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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공책 Oct 12. 2024

5. 한 문장을 전하려고 책 한 권을 쓰는 사람

럭비공 로맨스

“지원 진짜 미쳤어!”


 메이가 내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아마 내 외박에 가장 신난 사람은 나도 리암도 아닌 메이였을 거다.


“문자 하나 해놓고 걔네 집으로 가버리는 게 어딨어! 가서 뭐했어? 잤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빼먹지 말고 다 말해!”

“...”

“왜 아무 말도 안 해!”

“일단, 안 잤어 이 변태야.”

“안 잤다고? 걔 뭐야 바보 아냐? 이 시간까지 뭐 하다 온 거야 그럼?”

“...그냥, 얘기했어, 얘기.”

“...너네 진짜 재미 없어.”

“나 원래 찐따잖아. 끼리끼리 만났나 보지.”

“그럼 이제 둘이 어떻게 되는 거야? 둘 다 캐주얼한 관계에 소질 없는 사람들 같은데.”


 메이가 가볍게 던진 질문은 아주 무겁게 내 치부를 찔렀다. 


“모르지…아직 그런 얘기 하기엔 이르잖아.”

“이르긴 한데, 둘이 하는 짓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뻔해. 너 한국 갈 때 따라간다 하는 거 아냐?”

“진짜 미쳤어? 따라오긴 어딜 따라와. 한국말 한 마디도 못 하는 애가.”

“언제 갈지는 아직도 모르는 거지?”

“응. 일단, 다음 주에 또 면접 가기는 하는데…아, 3주 후가 마지노선이야. 3주 후에는 만약 합격해도, 뭐 신청 및 처리 기간 그런 거 때문에 비자 연장이 안 되거든. 그러니까… 그 전에 일 못 구하면… 종강하고 여행 조금 하고 한국 돌아가는 거지 뭐.”

“리암은 이거 다 알아?”

“정확히는 몰라. 그냥 종강하고 한국 갈 수도 있고, 더 있을 수도 있다고 했거든.”

“꼭 더 있었으면 좋겠다. 지원이 떠나면 나도 너무 슬플 거야.”

“나도 널 떠나기 싫어.”

“리암보다?”

“당연하지 이 바보야.”


 나는 리암을 만나기 한참 전부터, 내 신분으로 신청할 수 있는 인턴십은 전부 신청해 왔다. 뭐, 지금까지 합격한 곳은 단 한 개도 없다. 서류를 10번 넣으면 1곳에서 연락이 올까 말까 했다. 어떻게 면접까지 가게 되도, 굳이 내 비자의 스폰서를 자처하며 나를 채용해 줄 곳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현실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리암을 만난 이후로는 조금 원망스러웠다.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늘에 맹세코, 김칫국을 사발 째 들이키고 벌써 리암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정말 궁금했다.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네가 정말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람인지, 뭐 그런 거. 그래서 매일 습관처럼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고 이메일을 썼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니까. 


 무엇보다, 마무리 짓지도 못한 “사랑에 빠지기 위한 36가지 질문들”의 효과가 엄청났다. 그날 이후 리암의 문자를 기다릴 때면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리암의 답장이 도착해 핸드폰 화면에 그 이름이 보이기만 하면 광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리암과 연락을 자주 한 건 아니었다. 낮에는 학교, 저녁에는 과제로 바빴던 우리의 대화는 주로 밤 9시 이후에 시작됐다. 14가지 질문들에 답한 날 이후로 우리는 정말이지 별의별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꿈, 미래, 문학, 음악, 영화, 가족, 철학, 사랑 등등등. 리암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렇게 쉽게 누군가와 가까워져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동시에 아, 취약함은 정말이지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사랑은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걸까? 36가지 질문 중 반도 채우지 못했는데, 그 질문들이 우리를 사랑이라는 끝으로 이끌 것만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결심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리암을 사랑하기로 결심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는데. 


 오늘 밤엔 내가 먼저 리암에게 문자를 보냈다.


- 리암, 오늘 시 수업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 “딱 한 문장의 마음을 전하려고 책 한 권을 쓰는 사람도 있는 법이에요.” 나는 가끔 내가 그런 사람인 것 같고, 그런 내가 참 바보 같아. 


 내게 시를 쓰는 건 창작이라기 보다는 습관이었다. 적지 않고서는 죽을 것만 같던 감정들이 너무 많았다. 사랑해 딱 한 마디가 너무 어려워서 A4 용지 한 장을 단어들로 가득 채우는 거. 내게는 그게 시였다. 


 그리고 도착한 리암의 답장.


- 너무 아름다운 말이다. 바보 같다고 하지 마. 책 한 권이라니, 한 문장을 포장하는 가장 완벽한 선물 상자 같은 걸?


 내가 어디서 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답장을 했다.


- …야, 나 문학 관둬야겠다. 네가 문학 해야겠어. 완전 졌어.

- 하하하 고마워. 그나저나, 이번 주말에 뭐해? 나 다음 주에 중간고사인데, 괜찮으면 주말에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 그래, 나도 과제 좀 있어. 어디서 만날까?

- 우리 처음 만난 카페 어때? 대신 이번엔 걸어오지 마. 데리러 갈게. :)

- 좋아! 너무 기대된다.


 노트북을 키고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일단 문학사 수업의 중간 과제로 레포트를 써야 하고, 시 창작 수업에 매주 내는 과제도 해야 한다. 비교문학 수업에서 다루는 책도 틈틈이 읽어둬야지. 리암과 함께 있을 때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까…레포트는 미리미리 써둬야겠다. 달력 어플에 리암과 만나는 날을 또 한 번 저장하고, 다시 구직 사이트를 켰다. 나는 왜 이곳에서의 생활을 이렇게까지 연장하려고 하는 걸까? 정말이지 남자에 미쳐서?


*


“그럼 내일 만나는 거네?”

“만나서 공부하기로 했어.”

“퍽이나 그러시겠어.”

“아! 좀 가만히나 있어봐. 거의 다 됐어.”


 몇 번이나 돌려본 지 모르겠는 미드를 대충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떠드는 금요일 밤. 서로의 손에 매니큐어를 칠해주며 우리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낄낄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리암이었다. 


“헉. 메이. 리암이야. 우리 한 번도 통화 한 적 없는데. 뭐지? 갑자기 진짜 뭐야?”

“뭐해! 빨리 받아! 스피커폰으로 받아! 나도 목소리 좀 듣자!”

“아 뭐래. 저리 가.”

“우리 사이에 진짜 이럴 거야?”

“아 꺼져!”


 나는 메이를 거실에 두고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어, 안녕 리암? 무슨 일이야?”

“안녕! 갑자기 미안! 혹시 지금 잠깐 나올 수 있어?”

“지금? 어디로?”

“너희 아파트 앞.”

“...10분만 기다릴래?”


 천천히 나와도 된다는 리암의 답에 나는 바로 전화를 끊고 메이에게 소리쳤다.


“메이! 얘 우리 집 앞이래!”

“뭐라고? 왜? 너 보러 온 거야?”

“모르지? 근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뭐지 진짜?”

“꺅! 야 얼른 옷이나 입어! 나도 얼른 준비할게.”

“너는 왜.”

“그럼 너 혼자 가게 두냐? 뒤에서 미행해야지.”


 이렇게 된 이상 메이를 말릴 수는 없다. 같이 나가는 수밖에…


리암은 내가 사는 빌딩에서 3분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한참 뒤로는 메이가 누가 봐도 수상한 자세로 쫓아오고 있었다. 야밤에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래 생각할 틈도 없었다.


“리암, 안녕!”

“지원! 갑자기 불렀는데 나와줘서 고마워.”

“아냐, 딱히 뭐 안 하고 있었어.”


 딱히 뭐 안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 멀리서 메이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아, 다름이 아니라…” 


 리암은 답을 하다 말고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며 내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리암의 커다란 기타와 잡동사니들이 보였다. 리암은 그 틈을 헤집더니 럭비공을 꺼내왔다. 


“너, 이거 본 적 없다 그랬잖아.”

“어?”

“이게 풋볼에 쓰는 공이야. 바로 그 미국 풋볼. 오늘 친구들이랑 공원에서 이걸로 놀았거든? 근데, 공원에 있는 내내 이걸 봐본 적 없다는 네 말이 자꾸 생각이 났어.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어. 그게 다야.”

“우리 내일 보기로 했잖아.”

“그치.”

“근데 꼭 오늘 이렇게 보여주고 싶었어?”

“...아, 미안.”

“아니! 아니.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그러라고 물어본 게 아니야. 너무…진짜 너무 좋아서 그래.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네 마음이 어떤 건지, 나 정확히 알거든.”


 나는 고개를 들어 리암을 올려다봤다. 달빛 아래에서는 갈색이 되는 리암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헤이즐 색이라고 했던가. 왠지 목이 메어 왔지만 꾹 삼키고 말했다.


“보여줘서 너무 고마워.”


 그리고 리암을 끌어안았다. 메이가 엄청 놀리겠지만 그런 걱정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딘가 경직되어 있던 리암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네가 좋아해서 다행이야.”


 리암은 내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이마가 리암의 명치쯤에 닿았다. 심장 박동을 느끼기 가장 좋은 위치였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리암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처음 키스하던 때보다도 빠르게 뛰는 심장. 그날 밤 리암의 심장 박동은 곧 나의 심장 박동이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그걸 알았다.


 감상에 젖기도 잠시,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계속해서 진동이 울려대는 탓에 나는 껴안은 팔을 풀었다. 보나 마나 이 모든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메이가 문자 폭탄을 보내고 있는 걸 거다. 


“그럼…내일 볼까?”


 리암은 특유의 환한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응, 내일 보자. 두시쯤 데리러 올게.”


 그리고 나는 왜인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알아서, 침을 꿀꺽 삼키고.


“리암, 나 너 좋아해.”


 알고 보니 내가 그날 밤 내내 달빛이라고 생각한 건 달빛이 아니라 가로등 조명이었다. 하지만 아무 상관 없다. 내 뜬금없는 고백의 순간 리암이 보여준 미소보다 밝은 건 어차피 없었을 테니까. 나는 늘 리암이 최대로 환하게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밝아질 자리가 남아있었다. 


“지원 나도, 나도 좋아해.”


 오래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야, 알아. 네가 나 좋아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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