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면서! 진짜로 고백이라는 걸 해버렸다. 떠나는 리암의 자동차를 멍하니 쳐다봤다. 저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당장 메이를 찾아내 붙잡고 호들갑을 떨어야 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마자 메이가 보였다. 들뜬 표정으로 내게 달려오는 메이를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재밌다고 생각하면 그저 재밌기만 한 일이지 이거 전부.
“아! 지원! 자고 가라 했어야지 그냥 보내면 어떡해 진짜! 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충전할게. 뭐든 맘껏 해도 되니까 얼른 다시 불러!”
“어휴. 메이, 다 들었지?”
“다 들었지.”
“나… 아무래도 실수한 걸까?”
“지원, 감정에 실수가 어딨어. 잘했어. 자랑스러워! 그러니까, 내일은 꼭 데리고 와!”
가끔은 메이의 이런 캘리포니아식 위로가 정말 큰 도움이 된다.
“너 이제 비자 걱정 없겠다.”
“뭐라고?”
“결혼하면 되잖아. 리암 걔 표정 보니까, 너 간다고 하면 공항에서 프로포즈라도 할 기세던데.”
“메이 진짜 제발!”
“왜~ 신나잖아. 결혼도 하고 그린카드도 얻고!”
*
오늘 잠은 다 잤다. 감정에 실수라는 건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가도…인턴 다 떨어지고 당장 몇 달 후에 돌아가 버려야 한다면… 만난 지 반년도 안 된 애랑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한다는 건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아 근데, 일단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다. 빌어먹을 미국 놈들… 이 땅에서 좋아하는 거랑 사귀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주변 친구들의 연애사, 주로 메이의 설명을 통해 배운 미국 연애의 단계는, 간단히 줄이자면 이렇다.
< 첫 만남 - 토킹 스테이지 - 스킨십(이 친구의 순서는 자유롭다…) - 캐주얼 데이팅(이 단계까지는 여러 명을 만나도 괜찮다.) - 관계 정립(보통 DTR이라고 줄여 쓰는데, define the relationship의 약자다. 다른 사람을 동시에 만나도 되는지 아닌지, 사귈지 말지, 뭐 이런 걸 정하는 단계다.) - 연인 >
“뭐, 미친 Z세대라고 할 수 있지.”
메이는 처음 내게 이 과정을 설명해 주면서 이런 사족을 덧붙였었다.
“근데 메이, 설마 저게 평균은 아니지?”
“그럼, 저렇게 안 하는 애들도 많아. 첫 데이트에서 아이러브유 갈겨 버리는 애들도 있다니까?”
“그건 또 그거대로 싫다…”
“그래도 저렇게 해서 연인으로 가면 다행인 거야.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하고 감정적 교류까지 다 하면서, 연인 타이틀은 죽어도 거부하는 ‘시추에이션십'은, 아 진짜 최악이거든.”
“응, 난 그건 못 할 거 같아. 워낙 구질구질해서.”
그리고 머리를 차갑게 해서 생각해 보면 나와 리암이 바로 그 시추에이션십의 단계에 있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는 둘 다 겁쟁이인 거다. 유치원생 마냥 우리 이제부터 여자친구, 남자친구 하지 말하기에는 우리 모두 내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방인이다. 그러니까, 무조건 떠날 사람. 만약 인턴십에 합격하고 비자 연장을 받는다고 해도 당장 몇 달일 뿐, 나는 언젠가 꼭 돌아가야만 한다. 여기는 내가 태어난 땅이 아니니까.
이 걱정을 들은 메이의 반응은…
“진짜 결혼하면 되잖아. 비자 문제도 해결, 관계 문제도 해결!”
“메이. 네가 이러니까 내가 캘리포니아 애들이랑은 얘기를 못 하겠다는 거야.”
매일 밤 침대에만 누우면 생각이 끊이지를 않는다. 리암과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더 상처받기 싫으면 여기서 멈춰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미래…아 나 뭐 해먹고 살지. 한국 가면 뭐하지. 그 먼 미래까지 생각하기도 전에, 당장 내일 해야 하는 과제는 뭐였지...
*
“그동안 잘 지냈어?”
“푸흡. 응. 잘 지냈어. 너는?”
“응, 잘 지냈지. 우리 마지막으로 만난 게… 세상에, 16시간 전이잖아!”
“아, 진짜 바보 같아! 그만해!”
리암이 시작한 실 없는 장난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후 처음 다시 만나는 날…이라고 하기엔 리암 말대로, 16시간 전 일이었고, 걱정했던 것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서 그랬을까.
“지원은 오늘 뭐 공부할 거야?”
“나는 과제. 시험은 없거든.”
“좋겠다…무슨 과제?”
“문학사 레포트 하나랑, 합평에 제출할 시. 너는?”
“전공 두 개. 나 집중력 장난 아니야. 각오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젯밤 내내, 도서관으로 몰래 쫓아올 거라는 메이와 거의 백 분 토론을 펼친 결과 안 따라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어쩐지 방심했다가는 꼬리를 밟힐 것만 같아서 자꾸 뒤를 돌아봤다.
도서관에 도착한 리암은 외계어 같은 심리학 책들을 꺼내 들었다.
“와, 대박. 뭔 마법 주문 책인 줄.”
“헤헤…좀 있어 보이기는 하지.”
그리고 메이의 예상과 다르게 우리는 정말 조용히, 그리고 열심히 각자 할 일을 했다. 리암은 전공 책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그런 리암과 노트북을 번갈아 가며 봤다. 이것도 열심히 한 거로 쳐줘야 한다. 진짜 열심히 봤으니까…
이번 주 시 수업의 주제는 공교롭게도 ‘사랑'이었다. 리암 앞에서 사랑 시를 써야 한다는 거다. 어쩐지 온 우주가 억지 설정까지 넣어주며 내 서사를 완성하려 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다른 과목들의 레포트나 에세이 같은 건 그냥 처음부터 영어로 쭉 쓰고는 하지만, 시 과제만큼은 한글 시를 먼저 쓰고, 그걸 영어로 번역한다. 그래서 그냥, 리암을 앞에 앉혀두고는 리암에 대해 시를 써보기로 했다. 어차피 들켜도 리암은 아무것도 못 읽을 테니 괜찮다는, 어딘가 묘하게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마음으로…
*
“리암, 나 진짜 단 1초도 더 밖에 있고 싶지 않아. 당장 집 가자.”
“어… 나도 가?”
“그럼, 나만 가?”
“아니! 아니…나도 가. 완전 가.”
“그래. 그나저나 너 진짜 집중력 좋더라.”
“...사실 진짜 하기 싫었는데, 네 앞이니까 멋져 보이려고 애 좀 썼어…”
도서관을 나서며 메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 네 말대로, 리암 데리고 집 가는 중. 지금 집이야?
메이의 답장은 리암을 거실 소파에 앉혀두고, 나 혼자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도착했다.
- 나 본가 왔어. 오직 너를 위해. 내일 밤까지 안 들어갈게. 그러니까, 오늘은 꼭 해! ;)
- 메이… 진짜 가슴이 웅장해지는 우정이다…T-T
- 알면 좀 도파민 터지는 소식들 준비해 둬. 내일 밤에 가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볼 거야!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어쩔 줄 모르며 앉아있는 리암은 정말이지 너무 귀여웠다.
“내 노트북으로 영화…볼까?”
고작 영화 보자는 말을 저렇게나 용기 내서 말해야 한다니. 귀여워… 나는 대답을 미뤄두고 리암을 쳐다봤다. 오늘의 리암은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다. 튀어나온 잔머리들이 많다. 커다랗다고 놀렸지만 사실 리암의 얼굴 중 가장 잘생긴 코가 머리를 묶으니 더욱 도드라진다. 아, 진짜 잘생겼다는 생각이 너무 커서 어젯밤의 걱정거리 같은 건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나는 리암에게 다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메이 오늘 안 온대.”
그리고 리암의 옆이 아닌 무릎 위에 앉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이건 메이를 위한 거다.
*
새벽 세 시, 우리는 둘이 눕기엔 너무 작은 나의 슈퍼싱글 침대에 딱 붙어 누워있다. 리암은 곤히 자고 있다. 정말이지 곤히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게, 코 고는 소리는커녕 숨 쉬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달빛인지 별빛인지 그냥 바깥의 가로등 빛인지 모르겠는, 차갑고 희미한 빛에 의지해 리암을 본다. 정말이지, 이렇게 쉬울 줄이야.
바로 오늘, 리암을 앞에 두고 적었던 시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사실 시가 아니라 딱 하나의 문장이었다.
“너는 시가 될까.”
손을 뻗어 리암의 쇄골 뼈를 만졌다. 여전히 너는 소리 없이 잔다. 그 고요함이 나는 문득 무서워져서, 오른쪽 귀를 리암의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댄다. 네가 지금 여기 나랑 함께 살아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너의 심장 박동을 확인하려고 애를 써댄다.
너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리암, 네가 나의 꿈을 이해하고 나의 유년기를 이해해도, 내가 소파보다 소파 밑에 앉는 게 편하다는 걸 이해할 수는 없는 것처럼, 나도 너의 어떤 작은 부분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래도 리암은 늘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손을 꽉 잡고 걸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세상이 잠깐 멈췄던 걸 리암은 모른다.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정말이지 눈 딱 감고 이 아이를 사랑해 보고 싶었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다를 거 같아서.
네 기다란 머리카락을 하나로 빗어 묶어주고, 매일 신는 그 커다란 올드스쿨에 발을 맞춰보고 싶어.
아침 해가 뜨면 이 말들을 해야 한다.
리암, 나는 있지, 너라는 미지를 있는 힘껏 궁금해해 보고 싶고, 네가 품고 있는 아픈 기억들을 전부 안아줘 보고 싶어. 너는 내가 처음으로 욕심낸 남자야.
너는 내게 어떤 단어들을 안겨줄까. 나는 또 네게 얼마나 많은 글들을 빚지게 될까. 리암, 언젠가 나는 너를 저주하게 될까? 네가 세상을 향해 치켜뜨는 그 연녹색 눈동자와, 별안간 나를 움켜쥐는 그 붉은 손마디가 정말로… 내게 영원히 기억될 노래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