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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Sep 03. 2024

여덟 살 차이

나하고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정말? 진짜?

토요일 오후 2시, 그는 강남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을 잡을 때는 아직 추운 날씨에 목폴라를 입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3주가 흐르자 어느새 4월 중순이라 완연한 봄의 공기가 기분 좋게 코를 스쳤다.


사실 날짜가 많이 남아 있어 그 사이에 그에게 변수가 생겨 못 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약속 날짜를 너무 일찍 정해 놓았을 때 그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약속에 집착하는 편이라 내 쪽에서 약속을 깨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바쁘고 복잡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누구에게 언제 어떤 일이 생겨 약속이 깨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 날짜에 못 볼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리 충분히 생각해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떤 변수도 생기지 않아 우리는 3주 전 정한 그 날짜와 시간에 정확히 만났다. 한참 전에 정한 약속을 정확히 지킨 점 덕분에 그도 나만큼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 그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도가 약간 올라갔다.


그의 안내에 따라 카페로 들어가 2층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오랜만의 대화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그 덕분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가족, 건강 및 운동, 경제 등의 다양한 주제로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다가 심리학으로 주제가 전환되자 역시 이야기가 또 길어졌고, 특히 ‘마시멜로 실험’에 대한 대화에서 서로 잘 통했다. 마시멜로 실험은 1차, 2차, 3차까지 있는 종단 연구로, 그 설계가 참 흥미롭다.


1차 마시멜로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4세 아이들에게 마시멜로 하나를 주고, 15분 동안 먹지 않으면 추가로 하나를 더 주겠다고 제안한 뒤 밖으로 나가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아이들이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는 시간은 평균 3분이었다. 

2차 마시멜로 실험은 1차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이 14세가 되었을 때 진행된 후속 조사였다. 1차 실험에서 마시멜로를 더 오랫동안 참은 아이들은 학업 성취도가 더 높고, 약물 남용 및 범죄 행위가 더 적으며,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하는 등의 긍정적인 특성을 보였다. 

3차 마시멜로 실험은 1차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이 40세가 되었을 때 진행되었으며, 뇌 스캔을 통해 그들의 뇌 구조와 기능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마시멜로를 더 오랫동안 참은 사람들이 전전두피질의 활동이 더 활발하고 해마의 회백질 밀도가 더 높았다. 참고로, 전전두피질은 계획, 의사 결정, 자기 조절 등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고, 해마는 기억력과 학습을 관장하는 뇌 영역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마시멜로 실험을 통해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을 지연시키는 능력이 인생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와 그는 실험 결과의 해석에 깊이 동의하면서, 미래의 더 큰 만족을 위해 현재의 즉각적인 만족을 지연시킬 줄 알아야 한다고 한참을 떠들었다. 실제로 지금도 그는 자신보다 행동과 결정이 훨씬 느린 나를 잘 참고 기다리며 만족을 지연시키는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실험 참가자들의 나이가 계속 나와서인지 갑자기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독서클럽에서는 자기소개를 할 때 이름만 말하고 나이는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를 부를 때는 이름 뒤에 ‘님’을 붙여 'OO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따로 물어보지 않는 이상 나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나이를 그간의 모습들을 통해 그저 나보다 어리겠거니 정도로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무얼 들은 걸까? 그의 출생연도를 듣고는 정말 깜짝 놀라서 그에게 다시 물었다. “90년대 생이라고? 나하고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정말? 진짜?” 많아봐야 서너 살 어릴 줄 알았건만, 무려 여덟 살이나 어리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리고 많이 놀란 내 표정에 그는 친히 신분증을 꺼내 생년월일을 보여주며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여덟 살의 나이차를 알게 되자 그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친구라고 하기엔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대학생 신분으로 시청 앞에서 월드컵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그때,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아찔했고,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대화가 잘 통하는 아는 사람'에서 '대화가 잘 통하는 아는 동생'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3살 터울의 친남동생이 떠올랐다. 누나 같은 마음으로 그가 조금 어리숙해도 허허 웃으며 넘기고, 어린 동생처럼 챙겨주어야겠다는 감정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그런 생각은 점차 변해갔다. 그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사고를 지니고 있었고, 우리는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 깊이 있는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그런 대화를 나눌 때만큼은 나이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나이 차이를 잊을 정도로 자유롭게 스스럼없이 소통했고, 때로는 서로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를 ‘대화가 잘 통하는 동년배의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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