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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바지와 눈썰매

by 고야씨



엄마가 가죽바지를 사 오셨어. 광택이 나는 까맣고 도톰한 바지였어. 진짜 가죽은 아니고 가죽느낌 바지.

“이게 서울에서 멋쟁이들만 입는 바지야. 안감이 붙어있어서 따뜻할 거아. 바람도 잘 막아주고. “

엄마가 말했지만, 우리 동네에서 이런 바지를 입고 다니는 애를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좀 난감했어. 여기는 강원도 산골이고 나는 멋쟁이도 아니잖아.

“한번 입어봐, 잘 맞나 보게. 이쁘다. 한번 접으면 딱 되겠다. “

윤기가 잘잘 흐르고 지나치게 세련된 이 바지는 어쩐지 쑥스럽고 내 옷 같지가 않았어. 그만 벗어두려고 했는데, 문밖에서 나를 부르는 노래가 들렸어. 고야씨- 노올자-

“그대로 입고 나가면 되겠다. “

엄마가 너도 신나지 하는 눈빛으로 말했어.



햇빛 아래에서 내 바지는 더 존재감을 뽐냈어. 친구는 나보다 내 바지를 더 자주 보았어.

“그 바지 어디서 났어?”

“엄마가 시내 갔다가 사 왔어. “

“우리 언니 방에 홍콩 사람 사진 있잖아. 그 사람도 이런 거 입었어. “

친구는 내 바지를 만져보고 느낌이 참 좋다고 했어. 이상한 바지는 아니구나 난 안심했어. 바지는 정말 따뜻했어. 후끈후끈 하나도 춥지 않았어. 난 가죽바지가 맘에 들었고 거의 매일 입었어. 흙이 잔뜩 묻어도 물수건으로 슥슥 닦으면 깨끗해졌다고.



눈이 많이 쌓인 날엔 썰매를 타잖아. 우리 집 뒤, 개울 건너엔 산이랑 이어진 밭이 있었어. 우리의 눈썰매장. 아이들은 비료포대에 지푸라기를 잔뜩 넣은 폭신한 썰매를 가져왔어. 끈까지 달아오기도 했고. 난 비료포대가 없었는데, 그때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았거든. 아빠는 아저씨들 몇 명과 산판일을 하러 다녔으니 우리 집엔 지푸라기도 비료포대도 없었던 거야. 집 주변을 빙 돌면서 비료포대를 찾아보기는 했는데, 엄마아빠에게 눈썰매가 필요하다고, 만들어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어. 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썰매는 친구랑 같이 타면 되지만, 그렇다고 빵빵하게 지푸라기를 넣은 끈 달린 비료포대가 안 부러운 건 아니었는데.



다리를 건너고 복술을 지나면 눈 쌓인 밭, 발이 푹푹 눈에 빠지지 않게 칙칙폭폭 기차놀이로 만들어둔 길을 따라 올라가. 거긴 온통 눈썰매장이지. 비료포대가 없으면 깍두기이고, 깍두기는 언제나 '원하기만 하면' 제일 바쁠 수 있었어.


아이들은 스릴을 즐겼어. 점점 더 산 쪽으로 올라가 경사가 급한 곳에서 출발했어. 썰매길 중간에 둔턱도 만들었어. 둔턱은 돌덩이를 찾아서 썰매가 지나가는 자리에 놓고, 그 위에 눈을 반복해서 덮으며 탕탕 두드려 만드는 거야. 장애물 코스라고 해도 괜찮겠어. 썰매길은 그냥 썰매길, 작은 둔턱길, 큰 둔턱길, 이런 식으로 구분했어. 빠른 속도로 내려오다 큰 둔턱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맞아, 붕 나는 거야. 붕 날아서 눈 속에 처박히지. 용기가 필요한 만큼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일이기도 했어. 높이 날수록 멋진 소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 나도 날아보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그냥 썰매만 탔어. 둘이 같이 타면 속도가 훨씬 빨라지니 그것도 충분히 재미가 있었지. 친구랑 더 높이 산 쪽으로 올라가서 썰매를 탔어. 내려오다 방향이 틀어져 썰매가 거꾸로 빙 돌았어. 분명 내가 썰매에서 밀려났는데, 어라? 왜 나는 썰매가 타지는 거지?


“와! 내 바지는 썰매가 필요 없다! 썰매 바지다!!”


그래, 내 가죽바지는 눈 위에서 미끌미끌 썰매나 다름없었던 거야. 난 엉덩이가 아프지 않게 털모자를 바지 안에 잘 펴서 넣고 몇 번이고 가죽바지썰매를 탔어. 끈 달린 비료포대가 더 이상 부럽지 않았어. 얼마나 신이 났겠어. 그날의 주인공이 누구였겠어. 큰 둔턱길을 내려갈 용기가 어떻게 안 생겼겠어.



나는 붕 날았어. 햇빛을 받은 내 가죽바지가 그렇게 빛났대. 그래서 눈이 부셨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눈 속에 박혀있고 여긴 포근하고 아늑했고 내 숨이 하얗게 눈앞에 피어났고 심장이 쿵쿵 온몸에 힘을 주었고 나는 벌떡 일어났고 "엄청 재밌다! 썰매바지가 최고다!" 소리를 쳤고 흥분은 식지 않았지.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고 그래서 생은 의미를 가지는 거라고 학창 시절 만화책에서 읽었는데, 이 이야기의 끝도 어린 시절 나에겐 그랬어. 지금이라면 예측이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역시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겠지? 자, 그때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정말 미친 듯이 썰매를 탔어. 올라가는 길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몰라. 친구들은 비료포대를 끌고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나만 올라가면 되잖아. 엉덩이 쪽에 넣은 털모자만 잘 펴주면 썰매탈 준비도 끝.


신나게 신나게 날다가, 몇 번이고 날다가 결국, 내 가죽바지가 북 찢어지고 말았어.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면서 엄마가 속상해하겠다, 엄마한테 혼이 나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 눈물은 나지 않았어. 그저 마법 같은 게 풀린 허탈한 기분이었어.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가서 엄마에게 가죽바지가 찢어졌다고, 미안하다고 했는데, 엄마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어.

“그랬니? 난처했겠다. 엄마가 그 생각을 못했네, 괜찮으니까 얼른 아랫목에서 몸 좀 녹여. 수제비 먹을래? “



순간 마음이 가벼워졌어.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가니 잠이 쏟아졌어. 어릴 때 어떤 비디오를 봤었는데, 전기에 감전이 돼 천재가 됐던 아이가, 천재의 삶이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아서, 다시 전기를 만지고 원래대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거든. 난 그 영화 결말이 그렇게 아쉽더라고. 그냥 천재이면서, 천재가 아닌 척해도 됐을 텐데 말이야. 가죽바지의 마법이 풀려 현실로 돌아온 허탈한 기분은 그래도 생각보다 금방 사라졌어. 대신 내 비료포대가 생겼어. 끈은 달려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지. 끈 달린 비료포대 얘기를 했더라면 내 비료포대에도 끈이 달려있었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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