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가 만남으로 이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하루는 틴더에서 너무나 전형적인 대화들을 했다. 안녕, 너 귀엽다, 너도 귀여워, 헤헤 고마워, 너는 어떤 음악 좋아해? 좋아하는 스포츠 있어? 같은 거. 덕분에 나는 리암이 힙합과 풋볼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리암은 내가 록 음악을 좋아하고 풋볼은 경기는커녕 공조차 봐본 적 없다는 걸 안다. 데이트 전에 이런 정보가 왜 필요한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다른 하루에는, 그러니까 오늘. 바로 한 30분 전. 리암이 먼저 핸드폰 번호를 물어봤다. 메이랑 같이 백 분 토론을 하며 답장을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 나 너랑 틴더에서 이야기하기 싫은데,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어?
“아… 이 미친놈… 죽일까? 진짜?”
“아하하 지원, 진짜 웃겨. 번호 주자. 괜찮은 애 같은데.”
눈치챘겠지만 나는 좋으면 조금 폭력적으로 변한다.
- 응! 내 번호는 이거야!
다음 답장은 틴더가 아니라 문자로 왔다.
- 번호 알려줘서 고마워 :) 그럼 이제 언제 만날지 정해볼까? ;)
“지원 지원. 나 주말에 본가 가잖아. 토요일에 만나.”
“메이, 모르는 남자를 집에서 만나라 이거야? 미쳤어?”
“밖에서 만나서 괜찮으면 데려오면 되지. 왜 이래 어른들끼리!”
“몰라. 아. 그래도 일단 토요일 괜찮다고 할까 봐. 일요일 밤에는… 에이미 올 수도 있으니까…”
“이거봐. 데리고 올 생각 만 퍼센트 있으면서!”
“아 좀 닥쳐봐.”
- 음… 토요일 어때? 나는 토요일 오후부터 시간 돼.
- 나도 토요일 좋아. 7시에 데리러 갈까? ;)
아무튼 여기까지가, 간단한 상황설명 되시겠다.
- 데리러 올 필요는 없고,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 이따가 주소 보내줄게.
“메이. 급찐급빠 디톡스 시작이다. 말리지 마.”
아, 남자 때문에 굶던 날들 진작에 끝난 줄 알았는데. 쪽팔려.
*
이제 5분 후면 리암이 온다. 아직 성을 몰라서 풀네임으로 부를 수도 없는 남자가 온다… 아파트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유일한 카페로. 이 미국 땅에서 차도 면허도 없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가 않다. 주차장 뷰 카페 아니면 어딘가 스산한 케밥 집.
우리의 약속 시간은 다섯 시. 구질구질한 나는 네 시 10분부터 이미 창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어이구 지원아…
- 나 도착했어! 주차하고 갈게.
리암의 문자였다. 나는 답장 대신 크게 심호흡을 했다.‘괜찮아, 할 수 있어. 왜 해야 하는 지는 뭐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할 수 있음.’몇 번 속삭이고 나니 빠르게 뛰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 순간 뻔한 디즈니 영화처럼 문이 열리고 리암이 들어오고 별빛이 내리고 하면 좀 로맨틱하기는 했을 텐데, 창문 밖으로 리암인 것 같은 남자가 이리저리 주차장을 걸어 다니는 게 보였다. 카페로 들어오는 문을 못 찾아서 빙빙 도는 거였다.
뭐야, 사람 맞구나. 그 허술함에 어쩐지 모든 게 쉬워 보이기 시작한 나는 창문을 톡톡 치면서 손가락으로 문 방향을 가리켰다.
리암은 그런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문 방향으로는 움직일 생각도 안 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손을 흔들었다. 헬로~ 하면서. 뭐야, 완전 바보 같잖아… 예상 밖의 귀여움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추악한 욕망의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꼬집고 다른 한 손으로 인사를 했다. 그제야 리암은 발걸음을 옮겼다. 환한 웃음은 내 옆에 앉을 때까지 그대로였다.
“안녕! 지,원. 만나서 반가워!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 그런데, 내가 네 이름 똑바로 발음한 거 맞아? 아니라면 미안해. 아, 혼자 너무 말했네 진짜 미안! 근데 뭐 마시고 있었어?”
“어… 안녕. 걱정하지 마. 발음 잘했어. 오래 안 기다렸고, 그냥 아이스 커피야.”
“그렇구나!”
“그래…”
인사를 나누자 숨 막히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준비해 온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리암은 무슨 생각 중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웃으며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걸 보니 불안한 건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저기, 리암, 나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응응, 편하게 해.”
“나 장기 연애를 끝낸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미국에 와서 누구랑 데이트를 해본 적도 없고, 틴더로 만난 것도 네가 처음이야. 그러니까… 꽤 서툴고 어색할 거라는 거지. 그리고, 미국 데이트 문화에 대해 들어서 알기는 하는데 완전 이해했다고 자신은 못해. 뭐, 캐주얼한 관계라든가 토킹 스테이지라든가 시츄에이션십이라던가 그런것들 있잖아. 해 본 적이 없거든. 아 마지막으로, 아직 정확히 언제가 될 지는 잘 모르지만 결국 한국에 돌아가야 할 거야. 아무튼 뭐, 그래. 이게 나야.괜찮아?”
“응,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나도 그런 거 잘 모르거든.”
리암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답했다. 어떤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냐?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네! 너 티셔츠 귀엽다.”
“진짜? 아무도 그런 말해 준 적 없는데. 고마워!”
“운전은 힘들지 않았어? 엘에이 차 막히는 거 진짜 최악이잖아.”
“네가 여기 있을 걸 알아서 안 힘들었어.”
그래,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고 쳐. 이런 말은 좀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고, 뭐 하다못해 예고장이라도 보내주고 내뱉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푸흡… 영광이네.”
“정말이야. 너를 만나서 진짜 기뻐. 너 프로필에도 써있었잖아, 곧 한국에 돌아간다고. 그 전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아 진짜 적당히해!”
“미안, 너무 부담스러웠지.”
“어, 우웩. 이미 만났으니까 그런 멘트 안 해도 돼. 역하다 역해.”
“한 번 더 부담 줄게, 나 우리가 완전 잘 맞을 거라는 거 알겠어. 너 짱 재밌다.”
느끼한 멘트이기는 했지만 리암의 예측이 맞았는지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얼마나 부드럽게 이어졌냐면,
“카페 너무 시끄럽다. 우리 집 바로 이쪽 뒤편인데, 같이 갈래?”
“어? 어, 응. 그럴까. 아니, 그럴까가 아니고. 그래! 너무 좋아.”
“너무 좋아하지는 말고…”
“미안…”
“미안해하지도 말고… 가자. 짐 챙겨.”
리암은 후다닥 짐을 챙기더니 문을 잡아주러 달려갔다.
“하하. 고마워.”
“얼마든지야. 내 차는 저거야. 아까 봤겠지만…”
“응, 아주 잘 봤지.”
리암의 차는 깨끗했다. 딱히 장식 같은 건 없었다.
“아파트까지 5분이면 가. 그냥 저 큰길에서 좌회전하고 쭉이거든.”
말하고 나니 문득 메이의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빨리 데리고 갈 줄은 몰랐는데… 아니 근데, 데리고 가서 뭐하냐. 진짜 미쳤지. 어떻게든 나를 죽여버리려는 미치광이 살인마일지도 모르는데. 선량한 연기를 하는, 숨 막히게 잘생긴 살인마… 그 순간 내가 메이의 문자를 계속해서 씹고 있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 지원, 어때? 만났어? 맘에 들어?
- 안녀어어엉? 어때? 사진이랑 똑같아? 같이 셀카 찍자고 해. 실물 궁금해 죽겠다.
- 지원, 살아있는 거지? 아직 카페야? 집 가는 거면 가기 전에 꼭 말해!
- 야! 죽지마!
귀엽긴, 나는 웃으며, 그리고 핸드폰 화면을 살짝 숨기며 타자를 쳤다.
- 잘 살아있음, 이제 집 가는 중, 살인마는 아닐 것 같지만 혹시 내가 두 시간 후에도 연락이 없다면 9.11을 불러주길 바람, 장례식은 최대한 화려하게.
*
...결론부터 말하자면 끝장을 보지는 않았다. 첫 만남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고? 메이한테 너무하다 뭐라 했지만 나도 그 ^유교걸^은 못 되나보다. 일단 같이 아파트에 들어갔을 때부터 공기가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해야 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리암, 영화, 영화 볼까?”
“응, 좋아. 넌 어떤 영화 좋아해?
“나는 솔직히 그냥 유치한 거. 거대 자본이 찍어내는 영화 좋아해. 나 약간 웃어라! 하면 하하하 웃고, 울어라! 하면 엉엉엉 우는 스타일이거든.”
“하하. 나도 그래.”
사실 무슨 영화를 트는 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쯤은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리암이 먼저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노트북을 들고 리암 옆으로 향했다.
“이거 틀게?’
“응.”
그 순간 리암은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나는 진짜 개 없어 보이게 기겁을 해버렸다.
“허으어억.”
“헉, 미안해!”
리암은 재빨리 팔을 뺐다.
“아니, 아니. 미안. 미안해하지 마. 싫은 게 아니라, 이런 게 너무 오랜만이라 놀라서 그랬어.”
나는 리암의 기다란 팔을 당겨 내 어깨에 둘렀다. 남자애가 무슨 손목이 나만 하니, 생각하면서. 영화는 신 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화면에 집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것 같은 남자애가 옆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리암의 가슴 쪽에 머리를 기댔다. 미치게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전해져왔다.
“너 심장 박동 느껴진다.”
“...빨라?”
“너 뭐 고지혈당이나 부정맥 같은 거 없지?
“응 없지…?”
“그럼 빨라. 네 심장 박동.”
뭔가 로맨틱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되게 이상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침묵 속에서 리암은 무슨 물풍선 만지듯 조심스럽게 내 볼에 손을 올렸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게 닿은 건 입술이 아니라 리암의 뾰족한 코였다.
“너… 코 짱 크다.”
리암이 대답할 틈은 주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한껏 꺾고, 그 커다란 코가 눌리는 것 쯤이야 괜찮다고 생각하며 입을 맞췄다. 리암의 손은 내 볼에서 목 뒤로 향했다. 한참 지나자 고개가 살짝 저려왔다. 코 높은 애랑 하는 키스는 이런 거구나. 그러고보니, 나 아직도 얘 풀 네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