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봄부터 상추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소풍날 김밥을 챙기듯 고기를 먹을 때 함께 따라가 줘야 하는 채소일 뿐 그리 가까이하지 않았다. 언제나 가는 로컬푸드 매장에는 동네 주변 농부들이 키운 상추들이 가득하다.
상추를 가만히 살펴보니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우선 가볍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도 한 봉지 가방에 넣어도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다. 가격도 한몫한다. 천 원이라고 가격표가 붙여진 것에는 치커리와 갓 등 쌈 채소 서너 가지가 액세서리처럼 들어가 있고 오로지 상추만 담겨 있는 건 팔백 원이다. 요즘 세상에 그 돈으로 사 먹을 수 있는 건 손에 꼽을 정도다.
식탁에 오르는 일도 번거로울 게 없다.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내면 끝이다. 겉절이를 만든다면 소스에 먹고 싶은 채소들을 함께 어울려 버무려 내면 된다. 이 경우에도 많은 양념이 필요하지 않다. 간장, 식초, 매실액, 참기름을 기본으로 하면 신경 쓸 게 없다.
야리야리하면서 꾸불꾸불 초록과 검정이 적절하게 섞인 이것은 손에 올렸을 때도 불안함이 전혀 없다. 어디로 도망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다. 잎에 거세면 먹기가 불편할 텐데 부드러우니 잘 넘어간다. 어떤 음식이든 잘 어울려 스며든다.
칼로리 걱정도 없다. 맛있는 요리를 앞에 두고 열심히 먹지만 결국에는 살찌는 것에 대한 은근한 두려움이 항상 존재한다. 단지 예쁘게 옷을 입고 싶거나 남들 앞에서 자기 관리 잘하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함도 아니다. 건강과 연결되는 것이기에 먹는 일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상추는 어떤 장애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몸속 염증 수치를 낮춰주고 소화 활동을 돕는 동시에 포만감을 높여주는 일 석 삼조의 역할을 해낸다. 그러니 이것을 멀리할 이유가 없다.
아침보다는 점심과 저녁에 상추를 올린다. 웬일인지 아침에는 낯설다. 상추에 여러 가지를 올리고 쌈을 먹는 일이 바쁜 아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최고의 시간은 점심이다. 혼자 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내 맘대로 자유로울 때 상추는 좋은 동무가 되어준다. 천천히 감상하며 먹는다. 부드러우면서도 쌉쌀하고 조금은 달콤하다.
이상하게도 큰 마트 것보다는 김 아무개, 박 아무개라고 생산자가 적혀있는 로컬푸드 것들에 마음이 간다.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때로는 그들이 씨를 뿌리고 상추 한 포기를 얻기까지 기울였을 정성이 그려지기도 한다. 엄마가 이 봄날을 과수원에서 보내야 가을에 맛있는 귤을 얻게 되는 것처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았기에 훨씬 싱싱하다. 가끔이지만 매장에서 직접 농사지은 상추를 갖고 와서 정리하는 농부들을 만나게 된다.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차곡차곡 정리하는 모습이 지극하다.
한 달 정도 상추를 가까이하면서 생활이 조금씩 달라졌다. 적게 먹는 게 얼마나 편안한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상추를 먹는다는 건 누가 따라오는 것처럼 허겁지겁 먹던 밥에서 느린 밥상으로 자연스럽게 변하는 과정이었다. 상추를 올리고 밥과 멸치, 쌈장 등 무엇이라도 함께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서두르는 바쁜 마음은 잠시 잊어야 한다.
조금 여유가 생겼을 뿐인데 밥상에 앉아 있는 내가 편안해졌다. 특별한 반찬이 없이도 상추와 함께라면 가능하다. 어느 먹방에 나오는 엄지 척하는 최고의 맛은 아닐지라도 입안을 감싸주는 소박하지만 절제된 은은함이 있다. 대단하지 않아서 손이 가는 밥이다. 반찬들도 눈여겨보게 된다. 내가 만들었지만 불 앞에서 열심히 움직여 만들 때를 제외하고는 그리 관심이 없다. 그러다 상추 위에 올리기 전 무엇을 집을까를 고민하는 순간에 그것들에 눈이 간다.
상추를 가까이하면서 빵을 멀리하게 되었다. 빵순이라 불릴 정도로 빵 사랑이 대단하던 난 빵집과 상추를 사러 가는 날이 뒤바뀌었다. 몸에 그리 이롭지 않으니 밀가루와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채소를 먹으며 알게 된 가벼움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이런 작은 변화는 아이들에게도 찾아왔다. 예전처럼 빵이 없기도 하려니와 먼저 찾는 일도 없다.
어느 날 상추를 먹으며 내 몸에 생기 어림을 경험했다. 그 후로 언제나 곁에 두고 싶은 먹거리가 되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그저 부담이 없어야 하나 보다. ‘한번 해 볼까’하는 별 의식이 없는 순간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다시 생활의 변화로 찾아오는 듯하다. 무게를 느끼는 일은 어느 순간에 힘들어 쉬게 되고 멈추기 마련이다. 쉽고 편하다는 건 오래갈 수 있는 큰 힘이자 시작점인 것 같다.
봄날 상추씨를 뿌려 비가 오고 며칠이 지나면 아기 싹이 비죽비죽 솟아난다. 어릴 적 집 뒤에 있는 과수원 한편에서는 봄부터 찬 바람이 불기 전까지 상추밭이 이어졌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상추밭에 가서 한 소쿠리 따와 간장과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조물조물하면 최고의 반찬이었다. 밤새 비 오고 난 다음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에 이슬 맺은 상춧잎이 빛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난 매일 상추를 먹는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하는 마음이 가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