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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소녀 어니와 돌머리 대결

by 고야씨

'어니'처럼 강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어니는 태권소녀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나쁜 어른들을 태권도로 혼쭐 내준다.


티브이에서 [태권소녀 어니]라는 외국 드라마가 나왔을 때

동네 아이들 모두 어니에게 반해버렸다.


학원은 없고 시간은 많고 아이들은 매일 모이던 시절이었다.

어니처럼 되고 싶어서, 나와 친구들은 태권도 같은 걸 느낌으로 했다.

운동신경이 좋은 ㅈ은 태권도를 태권도보다 더 멋지게 했다.

취권과 당낭권과 태권도가 어우러진 그 움직임은

(그때 내가 골디락스라는 말을 알았다면) 골디락스라 이름 붙일만했다.

나와 다른 친구들은 ㅈ에게 태권도 같은 걸 배웠다.

그의 동작은 어쩐지 할 때마다 달리지는 거 같았는데,

ㅈ은 우리가 아직 하얀 띠 같은 거라 헷갈리는 거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ㅈ의 골디락스 무술을 느낌대로 따라 했다.

팔다리를 뻗을 때는 입으로 쉭쉭 소리를 냈다.

그렇게 상상 속 수많은 악당들을 물리쳤다.



"그래도 돌머리는 못 이겨."

뒤늦게 공터에 나온 ㄱ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돌머리 1등이거든?"

ㄱ언니는 한쪽 입술을 올리고 씩 웃고 있었다.

ㄱ언니는 ㅈ에게 다가가 돌머리 대결을 하자고 했다.

서로가 꿀밤을 한 대씩 주고받은 다음에,

맞은 머리가 아픈지, 때린 손이 아픈지 비교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ㅈ은 좋다고 했다.

ㄱ언니가 먼저 ㅈ의 앞머리에 힘껏 꿀밤을 내리쳤다.

ㅈ은 꿀밤을 맞자마자 울면서 집으로 갔다.

ㄱ언니 머리를 때리지도 못했다.


"또 나랑 돌머리 대결 할 사람 있어?"

ㄱ언니는 턱을 들며 말했다.

너무 얄밉고 악당 같았다.

한다고 할까, 말까, 한다고 해볼까, 말까, 고민을 했다.

'무섭긴 한데, 외삼촌보다는 분명 약할 거야.'

외삼촌의 도를 넘은 장난에 하루가 멀다 눈에 독기를 품고 씩씩대던 나였다.

해볼 만했다.


"나 대결할래."

내가 말했을 때, 친구들은 나보고 먼저 때리라고 말했다.

ㄱ언니가 또 먼저 꿀밤을 먹이는 건 공평하지 않다고 말이다.

나는 나중에 때리겠다고 했다.

꿀밤에 얼마나 힘을 실어야 할지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맞아봐야 그만큼 때릴 수 있지, 아니면 난 머뭇거릴 것이었다.



ㄱ언니는 정말 무자비하게 꿀밤을 때렸다.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눈을 감았는데도 번쩍 환해졌다.

뜨겁고 차갑고 후끈하고 시원했다.

아, 외삼촌은 힘조절을 해서 꿀밤을 먹인 거구나, 그때 알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었다.

참기 힘든 눈물은 나지 않았다.

서럽거나 억울한 건 아니었으니, 찔끔 난 눈물을 아닌 척 비비면 그만이었다.




ㄱ언니가 맞을 차례였다.

언니는 말이 많아졌다.

여기는 너무 뒤고, 여기는 너무 앞이고, 여기는 너무 옆이라

꼭 이쪽만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ㄱ언니는 눈을 꽉 감느라 온 얼굴을 구겼는데

그건 내가 생각한 돌머리 1등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울면서 집에 간, 나의 골디락스 사부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을 탈탈 털어버린 다음에

천천히 새끼손가락부터 힘을 주어 구부려 꿀밤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번 허공에 연습한 다음,

"이번에는 진짜야."

하고 재빠르게 꿀밤을 딱.


ㄱ언니는 얼굴을 더 구겼다. 얼굴도 귀도 빨개졌다.

좀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언니는 얼굴에 힘을 준 채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엄마가 빨리 집에 오라고 했다며 뒤를 돌았다.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ㄱ언니는 가면서, 하나도 안 아프다고 외쳤다.

언니 등에다 대고, 나도 하나도 안 아프다고 소리쳤다.


친구들은 나중에 만나면 재대결을 해서 돌머리 1등을 가리라고 했다.

보나 마나 내가 1등이라고, ㄱ언니가 바쁘지 않을 때 대결을 하라고.


아이들은 몰랐다.

내 손가락 마디가 얼마나 얼얼한지, 꿀밤자리가 얼마나 후끈한지.

이미 맛을 본 이상, 다음번이라면

나 역시 시작도 전에 얼굴을 잔뜩 구길 것이고,

무엇보다 그때가 언제 올까 신경 쓰며 내 세상이 온통 꿀밤일 텐데...


"나 돌머리 1등 안 할래.

나는 태권소녀 어니가 더 좋아."



한동안 우리는 골디락스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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