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키모들은 눈으로 만든 집에서 산대. 그 집을 이글루라고 부른대. 티브이에서 이글루 이야기가 나온 다음 날 동네 아이들은 모두 이글루에 마음을 빼앗겼어. 눈으로 만들었는데도 포근하대, 정말 그럴까? 들어가 보고 싶어.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을 때고, 컴퓨터도 우리 마을엔 없었어. 티브이 채널도 KBS랑 MBC 뿐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프로그램을 봤어. 에스키모가 나온 방송도 그중 하나였는데 어떻게 안 봐, 눈으로 만든 집과 멋진 개들이 끌어주는 썰매가 나오는데. 이글루, 이글루, 우린 동네 공터에 모여 그 얘기만 했었지. -그 개들은 늑대 같더라, 백 할머니가 나물 뜯으러 갔다가 산속에서 발바리 새끼들을 봤대, 너무 귀여워서 집에 데려오려고 가까이 가니까 발바리 새끼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래, 아주 날쌨대, 근데 정훈이 삼촌이, 아이고 할머니, 그게 발바리겠어요, 늑대새끼지! 산 깊이 혼자 다니지 마요, 그랬대. 와 나도 늑대새끼 한 마리 데려와서 키우고 싶다, 썰매는 안 끌어도 되는데, 같이 이글루에서 놀게. - 이런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나. 정말 저 숲에 늑대가 있을까 그 후로도 산을 보며 자주 생각 했거든.
눈이 많이 온 날, 이글루를 만들어야지 아이들은 저마다 생각했어. 마당 가장자리로 치워둔 눈이 우리 키만큼 됐거든. 나도 내 동생과 뒷마당에 이글루를 만들기로 했어. 처음에는 가운데 부분을 파서 조금씩 넓혀갔는데 얼마 파지도 않아 푹 천장이랑 벽이 무너져 내리더라. 옆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해봐도 똑같았어. 건너편에 사는 오빠가, 먼저 눈을 탕탕 두드려서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고, 두꺼비집 만들 때처럼, 아니면 눈을 떠서 아랫벽부터 조금씩 쌓아가야 한다고 알려줬어. 나는 삽으로 눈을 두드렸어. 내가 두드리면 동생은 바가지에 눈을 가득 퍼서 부었지. 단단히 다진 뒤에 문이 될 곳을 조심조심 팠어. 어느 정도 판 다음엔 손을 안쪽에 대고 바깥에서 탁탁 두드렸어. 눈을 덧대가며 벽에 힘을 보탰어.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방을 만들었는데, 생긴 건 예쁘지 않았지만 이글루 느낌이 났어. 옆집 친구가 와서, 이글루 위에다 물을 뿌려야 한다고 알려줬어. -우리 오빠가, 따뜻한 물을 뿌리면 더 꽝꽝 언대, 오늘은 들어가지 말고 물만 뿌려놓고 내일 들어가는 거래.- 솥에서 따뜻한 물을 떠 분무기에 넣었어. 칙칙 눈집에 골고루 물을 뿌릴 때가 제일 뿌듯하고 개운했어.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담요를 깔고 이글루에서 따뜻한 옥수수차를 마셔야지!
그날 밤, 우리 집에 동네 아저씨들이 놀러 왔어. 시골의 겨울은 할 일이 많지 않아. 어른들은 밤마다 모여 화투를 치고 윷놀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셨지. 어른들이 오면 나는 티브이도 못 보고 안방에도, 큰방에도 못 가서 심심했는데, 그날은 이글루 생각에 아무렇지도 않았어. 여기에는 늑대도 늑대개도 없지만 우리 집엔 발바리도 있고 멍돌이도 있고 이글루 같은 것도 있다. 내가 만든 이글루가.
이건 내 기억이라서 파스텔빛 내일을 그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 그때의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알게 되거든. 잔뜩 기대하며 나간 어린 내가 본 이글루는 말이야, 이글루엔 말이야...
누렇고 동그란 구멍이 뽕뽕 나 있었어. 그게 뭔지 바로 알았지. 오줌을 눈 자국. 우리 집에 놀러 온 어떤 아저씨가 술에 취해서 우리 집 뒷마당 눈 위에 오줌을 눈 거야. 하필 내 이글루가 있는 곳에다. 이게 말이 되나,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어린이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게, 그냥 나 혼자 화를 풀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했어. 마음 같아서는 누군지 찾아내서 따지고 싶고, 다시 만들어 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어른들에게 그래선 안된다고, 나는 너무 단호하고 엄격하게 배우고 자란 어린 맏이였거든. 조용히 억울하고 조용히 베개를 적시고 조용히 마음을 걸고 한 겹 무표정해져서 일어나곤 했어. 모르겠어, 그래야 하는 거 같았어.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야기는 나의 웃픈 썰 중 하나가 됐어. 술자리에서 내가 억울한 톤으로 이글루 얘기를 들려주면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배를 잡고 웃었거든. 옛날 어른들 진짜 너무했네 하면서.
이 얘기를 듣고 무척 슬퍼한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게 바로 내 아이야. 웃긴 이야기라고 들려줬는데 아이는, 엄마가 어렸을 때를 생각하니 슬퍼진다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어. 내 아이는 나를 많이 사랑해서 웃을 수가 없었나 봐. 코믹하고 가볍게 말했는데도 말이야. 이상한 건, 아이의 위로에 내가 어린 시절 꼬마애로 금세 돌아갔다는 거야. 갑자기 울컥해서 화장실로 가서 몰래 조금 울었다. 어린 내가, 내 안에 그대로 있었더라. 이불을 쓰고 아직 숨죽여 울고 있었는데, 누가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조차도 몰랐던 거 같아.
기억을 색칠하고 메모하다 가볍게 푼 블랙 코미디 장르였는데, 아이의 반응에 난 고장 난 로봇 같았지. 감정을 눌러 꽁꽁 싸맨 로봇. 그게 어른스럽고 대견한 거라고 생각했었나. 만일 이글루 이야기의 끝을 지금이라고 한다면, 톤이 조금 다른 파스텔빛 내일이 된 거 같기도 해. 날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통해서.
나이는 어른인데 난 아직 다 못 자란 거 같다고 자주 생각을 했어. 그럼 좀 어때. 이제라도 나를 가만히 봐주고 나랑 더 친해져 보고 또 그러다 어느 날엔 너를 들어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사는데 늦은 나이, 이른 나이란 게 어디 있겠어.
나의 이글루 이야기는, 쓰다 보니 오늘에서야 마무리가 된 거 같아. 키보드로 와다다다 말하듯이 적었는데 그러면서 한번 더 나를 받아들이게 된다.
너의 이글루는 어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