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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공책 Oct 12. 2024

3. 분홍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다 말해봐.”

“좀 진정해 메이. 키스가 끝이야. 네가 기대하는 소식 같은 거 없어.”

“...키스를 그렇게 오래 했다며. 뭐 손은 가만히 있었어?”

“...좀 더듬긴 했어.”

“꺅!!!”

“내가… 걔를…”

“아…”

“응…”


 메이의 기대를 충족 시켜주기엔 나도 아직... 유교걸이었다. 


“그나저나 지원, 여행 준비는 어떻게 되가? 내일 몇 시 비행기랬더라?”


 나는 이번 주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혼자, 캐년 패키지 투어에 가기로 했다. 그랜드캐년, 엔텔롭캐년, 모뉴먼트 밸리 등등, 멋지고 웅장하다는 곳들은 죄다 가 볼 예정이다. 이런 패키지 투어들은 대부분 라스베가스에서 시작해서, 엘에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가스로 가기로 했다. 


“저녁 8시. 뭐 준비할 것도 없어 이번엔. 그냥 백팩 하나에 짐 가득 담으면 끝. 나머지 3박 4일 동안은 그냥 끌려다니는 거야. 자유의지 같은 거 없이.”

“그래도~ 너무 좋겠다! 나도 아직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그 엄청나다는 그랜드 캐년.”

“근데 난 두 번째잖아.”

“그러니까! 불공평해! 나도 데리고 가.”

“백팩에 들어가 봐. 그럼 들고 갈게.”

“엿 먹어.”


 메이는 양손을 치켜들며 웃었다. 


“그나저나, 그러면 이번 주에는 리암 못 만나겠네?”

“뭐 그렇지.”

“보고 싶어서 어떡해. 지금이 딱 불꽃 튈 때잖아. 걔가 다음에 언제 보자 이런 말 했어?”

“아니 안 하기는 했는데… 나 여행 가는 건 알아.”

“절대 네가 먼저 다시 만나자고 말하지 마. 그건 걔한테 맡겨야 돼. 무조건! 아, 다시 만나고는 싶은 거지?”

“당연하지. 아직 양기가 더 필요해, 나.”

“흠. 양기 있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던데.”

“그게 내가 원하는 양기야. 나 이제 짐 싸러 갈게 메이. 에이미 오기 전에 끝내고 싶어.”


 커다란 갈색 백팩 안에 가장 먼저 담은 건 하프 필름 카메라. 필름 하나를 자동으로 반으로 나눠 찍어주는 카메라다. 그러니까, 36롤 짜리 필름을 사면 내 카메라에는 72롤이 찍히게 되는 거다. 나는 이 카메라를 보물처럼 들고 다니며 세상을 담아왔다. 남은 컷 수가 50장이 넘어가도 쪼다처럼, 함부로 셔터를 누르지 않으면서. 이 필름에는 소중한 것들만 담겨야 했다. 사랑하는 거, 상처 받을 가치 있는 거. 


 다음으로 챙긴 건 보조 배터리, 여권, 그리고 멀미약. 이 세개를 챙겼으니 필수품은 다 챙긴 거다. 옷은 빈티지 샵에서 산 멜빵 바지 하나와 찢어진 청바지 하나를 이리저리 돌려 입기로 했다. 인생샷을 건지러 가는 여행도 아니었기에 별문제 될 건 없었다. 


 나는 어느새 떠돌아다니는 삶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고, 이 백팩 하나만 있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도 돌아갈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랜드캐년은 4년 전에도 갔었다. 스물한 살이었나, 두살이었을 때. 그때는 내가, 다시는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남자가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배우고, 처음으로 내 손으로 그 줄을 끊어냈던 때였다. 그때 내 세상은 너무 크게 흔들리고 있었어서, 서 있으면 오히려 멀미가 났다. 세상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그 당연한 이치가 그때의 내겐 너무 잔혹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러니까, 그때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남자랑 헤어지고 만났던 남자랑도 헤어지고 새로운 남자랑 줄타기 중인 지금은...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안다. 세상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투성이고 그래도 괜찮다. 


 사랑 중독이라는 천성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사랑을 선택했다. 나 혼자서도 진정으로 괜찮구나 느꼈을 때 번쩍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짜 강한 건… 누구의 손도 잡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손 잡을 상대를 내 손으로 고를 수 있는 거구나.’


 그때 들리는 띵동 소리.


- 여행 기대되겠다 :) 준비는 잘 돼 가?


리암의 문자다.


- 응응! 엄청 기대 중이야.

- 사진 많이 찍어서 보여줘! 사진엔 안 담기겠지만

- 안 담기겠지만 그럴게. :)


 문득 추가된 걱정거리. 난 이번 여행에서 네 생각을 얼마나 하게 될까. 나는 아직 네 꿈도 과거도 제대로 모르는데.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데.  

 사춘기 때에서 나아진 게 없는 나의 이 과대망상과 낭만을 향한 도 넘은 집착은 우리를 계속해서 ‘우리'로 만들려고 한다. 언제 떠나야 할 지 모르는 미국 땅에서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욕심이다. 나는 괜히 너를 밀어내볼까 생각한다. 적어도… 자려고 누우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이 미니 시리즈에서만큼은. 


*


 패키지 투어 집결지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커다란 호텔 앞, 집결 시간은 새벽 5시다. 어젯밤 비행기를 타고 6인 1실 호스텔에 도착했던 때가 막 자정이 다 돼가던 시간이었으니까… 네시간 정도 잤다고 해야 할까. 


 잠에서 덜 깬 채로 가이드님의 픽업을 기다리며 곧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해 상상했다. 나 빼고 한 팀이면 조금 웃기겠다, 생각하던 때 누가 봐도 한국인 투어 차량으로 보이는 커다란 스타렉스가 보였다. 그 차에 올라탄 건 내가 마지막이었다. 


“안녕하세요!”

“짐 그거 백팩 하나에요?”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 가이드님이 차에서 내리며 인사 대신 묻는다. 


“네!”

“이야, 간단해서 좋네!”


 차에는 나 말고 9명이 더 있었다. 커플 한 팀, 네 명으로 된 친구들 한 팀, 중년 부부 두 팀. 가이드님은 예상했듯 자기소개를 시키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의 형식은 뻔했다. 이름, 나이, 직업 나열하기.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원입니다. 스물 여섯살이고, 아직 학생이에요.”

“어머, 그나저나, 여자 혼자 여행 온 거에요?”


 중년의 아주머니가 못 참겠다는 듯 물으셨다. 


“어, 뭐 그렇죠? 헤헤. 근데 지금 엘에이로 교환학생 와서, 학교 다니고 있었어요.”

“어머 정말? 우리 딸도 교환학생 가고 싶어 하는데. 언제까지 있는 거야?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됐구?”

“온 지는 이제 반년 좀 넘었어요. 언제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몇 달 후면 학생 비자는 끝이 나긴 하는데, 그 전에 인턴십을 구해서 반년 정도 더 지내는 게 목표거든요.”


 투어의 시작은 눈이었다. 봄에 눈이라니 싶었지만, 산간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랬다. 가이드님은 내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아무것도 안 보일 수도 있겠다며 사과하기 바쁘셨다. 가이드님이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었는데. 혼자 멍하니 바라본 창문 밖은 안개가 가득했다. 


 우리가 아는 그랜드캐년 국립공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참 차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가는 내내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고, 스트리밍 되던 노래가 중간에 뚝 끊기기 시작했다. 싸구려 요금제 탓이었을까 전파가 잡히지 않기 시작한 거다. 


 이리저리 헤매다 음악 어플 보관함에 들어가 보자 저장한 기억도 없는 노래 세 곡이 있었다. 언제 즐겨 들었는지도 잘 기억 나지 않는 노래들. 


 너는 절대 이 노래들을 모르겠지, 문득 생각했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지만 기적은 없었다. 눈은 계속 내렸고 안개는 자욱했다. 가이드님의 목소리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 한 시간 드립니다, 사진 찍는 거 조심하세요 여기서 떨어지면 시체도 못 찾아요, 너무 걸어도 볼 것 없어요 멀리 가지 마세요, 눈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안개도 껴가지고 뭐 제대로 안 보이겠지만 그래도 고산지대 날씨는 워낙 예측 불가니까 끝까지 봐보자구요. 자자 해산!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같은 건. 모든 게 보여도 내 위치를 모르겠는 때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다. 그게 이 공간의 힘이고 혼자 떠나온 길의 힘일 테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돌 하나를 골라 앉았다. 눈보라와 안개 사이 숨어있을 거대한 암석들의 숨소리를 느꼈다. 내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소리들을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눈보라 치는 소리,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소리, 내 숨 소리 같은 것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꽤 신성해. 이 거대하고 엄청난 시간의 덩어리 앞에서 딱 한 번 만난 남자애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이 순간의 감각이 영원할 건 알겠는데, 너는 영원일지 순간일지 아무도 모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분홍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 하는 순간 분홍색 코끼리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이 순간 너를 기억해 버렸으니까. 혼자된 이 아름다운 곳에서 너를 떠올리는 게 싫고, 습관적인 망상으로 너와의 모든 미래를 계획해 버리는 내가 밉지만 왜일까, 이번만큼은 다를 것 같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하는 진짜 멍청한 기대를 한다. 대체 내 삶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달라져야 하길래. 


 전파는 여전히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문자 앱을 열어 타자를 친다. 이 감정은 절대 숨기지 말아야지 다짐했으니까. 


- 리암 안녕. 나 지금 그랜드 캐년에 있어. 아직 이런 말 하기 너무 이르다는 거 아는데, 지금 네가 보고 싶어. 그냥 그래. 


그리고 띠링, 거짓말처럼 전파가 잡히고 문자는 간다. 


그날 밤 도착한 답장은


- 공항으로 데리러 가도 돼?


…이 남자, 진짜일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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