있어야 했다. 외로웠을 봄이를 생각하며 나는 가족들이 바쁜 시간에  봄이를 데리고 바깥 구경을 시켜주었다.


봄이  집을 나설 때는  대략  시가 조금 안되었을 무렵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도보로   거리에 작은 강이 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산책코스였다. 우리의 산책코스 안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가 모여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면 학생들이 급식을 먹고 모두 교실에 있을 시간이어서 늘 한산했다. 식후 나른함에 내려오는 눈꺼풀과 씨름을 할 학생들을 떠올리면 나의 학창 시절이 겹쳐 보였다. 고요한 길가에는 나처럼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아주머니 몇몇과 놀이터에 이제  걷기 시작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선생님이 보였다.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면, 건너편에서는 의문의 눈길이 대답으로 돌아오곤 했다. ' 시간에  하는 거지?' 사람들의 눈은 나에게 그렇게 묻는 듯했다. 이십  중반, 학생과 직장인   하나가 아니면 사람들은 물음표를 던진다. 취준생인가 아니면 고시생인가? 그냥 백수인가 아니면 어디가 아픈가? 보통은 모른  지나쳤지만, 자기 회의와 자격지심이 더해지는 날이면 그런 물음은 괜스레 버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온종일 동네를 유유자적 돌아다니기만  것은 아니었다. 산책  봄이의 발을 씻기고는 항상 가방에 토익 문제집을 들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어느   방에 들어온 엄마는 책상  문제집을 발견하고는, 독일에서 공부한다는 애가  토익을 보냐고 물었었다.    봄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다시 독일로 떠난다. 독일의 대학교 지원 시기는 대게 6월에 마감이 된다. 그리고 지원을 위해서는 독일 우니 아시스트(Uni-assist) 등록을 해야 한다. 당시는 아직도 대부분의 독일의 행정업무는 우편으로 이루어졌고, 나는 서둘러 영어 점수를 마련해야 했다(우니 아시스트는 독일 대학의 지원 업무를 대행해주는 공인 시스템으로 수능 성적표와 학생기록부 그리고 어학증명서 등의 입학 신청 서류들을 업로드하면, 학교마다 개별적으로 서류를 보내지 않고도 여러 학교에 지원서 접수를   있다). 한국에 오기  독일에서 지원을 위한 어학 자격증을   있었지만, 하필 지원하려고 하는  학교에서 영어 점수를 요구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선배를 따라  개월간 학원까지 다니며 토익 공부를 했지만, 그것도 벌써 4  일이었다. 그렇게 어쩔  없이 잠시 다시 귀국한 한국에서   내내 토익 공부를 하게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평일의 시간을 때울 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한국의 친구들은 모두 평일 낮에는 일을 했기에 나를 만나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휴학에 교환학생까지 하느라 동기들보다 2년이나 졸업을 늦게 했는데,  이후로도 벌써 다시 2년이 흘렀다. 내가 독일에서 기초부터 독일어 공부를 하는 동안, 대학교 친구들뿐만 아니라 동네 친구들도 모두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약속은 저녁 시간에만 잡을  있었고, 직장이  친구들은 심지어 평일 약속은 엄두도  냈다. 친구들을 만나면 짧게 안부를 주고받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친구들의 직장 이야기로 채워졌다.  친구들이 다니는 회사와 하는 일은 서로 달라도 모두들 사회초년생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그동안 애쓰며 지냈던 시간의 그늘이 보이는 듯했다. 이래서 누가 마음에  들고, 저래서 일이 힘들다는 이야기 사이에 정적이 흐를 때면, 나는 분위기를 띄울 생각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은 처음에는 재미있게 듣다가도, 이야기가 길어지면 멍한 표정을 짓곤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던 나의 표정이 친구에게 옮겨간  말이다.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동안 서로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고,  일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내가 친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듯 친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랜만에 함께 보낸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다 보니, 한잔에 추억이  다른 한잔에는 그리운 얼굴을 다시 보는 기쁨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내 그래도 술은 일하는 사람이 사야 한다고 나를 옆으로 제쳐놓을 때면, 씁쓸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막차 시간이 다되도록 마시던 시절과는 다르게 우리는 아직 달이 휘영청한 시간임에도 일치감치 자리를 파했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고 버스 정류장을 지나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위장에 이유모를 허기가 몰려왔다.



 

 출국 일주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선 내가 향한 곳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중학교였다.  동네에서 학창 시절을 모두 보낸 동네에 아직도 부모님이 사시는 터라, 시험장은 예전에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의 한 중학교였다.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회색 빛깔의 복도를 지나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 앞에서 수험 번호와 교실이 적힌 명단을 훑어보고는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학교 건물 중앙의 계단을 올라섰다. 시험 시간보다  시간 일찍 도착한 터라 복도는  비어있었다. 덜그럭 하며 열리는 낡은 나무문 소리는 작은 메아리를 만들었다. 난방을 방금  , 교실에는 아직 냉기가 흘렀고 그 안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섬처럼 앉아있었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책상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풀었던 문제집을 수북이 쌓아놓고 영어 단어를 하나라도  기억 속에 남기려는 사람도 있었다. 손에  수험번호와 같은 번호를 갖은 책상에는 책상의 주인인듯한 학생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조용히 다시 교실을 나섰다. 교실과 여자 화장실 사이에는 음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음수대 아래에는 수도꼭지와 개수대가 이어져있었다. 학창 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지겹게 했던 청소와 당번 따위의 일들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추운 겨울에 수돗가에서 걸레를  때면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친구들과 서로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대며 장난을 쳤었다. 여름에는 창문을 닦다 말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넋을 놓기도 했었다. 철없고 단순했던, 그래서  즐거웠던 열다섯의 내가 이곳 어딘가에 함께 있는  같았다.


그때의 내가 만약  년이 지난  지금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할까? 지금 나의 모습에서 희망을 볼까 아니면 절망을 하게 될까? 설마  년이 흐른 후에도 이렇게 길을 헤매고 있을지는 몰랐다며 슬픔에 빠지는 것을 아닐는지, 씁쓸한 생각이 미간 사이로 지나갔다. 시험 시작을 십분 남기고 다시  문을 열었다. 나설 때와 달리 교실 안은 시험을 보려는 사람들로 빈틈없이   있었다. 줄과 열을 맞춰 서있는 책상을 따라, 교복을 입고  어린 학생들부터 연배가 지긋한 어르신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또래에 후드티를  뒤집어쓴 핼쑥한 얼굴을 갖은 동년배의 사람들도 곳곳에 보였다. 교실은 꽉 찼으나 그곳을 메운 사람들은 여전히 섬처럼 보였다. 약속된  시간 뒤에는 다시 각자의 길로 흩어질 사람들은 서로에게 지나치지 않을 만큼만의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인연보다는 우연이라는 말이  가까우니까. 하지만 서로에게 타인이라는 호칭 이외에는 붙일 것이 없는 우리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여기 모두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능숙한 솜씨로 시험관은 답안지를 모아 황토색 봉투에 넣었다. 귀가해도 좋다는 시험관의 이 떨어짐과 동시에 교실 안의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옷깃을 추스르며 학교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벌써 하루의 절반이 지나있었고 거리는 점심시간을 맞아 활기가 돌고 있었다. 바람이 차갑기는 했지만 햇볕은 따사로워 걷기에 좋아 보였다. 학창 시절 수도 없이 지나온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의 사이에서, 만약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을 전할  있다면 적어도 변명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망시켰다면 미안하지만,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아야지. 그래도  정도면  나쁘지는 않다고, 결과가 전부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해  것이다. 그리고는 슬쩍 미소 지으며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조금만  해보자 하고 기분을 풀어줘야겠지. 내가 누군지보다 나는 그래도 나라는 것이  중요하니까. 어제의 , 오늘의  그리고 내일의  곁에 있을 사람은 다름 아닌 ‘나’ 하나뿐이니까. 그렇게   겨울 나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같았다.  




글: vivaJain - https://brunch.co.kr/@vivajain

그림: Soorimm - https://www.instagram.com/soorimmki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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