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하루종일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며칠간 세탁기를 돌리지 못했어.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라 구조상 배수관이 얼기 때문이야. 올겨울이 얼마큼 추웠는지는 며칠이나 세탁기를 돌리지 못했는지로 가늠하곤 해.
내가 어렸을 때도 그런 날이 있었지. 겨울 중의 겨울, 꽁꽁 언 데서 한 걸음 더 찬기가 파고들어 밤새 틀어놓은 수돗물마저 조용히 입을 닫던 날. 그날 아침, 난 평소와 다른 엄마 목소리에 잠에서 깼어.
“어머어머 여보, 음료병이 깨졌어, 아까워서 어떡해, 춥긴 추웠나 봐, 이거 다 안에 들여놔야겠다.”
우리 집은 작은 가게를 했거든. 날씨가 너무 추워서 가게 안에 있던 병음료가 얼어 깨졌던 거야. 아빠는 깨진 병을 빈 플라스틱 상자에 넣어 치웠고, 엄마는 재빨리 물수건을 가지고 와 얼지 않은 음료병을 깨끗하게 닦았어. 다 닦은 건 아빠가 상자째 번쩍 들어 방 안으로 옮겼고, 그러면 나랑 내 동생이 마른 수건으로 다시 한번 닦았어. 엄마아빠의 목소리와 표정과 몸짓엔 심각함 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묵직한 후회보다는 산뜻한 반성이 있었어.
"얘들아, 이런 게 슬러시라는 거야, 시내에선 이렇게 음료를 서걱하게 얼려서도 팔아, 여러 맛 골고루 다 먹어볼 수 있겠다." 엄마는 생기 있게 말했어. 직선으로 말끔하게 깨진 병만 골라서 겉 부분은 크게 떠서 버리고 조심조심 숟가락으로 파먹었어. 따뜻한 아랫목에서 두툼한 이불을 덮고서,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허락한 슬러시라는 걸 먹는 기분은 생일 같았어. 평소와는 다른 날, 하면 안 되는 것 중 어떤 건 해도 괜찮은 날, 그러면서도 좋은 날. 콜라도 사이다도 환타도 어딘가 싱거워진 맛인데, 그보다는 기분이 들떠 맛있는 거 같았어.
며칠 추운 날이 이어지자 빨래가 잔뜩 쌓였어. 엄마는 조금이라도 빨아야겠다며 개울에 빨래를 하러 간다고 했어. 나도 같이 한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럼 동무만 해달라고 했어.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엄마를 따라서 장갑을 챙겼어. 따뜻한 손가락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끼는 거라 장갑을 두 개 챙겼어. 엄마는 개울가 가장자리에 두껍지 않게 언 얼음을 깨고 거기서 빨래를 시작했어. 나도 엄마를 따라 그대로 했어. 그런데 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차갑더라. 그대로 얼음이 되는 것 같았어. 난 너무 놀라서 장갑을 벗어버렸어. 엄마는 준비해 온 양동이에서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뜨고 거기에 차가운 물을 조금 섞어 내 앞에다 놓았어.
"거기 손 얼른 담가. 그러면 따뜻해져. 손 녹이고 얼른 들어가."
뜨끈한 물에 손을 담그니 손에 동글동글 이상한 느낌이 나면서 따뜻해졌어.
“엄마는 안 추워? 엄마도 손 담가.” 나는 걱정이 됐어.
“엄마는 아직 괜찮아.” 엄마는 웃었지만, 곧 엄마도 뜨끈한 물에 손을 담가야 했어, 점점 더 자주.
아빠는 추운 날씨로 일어난 마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젊은 사람이었어. 엄마는 혼자 따뜻한 방에서 가만히 있기가 마음에 걸렸던 걸까?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이렇게 추운데 왜 빨래를 하냐며 놀랐고 엄마는 그제야 손이 너무 시리다고 우는 소리를 했어. 아빠가 왔으니 나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뒤에서 엄마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렸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엄마랑 아빠는 투닥투닥하며 한참을 웃었어. 그래서일까, 나는 어려울 때도 어려운 줄 몰랐고 힘들 때도 힘든 줄 몰랐고, 고생이 고생인 줄도 몰랐던 거 같아.
어딘가 이런 기억들이 들어있어서, 나쁜 건지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힘들 거나 속상할 때도 거기 떨어진 반짝이는 조각을 건져내곤 해. 정서라는 건 기억을 먹고 크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 어떤 식으로든 영혼에, 꿈에 스미게 될 것을 알아. 나도 아이에게 그런 걸 주고 싶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따뜻하고 웃음이 나는 마음과 심해 속에서도 반짝이는 조각을 찾을 수 있는 눈을,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