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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Aug 20. 2024

매우 예민한 사람

나보다 더 예민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이혼 후 연애는 몰라도 재혼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도무지 누군가와 한 집에서 공간을 공유하며 평화롭게 사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전 결혼생활에서의 깨달음 때문이리라. 나는 그때 쉽지 않은 시간을 겪으며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는데, 가령 이러한 것들이었다. 

나는 영역 동물인 고양이 마냥 내 공간이 침범 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넉넉한 개인적 공간이 필요해서 결혼을 하더라도 각자의 방이 있어야 한다. 수면의 질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기에 잠은 무조건 따로 자야 한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먼저 손발을 씻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집안일의 규칙적인 루틴이 깨지면 몹시 언짢아지므로 서로 약속한 집안일은 항상 제때 이루어져야 한다. 

일단 여기까지만 보아도 ‘결혼할 때 이 모든 것을 수용할 남자가 과연 존재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지었다.

     

까다로운 사람이 반드시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만날 때 나는 내 까다로움을 가급적 숨기려 했다. 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업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았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관계에서는 대부분 무난히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와 처음 만난 날, 그는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더니, 대뜸 나에게 “민감도 테스트 해볼래요?”라고 제안했다. 내가 이유를 묻자, 나의 여러 비언어적 행동에서 민감도가 높아 보인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스로를 예민하거나 민감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단지 '까다롭다'고만 여겼기에 그의 말은 의외였다. 하지만 심리 테스트 같은 단순한 테스트라 생각하고, 그냥 재미로 해보기로 했다.

그가 테스트 문항을 톡으로 보내준다고 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카톡’ 소리가 울려 대화창을 열어보니 문항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앞선 문항들만 대충 읽어봐도 이 테스트가 단순한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전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기분 좋게 술을 마셔 객관성을 잃어버린 그때에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할 건가 싶어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지금은 정신이 없으니 나중에 집중해서 해보겠다고 말하며 휴대폰을 닫았다.

     

다음날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신중하게 답을 체크하고 결과를 확인했다. 그랬더니 그냥 민감한 사람도 아니고 ‘매우 민감한 사람’이 나왔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어리둥절하다가 테스트를 하고 결과를 알려달라던 그의 말이 생각나 곧바로 연락해 결과를 전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나보다 더 높은 점수가 나왔고, 그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내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테스트 이후 며칠 간 ‘민감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테스트의 출처가 궁금해져 그에게 물었더니 <센서티브>라는 책이라고 했다. 나는 곧장 그 책을 구매해 단숨에 읽어 내렸다.

‘센서티브한 사람’은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대개 예민하고, 비사교적이며, 신경질적인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유난떨지 말라는 사회적 시선에 스트레스, 압박, 부담감을 엄청나게 느낀다. 하지만 ‘민감함’은 결코 고쳐야 할 나쁜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개발해야 할 특별한 자질이다. 한계를 인정한 후에는 휴식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내용 외에도 책 속의 모든 말이 내 얘기 같아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프면서도 깊은 위로를 받았다.     


책을 읽은 이후 ‘민감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관련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미친 듯이 읽었고, 그 결과 원하던 대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

‘민감한 사람’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로, 이는 고감각을 가진 사람, 즉 ’매우 예민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으며, 전체 인구의 15~20% 정도를 차지한다. 

이들은 마치 섬세한 안테나처럼 주변의 자극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반응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빛, 소리, 냄새, 질감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타인의 감정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한다. 또한 책임감이 강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깊은 사고와 성찰을 중시하여 일상 속에서도 다양한 철학적,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하지만 이러한 민감성은 때때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과도한 자극으로 인해 쉽게 지치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변화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완벽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만약 자신이 HSP라면, 우선 자신의 감수성을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충분한 휴식과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피로를 예방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며,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매우 예민한 사람(HSP)’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마치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을 마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외부 자극에 민감해 밖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것, 집에서 조용히 혼자 있는 걸 선호하는 것,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금세 지쳐버리는 것 등 하나하나가 내 얘기였다. 나는 틀림없는 HSP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마치 알을 깨고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새로운 기분이었다. 나는 성격이 까다로운 게 아니라, 단지 HSP였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의 틀 안에 들어가려 나를 닦달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너무 터프한 사람들 속에서 주눅 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연히 다짐했다.

    

서로 교제를 생각하지 않을 무렵, 그가 내게 연애나 재혼에 대한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음, 잘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나보다 더 예민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럼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라고 답했다.

생각해보면, 그의 예민성은 나의 예민성을 빠르게 알아봤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서로를 편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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