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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공책 Oct 12. 2024

1. 틴더 탐사대

 언젠가 너와 함께 윤슬을 바라본 적이 있다. 혹등고래를 찾으러 간 날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바다는 모른 체하고 굳이 작은 반짝임들에 집중하기로 한 날. 


"리암. 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을, 한국말로는 윤슬이라고 해. 따라 해 봐, y-o-o-n, s-e-u-l." 


 그리고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윤슬에 대응하는 영어 단어를 찾지 못했을 때, 나는 덜컥 두려웠던 것도 같다. 너에게 안겨주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이렇게 흐릿해지겠구나. 내가 쌓아온 이 구질구질한 언어들이 너에게는 꽤 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구나. 


 침묵 속에서 너는 내 손을 고쳐 잡는다. 햇빛 아래에선 정말이지 보석같이 빛나는 연두색 눈동자로, 내 짙은 갈색 눈동자를 꿰뚫어 본다. 그 눈 맞춤 한번에 직전의 모든 좌절들은 증발해버린다. 내가 너를 보지 않을 때에도 너는 나를 보고 있다. 아, 너는 아는구나. 말하지 않아도 아는구나. 너는 나를, 너만은 나를 알아보는구나. 


 그 순간 알았다. 일기장에서도 욕심낼 수 없었던 사랑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갈색 머리를 동여매고, 초록색 눈을 뜬 채로 여기에. 


 …뭐 여기까지는 좀 폼 줘서 말한 거고, 사실 제일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이거다.  


나, 진짜 얼빠구나.



*



“꺄아아악!”

“야! 으아아! 놀랐잖아!”


 메이의 비명에 놀란 나는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리암의 문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갑자기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메이, 나 진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만나는 거지. 축하해 지원?”

“아… 다시 봐봐. 아니, 진짜 온대? 미친거 아냐? 나 어떡해.”


 메이는 배꼽이 빠져라 웃으며 핸드폰을 주워왔다. 


“봐. 여기 똑바로 써있잖아.”


- 나도 토요일 좋아. 7시에 데리러 갈까? ;) 


 회색 아이메시지가 내 화면에 그대로 있다. 느글거리는 윙크 이모티콘까지 그대로다. 아니, 다시 읽어도 믿어지지가 않는데. 이게 맞아? 하지만 이건 꿈도 아니고 허접한 로맨스 스캠도 아니다. 이 드넓은 미국 땅에서 내가 드디어, 데이트라는 걸 해보는 거다. 그것도 당장 이번 주 토요일에.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 심지어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 내가! 모르는 남자를! 대체 무슨 배짱이었어 지원아? 그것도… 심지어. 아, 말하면서도 쪽팔리네. 틴더로 알게 된 남자를. 


침묵을 뚫고 메이가 묻는다.


“어이. 지원, 무슨 생각해?”

“...이틀만에 -3kg 가능?”


 메이는 내가 엘에이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이자 룸메이트다. 룸메이트라고는 하지만, 공유하는 건 부엌이랑 거실이 전부다. 아, 이 아파트에는 총 세 명이 산다. 나, 메이, 에이미. 에이미는 나랑 방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진짜^ 룸메이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미는 매주 목요일에 남자친구 집으로 갔다가 화요일은 돼야 돌아와 버려서 아직까지도 친해지지 못했다. 뭐, 방을 자주 비워주니 룸메이트로서는 최고라고 해야지. 그리고 메이는 개인실을 쓴다. 여기 애들 표현으로는, “럭키 덕(lucky duck)", 그러니까 운 좋은 오리인 셈이다. 왜 하필 오리야?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리암 얘기를 하려면 일단, 틴더를 깔았던 날의 얘기부터 해야겠다. 내가 틴더를 깐 건, 아니 우리, 그러니까 나랑 메이가 틴더를 깐 건 대략 2주 전의 일이었다. 선량한 한국인으로서 세종대왕님께 맹세코 약에 손은 대지 않았지만, 역대급으로 취해있긴 했던 것 같다. 


 첫 병을 딴 건 3년 반을 만났던 전남친에게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미국에 갈 거라며 이별을 고했을 때에도 끝까지 괜찮다며 내 편을 들던 사람이었다.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그냥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진짜, 두 번째 병을 땄을 때까지도 괜찮았다. 센치했을 뿐 멀쩡했다.


 “메이, 걔를 생각하면… 그래. 내가 어디서 또 그런 사랑을 받아볼까 싶었어. 다시는 그런 사랑을 못 받을 것 같아서 이별이 무서웠던 거야. 그런데 이제 알겠어. 그런 사랑, 내 인생에 다시 받지 못해도 괜찮아. 나는 내 인생을 위해 떠나야만 했고… 무엇도 나보다 소중하지 않잖아. 그치? 어때, 걸 파워.”


 세 번째 병에서 멈췄어야 했다. 그 후로 몇 병이 이어졌는지 기억이 안 나니까… 아 지겨워, 어쩜 스물여섯인데 스무 살 때랑 크게 달라진 게 없을까. 


 “지원, 너한테 지금 뭐가 필요한지 알아?”

 “...알면 이러고 있을까?”

 “핫 눈 맞춤. 아이 캔디. 원 나잇 스탠드. 너는 새로운 남자가 필요해! 너를 다시 열일곱 소녀로 만들어버릴 남자! 바라만 봐도 좋은 그런 거 있잖아. 뭔지 알지. 성격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그런 건 신경 쓸 틈을 주지 않는, 얼굴 하나로 모든 걸 아득하게 만드는 그런 남자 있잖아!”

 “그런 남자가...있어? 난 딱히 본 적이 없는데.”

 “있지 그럼! 왜 없어 이 넓은 땅에! 그리고 그런 남자를 찾으려면 가장 쉬운 방법은 뭐다?”

 “틴더?”

 “그래, 틴더!”  

 “아. 정말 미국인 같은 발상이다, 메이.”

 “그치만 우린 지금 미국에 있는 걸.”

 “그러네. 인정.”


 메이의 가족들은 메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다. 그리고 메이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중국에 돌아가지 못했다.“괜찮아. 그래서 영어 잘하잖아.”하며 웃던 메이. 우리는 낄낄 웃으며 틴더를 깔고 프로필을 등록했다. 이질적이게만 느껴지는 얼굴들이 계속해서 화면을 가득 채웠다. 티셔츠를 입지 않은 남자들 사진에 익숙해지는 건 꽤 순식간이었다. 


“꺅! 얘는 반경 1km 안에 있다. 백퍼센트 우리 학교일거야. 근처 기숙사에 있나봐.”

“아, 진짜 최악이다.”


 왼쪽으로 넘기면 좋아요, 오른쪽으로 넘기면 싫어요. 서로의 좋아요가 통하면, 매치! 하지만 그날 밤 우리가 “축하합니다! 매치 되셨습니다!”같은 성대한 화면을 보는 일은 없었다. 내 손가락이 왼쪽으로 향할 만큼 구미가 당기는 남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어라? 하는 남자들이 있어도 메이의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다. 메이의 이유는 다양했다


“안돼. 뭔가 설명할 수는 없는데 변태 같애.”

“얘는 마마보이일 거야. 완전 뻔해.”

“진지한 관계만 찾는다고? 구라 같은데.”


 나를 어딘가 찝찝하게 한 건 매치가 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대화도 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메이,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해.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얘기를 해야 하고. 그런데 얘기를 하려면 얼굴만 보고 좋아요를 눌러야 해. 아, 너무 이상해”

“이상하지? 괜히 죄책감 같은 것도 들고? 지원, 그거 딱 이틀 갈 거야. 이틀 지나잖아? 슉슉, 프로 넘김이가 될 거야. 1분에 20개도 넘길걸?”

“메이, 그냥 네가 넘겨주라. 지친다 지쳐.”

“오키. 아 지원, 너 프로필에 몇 달 후면 한국에 돌아간다는 내용, 추가해도 돼?”

“그래. 근데 이러면 아시안 페티쉬 변태들만 더 달라붙는 거 아니야?”

“그건 틴더를 깐 이상 어쩔 수 없어.”

“역시 잘 아네.”


 메이는 틴더로 만난 남자와 1년을 만났다가 최근에 헤어졌다. 


“근데 지원, 이러면 남자애들 고정 멘트가 뭔지 알아? 내가 네 영어 선생님이 되어줄게~ 이거야. 내기해도 돼. 나는 이제 중국에서 산 시간보다 미국에서 산 시간이 더 긴데도 저 멘트 엄청 받았다니까? 병신들.”

“흡...미안. 메이. 근데 난 영어 선생님 필요하기는 해.”


 메이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볼에 입을 맞췄다. 술에 취한 볼은 뜨거웠다.


“지원! 내가 있잖아! 너만의 영어 선생님!”

“그래, 그래. 네가 있는데 내가 뭐가 더 필요하겠니.”


 이상이 틴더를 깔았던 첫날밤의 이야기. 그리고 메이의 예상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아서, 얼굴만 슥 보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튕기는 일은 이틀 만에 익숙해졌다. 엄지 하나에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은 너무나 편리한 도피처이자, 도파민 충전소였으니까. 


*


 몇 개의 매치는 있었지만 이렇다 할 진전은 없이 일주일이 지났다. 


- 근방 3km 안에 당신을 좋아요 한 프로필이 99+개! 지금 멤버십에 가입해 미래의 짝을 확인해보세요! - 


 죽었다 깨어나도 날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남자들이 화면 속에서 환히 웃고 있을 걸 생각하니 이 모든 게 거대한 장난 같기도 했다.


“메이. 나 틴더 못해 먹겠는데.”


 겨우 눈을 뜬 아침, 공용 부엌에서 부지런히 무언가 만들고 있는 메이에게 말했다.


“음, 그럼 춤추러 가자. 틴더말고도 웃을 일은 많아.”

“그럴 기분 아니야. 으으. 메이, 다시는 술 안 마신다고 말한 지 열흘도 안 됐다.”

“난 언제나 춤출 기분인데!”


 메이는 요리를 멈추고 스포티파이를 켰다. 이어서 Tinashe의 Nasty를 틀더니 리듬을 타며 다시 프라이팬 앞으로 향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메이와 같이 엉덩이를 흔드는 것 뿐이다. 캘리포니아 흥을 당해낼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걸 진작에 배웠다.


 그리고 틴더를 깐 지 정확히 12일째 되던 날 리암의 프로필을 봤다. 정확히 말하면 그 프로필에 적혀있던 인용구를 먼저 봤다. 시 창작 수업에서 배웠던 시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beauty and terror.

Just keep going. No feeling is final.

Don’t let yourself lose me.

Nearby is the country they call life.

You will know it by its seriousness.

Give me your hand.”*


 괜히 소리 내 또박또박 읽었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온 이후 배운 시들 중 가장 좋아하는 시였다. 


“모든 게 네게 일어나게 둬 : 아름다움 그리고 두려움. 그냥 계속 해. 어떤 감정도 끝은 아니야. 네가 나를 잃게 두지 마. 이 근처가 바로 그들이 삶이라 부르는 나라야. 그 심각함에 넌 알 수 있을 거야. 네 손을 줘.” 

 이게 바로 운명이라는 걸까? 드넓은 틴더 판에서 영혼의 파트너를 찾아낸 건가 내가? 순간 취해버릴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그래, 지원아 침착해. 아직 등록된 사진들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눈을 떠 사진들을 넘기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는 감탄이 새어나왔다.


“아 미친… 진짜 탐스럽다…”


 어디선가 봤던 명언이 저절로 생각날 정도였다.“외면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내면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리암은 완벽한 내 타입이었다. 마르고, 어쩐지 병약해 보이고, 복슬복슬한 갈색 긴 머리, 동화 같은 초록빛 눈, 창백한 흰 피부와 대조되는 어딘가 붉은 눈가. 


 어릴적부터 온갖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볼 수 있는 미드와 영드는 모조리 도장 깨기 해온 나에게 자리 잡은 가장 큰 취향은 바로 병약미였다. 아 그냥, 지켜주고 싶은 남자. 나 때문에 울기라도 하면 세상을 다 안겨주고 싶을 것 같은 그런 남자 있잖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얼굴 봤으면 다 본 거다 싶을 만큼... 리암은 나의, 소위 말하는 “드림 보이”였다. 


 매치는 순식간이었다. 내가 왼쪽으로 스와이프, 그러니까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바로! 


- 축하합니다! 매치 되셨습니다! 먼저 대화를 시작해보세요! - 


“미친. 미친. 미친.”


 나는 핸드폰 화면을 붙잡고 메이를 찾아 거실로 나갔다. 


“메이! 나, 나, 찾은 것 같아. 그니까, 그런 남자.”







*Rainer Maria Rilke의 시“Go to the Limits of Your Longing”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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