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아침부터 컴컴하다.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다. 지난 월요일부터 주말에 비가 많이 온다는 예보를 들었다. 예상된 일이었다. 조금만 더 보태면 토요일은 비라는 공식이 생겨날 정도다. 처음에는 촉촉하게 온다 싶더니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벚꽃은 떨어져 빗물 위에 떠다닌다. 나무가 있는 주위마다 벚꽃 작은 연못이 만들어졌다.
기다렸던 봄의 찬란한 축제 일부가 막을 내린다. 벚꽃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 철쭉이 기다리고 있다. 분홍과 다홍이 먼발치서 알아볼 만큼 진해졌다. 비가 그치고 나면 꽃망울을 터트릴 태세다. 동네 어귀를 지나는 나무 밑에 터를 잡은 꽃잔디가 숭어리 숭어리 분홍 꽃을 피웠다.
아이의 말처럼 이제 초록의 시대가 오나 보다. 가로수 나무들에선 잎이 파릇파릇하다. 앙상한 가지로 겨울을 보낸 이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한 해를 살아갈 준비를 한다. 싹들이 제법 자라 모습을 드러낸다. 여린 연둣빛을 자랑한다. 봄비가 세상을 적시는 날에는 주변의 모든 게 어여쁘다. 세상을 향해 ‘저 여기 있어요’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창문 너머 풍경을 감상하다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온다. 휴일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과 의무감 같은 게 살며시 고개를 드는 순간이다. 회사에 다니는 고단함은 뭐라 말하지 않아도 그려진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남편이 꼴 보기 싫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다가도 그 마음이 사그라진다.
그는 언제나 묵묵히 직장과 집을 오 간다. 아침과 저녁 그의 표정을 보면 하루가 어떠했는지 대강 짐작하고도 남는다. 십여 년 이상을 함께 지내다 보면 점쟁이가 운수를 점치듯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게 있다. 그게 세월이 만들어주는 부부 사이일 수도.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던 까닭에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여보 미나리 전 부쳐줄까?”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전을 좋아한다. 언제나 돌아오는 말이지만 오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은 전이 좋지.”
해 달라는 분명한 답은 아니다. 전후 맥락상 그럴 것이라고 짐작게 하는 그를 닮은 화법이다.
금요일에 사두었던 미나리를 꺼냈다. 장을 보고 마트를 나오는데 봉지에 수북이 담긴 그것이 눈에 띄었다. 초록의 싱싱함이 나를 이끌었다. 다시 한 봉지를 들어 계산대에 올렸다. 비가 예정돼 있던 휴일이라 부침개든 나물이든 어떤 것으로도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았다.
미나리를 씻고 집게손가락 길이로 듬성듬성 썰어 두었다. 밀가루와 달걀 하나, 소금을 한 꼬집 넣고 잘 섞어 주었다. 다른 때 같으면 부침가루라는 녀석을 사용하지만, 이제부터는 멀리하기로 했다. 전을 만들 때 가장 알맞은 상태의 밀가루지만 여러 가지 양념을 첨가한 탓에 맛이 강하다.
헬렌 니어링의 말처럼 이제부터 음식은 가능한 무겁지 않게 먹기로 했다. 무언가를 첨가한다는 건 본래 맛을 해칠 위험이 커진다. 밀가루 역시 구례에서 난 우리 통밀가루를 사용했다. 허옇지 않고 검은듯한 투박함이 시골 정감이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구어질 무렵 국자 대신 손으로 반죽을 크게 집어 팬에 모양을 만들었다. 기름과 맞닿아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익을 준비를 한다. 주걱으로 적당히 눌러주고 위에 있는 반죽이 적당히 수분기가 사라져 갈 무렵 뒤집으면 알맞게 익은 상태다. 밀가루를 만난 미나리가 예쁘다. 양파를 조금 넣어주니 미나리의 초록이 더욱 빛난다.
전을 두 장 부쳤다. 예전 같으면 접시 가득 둥근 탑을 쌓았을 일지만 이젠 적게 먹는 게 맛있다는 걸 알았다. 맛은 양에 정비례하지 않음을 신조로 삼기로 했다. 모자란 듯 배를 채워야 아쉬움이 더해져 음식의 제맛이 다가오고 천천히 먹게 된다는 걸 절감하는 요즘이다. 아이들은 미나리의 존재를 아직은 낯설어한다. 전은 오롯이 우리 부부의 몫이 됐다. 야구에 빠진 남편은 젓가락은 접시에 눈은 티비에 고정돼 있다.
계절은 이상하리만치 일상의 많은 걸 바꿔놓는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봄이면 두꺼운 점퍼와 코트를 멀리하게 한다. 음식도 예외는 아니다. 이젠 김치찌개나 청국장보다는 얼갈이배추를 넣은 맑은 된장국이나 열무김치, 상추쌈, 아삭한 생채가 좋다.
봄에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초록을 먹는 일이다. 일찍 세상에 얼굴을 내민 냉이부터, 달래, 쑥, 방풍과 온갖 나물을 먹어야 하는 건 의무다. 그래야 움츠렸던 몸이 기운을 내어 생기를 얻어간다. 초록이들은 자연이라는 큰 우주 안에서 제 할 일을 해내는 작은 영웅들이다.
영화 미나리가 얼마 전부터 화제다. 내 앞에 있는 미나리 전이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영화로까지 생각의 범위를 넓혀준다. 영화의 명대사로 알려진 한 부분이 스친다. 내가 미나리로 음식을 만들어 올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미나리는, 어디에 있어도 알아서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 건강하게 해 줘.”
미나리를 먹는다는 건 쉼 없는 강한 에너지를 품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미나리는 몸에 있는 독소를 배출하고 피로회복과 혈관을 맑게 해주는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남편에게 내민 전 역시 이런 나의 간절함이다. 이 봄의 특권인 초록을 먹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고 마음먹는다. 봄날에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호사이자 특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