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슬픔이 지옥처럼 입을 벌리는 시간, 그래도 마냥 슬프지 않도록...
심장병 말기의 녀석이 제일 힘들어하는 시간은 늦은 밤부터 새벽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녀석이 잠 못 이루고 아플까 봐 두렵기 시작했다. 밤이면 슬픔이 지옥처럼 입을 연다는 C.S.Lewis의 말처럼 밤이 되면 낮에 애써 감춰온 슬픔을 직면하는 것 같다.
요즘,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엄마를 보내본 나는 죽음에 대해 아니 정확히는 죽음으로 인한 상실에 대해 조금은 알고 면역이 생겼다고 믿었다. 제일 소중한 사람을 보냈으니 이제 다른 죽음을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착각했다. 음, 근데 아니다. 이건 마치 처음부터 또다시 시작이다. 예전에 경험했다고 전혀 덜 아프지 않다.
예전에 발톱이 빠진 적 있다. 수영장 벽면에 정면으로 들이받아 엄지발톱이 깨진 것인데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 번에 발톱이 똑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덜렁덜렁 깨진 일부가 붙어있다가 새 발톱이 올라오면 그때 조금씩 조금씩 떨어진다. 만약 그전에 떼내려 하면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발톱의 색은 아주 시커멓고 냄새도 고약하다. 그런 발톱을 덜렁덜렁 달고 다니면서 부주의하게 다른데 부딪히기라도 하면 그 고통 또한 상당하다. 그런데 나는 미련스럽게도 한번 더 그것도 똑같은 발톱을 보낸 적 있다. 그때, "전에 한번 빠졌으니 봐준다. 이번엔 덜 아플걸" 하고 깨진 발톱이 스스로 나가떨어져 주지 않았다. 그때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발을 붙잡고 엉엉 우는 것부터.
슬픔은 면역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때를 회상할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가 아니라 내 발톱을 보며 마치 자신의 발톱이 깨진 것처럼 일그러졌던 엄마의 얼굴이다. 나의 발을 붙잡고 좀 조심하지 그랬냐고 이럴 줄 알았다고 다그치며 약을 발라주던 엄마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도 그 엄지발톱을 보면 엄마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의 긴긴밤, 고통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고자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녀석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농담을 건넨다.
"아이고, 할아버지, 힘드세요, 오늘은 잠도 못 주무시겠어요?"
"물 좀 드시겠어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몸 좀 주물러 드릴까?"
그리고 녀석이 좋아하는 단어들로 관심을 돌린다.
"산책?(최강의 단어!) 고구미?(고구마를 그렇게 부른다), 아삐뿌?(아빠를 이렇게 부른다)"
녀석이 나중에 무지개다리를 건너 고통의 강을 지났을 때, 죽음에 이르러 느낀 고통보다 이런 나의 모습을 기억하며 피식 웃어주면 좋겠다. 엄마가 애썼네 애썼어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