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제부터였다. 흐린 오후의 반을 보내고 있을 무렵 갑자기 머릿속에서 생각 하나가 떠다닌다. 오랜만에 먹고 싶다는 갈증이 생겨나는 그것이 자꾸 내 주변을 서성인다. 라볶이였다. 보통은 분식집을 지나거나 티비에서 맛있게 먹는 이들을 보면 덩달아 생겨나는 마음이었다.
잠을 자면서도 몇 번 떠올랐던 것 같다. 언제나 바쁜 아침을 보내고 돌아온 점심이다. 처음에는 상추쌈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또 라볶이가 떠올랐다. 주말이 아닌 모든 날의 점심은 혼밥이다. 가끔 누군가와 약속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그건 어쩌다 있는 행사 같은 일이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떡볶이류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음식이라 여겼던 탓이었다. 처음 분식집을 가서 튀김과 김밥, 순대, 떡볶이를 시킬 때도 친구 두서너 명이 같이했다. 엄마가 된 지금은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할 때면 등장한다. 그러니 내가 나를 위해 만드는 일은 그동안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밥통을 열어 밥을 확인하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꺼내서 적당히 먹는 게 좋을지 하루 만에 욕구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른거리는 그것을 먹을지 선택해야 했다. 결론은 매일 먹는 밥보다 다른 걸 먹기로 했다. 나만의 라볶이를 먹는 기분이 궁금해졌다.
사리면 반쪽과 어묵, 냉동 납작 만두와 냉장고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삶은 계란 하나를 꺼냈다. 단단히 얼어 있는 어묵을 그냥 넣을까 망설이다 맘이 불편해서 데쳤다. 평소에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나를 위한 식탁에서 오히려 대충 하려 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냄비에 물이 끓기 시작하자 재료들을 모두 넣고 국물이 우러날 즈음 고추장 한 숟가락을 넣었다. 그러니 제법 벌겋게 변한다. 상상했던 그림이다. 남겨둔 라면 수프를 아주 조금 넣었다. 국물 맛을 보니 다른 하나가 필요한 시점이다. 설탕을 살짝 스쳐 가게 뿌렸다.
냄비 뚜껑 너머로 보글보글 익어가는 모습이 식욕을 당긴다. 접시에 담고 혼자 티비 앞에서 놓친 드라마를 보면서 먹었다. 어색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라면을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 즐거운 미소가 어디선가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 먹는 음식도 아닌데 어묵과 만두, 계란까지 어느 것 하나 별로인 것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너무 많다고 여겼던 한 접시를 어느새 비웠다. 늦게 먹은 점심이었기에 적당한 포만감은 나를 여유롭게 했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머릿속을 채웠던 여러 고민의 가지들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왜 혼자 먹는 라볶이는 이상하다 여겼을까 하는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어린 시절과 엄마로 살아가는 지금을 돌아보았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이유로 행동의 범위를 자칭 타칭으로 한계 짓고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 일에서 당연히 우선순위가 분식집 메뉴였기에 혼자 먹을 일이 없었다. 지금은 어떨까. 일상의 대부분은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매일 나가는 일터가 집인 전업주부라는 사회적으로 구분 지어진 타이틀 안에서 산다.
에너지를 나 중심이 아닌 가족에게 쏠려 있기에 일어난 일 같다. 내 의지보다는 아이와 남편이 먹고 싶어 하거나 기운 나게 하는 식단을 고려하기에 혼밥을 하는 시간에 나를 돌아보기가 쉽지는 않다. 만들기보다 널브러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일 듯하다. 문득 너무나 욕구가 강해지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저 평범한 점심이었다.
라볶이를 두고 시간을 끌었던 건 이런 생각의 연장이었다. 더 깊이 나를 들여다본다면 먹는 일보다 자유가 먼저였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복잡한 과정과 더불어 해야 할 게 많다. 아무리 대충 한다 해도 그릇 몇 개가 나오는 건 막을 수 없다. 정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져야 할 노동을 멀리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먹고 싶은 라볶이를 만들어 먹었다는 건 어쩌면 나를 돌보는 아주 작은 걸음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내 욕구에 충실한 결과였다.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며 앞에 있는 한 그릇이 나를 다독여 주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오롯이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싶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 라볶이를 혼자 먹기가 싫은 게 아니었다.
“귀찮아. 먹던 대로 먹지. 그게 편해.”
내 마음을 모른 척하고 지나쳐 버린 것이었다.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바라보고 싶지 않으니 그저 편리함을 핑계로 내 마음을 숨겨버린 일이었다. 내 생의 최초, 나만을 위한 라볶이가 나를 만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