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착륙했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 이름 써진 종이 같은 거 들고 있으면 도망쳐버릴 거야.
- 종이 버리고 올게… :(
한 번 만난 남자가 공항으로 데리러 왔다. 자존심 상하게 여행 내내 공항으로 올 리암을 상상했다. 아니, 그런 리암을 만날 내 모습을 상상했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 영화처럼 리암! 외치면서 와락 끌어안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근데, 어느 여자가 상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보고 싶다는 때 이른 말 한 마디에 공항으로 데리러 온다는 남자? 정말이지 티비 드라마 속에나 있는 줄 알았단 말이야.
내 등보다 커다란 백팩을 둘러메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향한 곳은 화장실. 막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풀메 상태인 것도 웃긴 것 같아서 따로 화장을 하지는 않았다. 톤업 선크림에 틴트로 합의… 봤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찝찝해서. 눈썹이라도 그릴까 하다가 그냥 틴트만 덧발랐다. 핸드크림도 살짝 바르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자마자 리암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활짝 웃으며 크게 손을 휘젓고 있었다. 손에 사인은 없었다.
“지원! 안녕! 무사히 돌아왔네!”
리암은 내가 내 몫의 어정쩡함을 발휘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왜일까 그 품이 순간 집처럼 느껴진 건.
“리암! 데리러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리암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명치 쪽에서 샌달우드 냄새가 났다.
“아니야. 데리러 올 수 있어서 내가 기뻐. 나, 네가 그렇게 문자해줘서 정말 좋았어.”
리암은 이내 제 두 손을 모아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어딘가 멍해져서 리암의 눈을 바라봤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리암의 오른쪽 눈알에 있는 작은 점을 바라봤다. 정말이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심장이 저릿했다. 불안장애 약을 안 먹은 지 일주일이었다.
“괜찮아?”
리암이 물었다. 또 한 번,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나 네 성을 몰라.”
“응?”
“네 성, 모른다고. 안 물어봤고, 안 말해줬잖아.”
왜 갑자기 약을 안 먹기 시작했냐면, 빨래를 개는 내가 너무 평온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슬픔도 불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막 행복하지도 않았다. 너무 편안한 감정이었다. 병신 같이 들린다는 거 안다.
몇 년간 습관처럼 약을 삼키면서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상해 왔다. 언젠가에도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다 생각했지만... 어떤 날에는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멈췄다. 모든 감정을 똑바로 느끼고 싶었다. 내내 불안해도 되니까, 행복할 때 맘껏 행복하려고. 슬플 때 제대로 슬프려고.
“미들네임 정도였으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나 네 성을 몰라. 그래서 어제 잠을 못 잤어. 네 성이 궁금해서. 성도 모르는 남자 때문에 심장이 너무 뛰어서.”
리암은 내가 이러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답했다.
“넬슨이야. 리암 넬슨.”
“N,E,L,S,O,N, 맞아?”
“응 맞아. 근데, 너만 내 성 모른 거 아니야. 나도 네 성 모르잖아.”
“맞아. 원이야. 지원할 때 원. 그러니까, 한국식으로는 원지원인데… 미국식으로는 지원 원이지.”
“원이 두 번이네. Won… 이름에 승리가 두 번이나 있어. 멋지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렇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내가 진짜로 지금 이곳에, 살아서 있구나.
너한테 영원히 하지 못할 말들을 삼킨다. ‘너 때문에 약 안 먹고 버텼어.’ 같은 말들.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고작 이런 걸 자랑이랍시고 들어야 할 일도 없을 테니까. 또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머지않은 미래의 내가 엉엉 울어야 하는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서 좋아. 적어도 지금은 그래. 눈을 똑바로 떠야 돼. 외면하면 안 돼. 도망쳐도 되는 일과 마주해야 하는 일은 분명 달라. 내 심장 박동을 느껴야만 하는 때는 분명 있어.
그러니 이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봐야 할 때다. 주먹에 힘을 꽉 쥐고 묻는다.
“리암, 나 너희 집으로 가도 돼?”
*
“자, 들어와.”
“안녕하세요!”
“하하하, 아무도 없어.”
리암의 집에 왔다. 정말로, 3주 연락하고 두 번 만난 남자 집에 내 발로 걸어들어왔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내가 오겠다고 한 거지만…”
“네가 오겠다고 안 했어도 꼭 초대했을 거야.”
리암의 집은 커다란 원룸이었다. 벽은 남색, 방 한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파티션이 자는 공간과 생활 공간을 나누고 있었다. 넉넉한 크기의 방에 비해 침대는 작았다. 슈퍼 싱글 정도.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 심리학 전공 서적들이 빼곡했다.
“심리학과 남자라니, 완전 레드 플래그잖아.”
“맞아, 얼른 도망쳐. 헤헤.”
“심리학 공부, 재밌어? 나는 전에 교양 수업 하나 들어본 게 전부인데… 진짜 몇 개 빼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뭐가 기억 나?”
“음… 그냥 뻔한 거 있잖아. 애착 이론 같은 거. 아, 교수님이 조금 특이하셨어서 무슨 설문조사 같은 걸 했었어. 사랑에 빠지는 질문들 뭐 이런 거였는데.”
“나 그거 뭔지 알아. 아서 아론의 36가지 질문들, 맞지?”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그거 맞는 거 같아.”
리암은 갑자기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해볼래?”
“응?”
“해보자. 사랑에 빠지는 질문들.”
나도 리암을 따라 침을 꿀꺽 삼켰다. 바보처럼, 그 질문들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 오늘 밤 정말로 사랑에 빠져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나는 결국 떠날 거고 너는 계속 여기 남을 텐데.
“...하기 싫어?”
“아니. 해보자.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것 같아.”
“질문지 프린트 해올게. 이런 건 꼭, 종이로 해야 느낌 있잖아.”
*
“자, 첫 번째 질문이야. 이 세상에 아무나랑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 누구를 고를 거야?”
“...테일러 스위프트. 리암은?”
“죽은 사람도 돼?”
“된다고 치지 뭐.”
“그럼… 존 레논.”
“왜?”
존 레논이라니,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라 나는 왜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리암은 씩 웃으며 물었다.
“나 갑자기 노래해도 돼?”
“너 진짜 이상해.”
리암은 이상하다는 나의 핀잔이 곧 예스임을 안 다는 듯, 존 레논의 “Imagine”을 부르기 시작했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나는 눈을 꼭 감고 리암이 내뱉은 가사에 대해 생각했다.
"상상해 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걸, 상상해 봐. 나라라는 건 없다고,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어려운 일인 걸 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
“7번 질문이야.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직감이 있나요?”
나는 리암의 질문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어디까지 말해도 괜찮은 걸까. 그런 선이 정말 있는 걸까?
“음, 솔직하게 답 하기로 했으니까 말해주자면… 솔직히 한 3,4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내 손에 죽을 거라 확신했었어. 손목을 긋든, 목을 매든, 뭐 그런 식으로. 근데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그냥… 직감은 없고, 너무 추하게 죽지만 않으면 좋겠다 싶어. 뭐야, 슬픈 표정 하지 마!”
“너, 진짜 강하구나.”
리암은 조용히 내 눈썹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진짜 강해."
“맞아, 나 강해. 알면 알수록 깜짝 놀랄 거야.”
*
“11번, 이거 진짜 어렵겠다. 4분 동안 생각한 다음, 당신의 인생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할 수 있겠어?”
“그럼. 솔직히 나는 4분까지 필요 없어. 지원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딱히 자세히 설명할 게 없거든. 지금 당장도 할 수 있어.”
“그럼 너부터 해봐.”
리암이 요약해준 그의 인생은 이렇다. 캘리포니아 교외 마을에서 태어남, 이 마을 밖으로 이사한 적 단 한 번도 없음, 캘리포니아 밖으로는 여행도 가본 적 없음,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대학교까지 같이 감, 엄청난 ^정상 가족^, 엄마 아빠랑은 사이좋고, 형이 한 명 있지만 그닥 친하지는 않음, 고등학교 1학년 때 기타를 독학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치는 중, 그 외 취미는 컴퓨터 게임, 심리학 전공 중이지만 졸업해서 뭘 할지는 잘 모르겠음. 끝!
“난 딱히 자랑할 게 없어.”
리암은 끝이라 말하며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재밌었어.”
“이제 네 차례야.”
내가 요약한 내 인생, 리암보다 딱 2년 더 산 내 인생은 이렇다. 제주도에서 태어남, 10살 때부터 13살 때까지는 뉴저지 사는 미국 이모네 집에 혼자 얹혀 지냄, 이때 배운 생존 영어로 지금까지 사는 중, 그 이후로는 쭉 제주도에서 자람, 음악 한다고 나대다가 고등학교 자퇴, 음악 접고 재수해서 서울로 대학교 왔다가 못 버티고 또 자퇴, 대만으로 반년 정도 잠적했다가 한국 와서는 돌연 강원도 속초로 이사, 방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이 너무 좋아서 히키코모리 생활 청산, 서울이 너무 싫었지만 서울로 돌아옴, 교육원 수료하고 막내 작가로 취직, 골병 나서 퇴사, 뭐하지 하다가 다시 수능 봐서 스물 다섯에 다시 신입생 됨, 전공은 처음 보는 사람도 내 미래를 걱정해주게 만드는 철학과 영문학, 이것저것 하다가 교환학생 옴. 연애사는 싹 뺐다. 아무래도, 썸남 앞이잖아.
“좀 혼란스럽지 내 인생?”
“너무 재밌어. 부러워. 엄청 많은 곳을 다녔구나.”
“어디에도 속하질 못해서 그래.”
*
“자, 14번.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있나요? 있다면 왜 하지 않았나요? 이거, 나 먼저 답할게. 스카이 다이빙. 죽을까 봐 못했어. 생각보다 나,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더라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리암은?”
“나는… 공연.”
“공연? 어떤 공연?”
“...버스킹. 기타 하나만 들고 노래해 보고 싶었어.”
“멋있다. 엄청 용감해.”
“하지도 못했는데 뭐가 용감해.”
“음, 애초에 겁쟁이였다면 하고 싶다는 생각도 못 했을 거야.”
“그치만 나는 겁쟁이가 맞아.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인데 왜 하지 않았냐면… 그냥 무서워서야. 나는 늘 음악이 하고 싶었는데, 하고 싶다고 소리 내 말할 용기조차 없었거든. 누가 반대라도 해줬다면 변명하기 쉬웠을 텐데. 탓할 곳이 나밖에 없어.”
“지금 말하고 있잖아. 지금, 나한테 말하고 있잖아. 하고 싶다고.”
“그렇네.”
어쩐지 엿보기에는 너무 이르고 무른 부분을 봐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리암, 오늘은 여기까지만할래?”
“그치만, 아직 22문제나 남았는데… 한 번에 끝낸 다음 마지막에 4분 동안 아이 컨택하는 것도 해야 하고…”
“좆까라 그래.”
나는 질문들이 빼곡한 종이를 멀리 밀어버리고 리암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움찔하는 리암의 숨소리를 느끼며 생각했다.
22문제를 더 답했다면 정말 너를 사랑하게 됐을까?
하지만 오늘 밤은 그 의문의 해답을 찾고 싶지 않아. 오늘 함께 있으니까,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거든. 사랑까지 안 가도 돼. 잠깐 입술을 떼고 머리를 묶었다. 시선은 서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는 걸로도 충분해.
이게 오늘의 내가 찾은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