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가 소녀와 연대하는 세상이 되었다!
한때는 디즈니가 소녀를 망쳤지
페기 오렌스테인(Peggy Orenstein)은 2012년에 이런 책을 썼다. <Cinderella Ate My Daughter> 다음 해 한국에도 같은 제목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로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신데렐라로 대표되는 애니메이션들이 어떻게 Girly-girl 문화를 만드는지, 디즈니로 대표되는 애니메이션 제작회사들이 여성성을 어떻게 강조하는지 그리고 그 효과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신데렐라, 라푼젤, 백설공주를 보고 자란 나는 디즈니에 잡아 먹혀왔다. 머리 긴 예쁜 공주님이 되고 싶었고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려왔다.
어느 날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치킨을 너무 좋아해서 치킨집 사장님과 결혼하는 게 꿈이었다고. 다른 친구는 떡볶이를 너무 좋아해서 떡볶이집 사장님 아들과 결혼하고 싶었다고. 또 다른 내 친구는 문방구 사장님과 결혼하는 걸 꿈꿔왔다고. 그러다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사장님이 될 생각은 안 했을까?"
나는 축구를 할 줄 모른다. 해본 적이 없다. 남학생들이 운동장을 통째로 사용하면서 공을 차고 누빌 때, 소운동장에서 피구, 발야구와 같은 소녀화된 운동(허주영, 2022)을 해야 했다. 운동장 구석에서 같은 반 남자애들이 운동장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고 자란 나는, 대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서 이온음료를 들고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자가 되었다.
허주영. (2020). 여성적인 것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갱신하기: 스포츠/운동하는 여성들의 신체 재현. 여/성이론, (43), 211-228.
그리고, 모아나의 등장
이런 내가 싫어질 때쯤, 그리고 위의 책이 출간된 지 만 4년이 되던 해 <모아나>가 개봉했다. 모아나의 등장은 나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남자 주인공과의 연애 스토리가 없다니. 족장의 딸이 공주님이 아니라 예비 족장이라니. 그리고 모투누이 섬(모아나가 살고 있는 섬)을 살리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혼자 망망대해를 떠나다니!
하얗고 마른, 금발의 긴 생머리가 아닌 건강하고 어두운 피부의 곱슬머리 여자 주인공이라니!
그 후로 나의 최애영화는 모아나가 되었다.
원래도 태닝하는 걸 좋아했지만 더 열심히 태닝을 하고 수영을 배웠다. 그리고 퇴사 한 달에는 히피펌까지 해버렸다. 모아나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어릴 때 남자 주인공이 필요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더 많이 봤더라면 어땠을까? 공주님이 아니라 족장이 될 준비를 하는 여성 캐릭터를 더 많이 봤더라면? 사랑에 목매고 사랑에 인생을 바치는 여성 캐릭터가 아니라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는 여성 캐릭터를 하나라도 봤더라면!
모아나는 성장할수록 '함께' 해.
그리고 어제(24.11.27) <모아나 2>가 개봉했다. 논문이고 뭐고. 모아나 2를 숨참고 기다려왔는데 단 하루도 미룰 수 없었다. 달려가서 모아나를 봤다.
모아나 2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모아나는 더 이상 혼자 바다로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모아나에게 crew가 생겼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항해를 위해 농부를, 카누 수리공을, 모투누이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을 자신의 선원들로 선정해서 데려간다.
성장한 모아나는 함께 하는 법을 배운다. 마우이는 물론 모아나 1에서 싸움을 했던 카카모라까지도 함께 하는 팀이 된다.
그리고 모아나가 모투누이를 다시 살리고자 할 때, 집으로 꼭 다시 돌아가고자 다짐할 때 언제나 상기하는 것은 동생 "시메아"다. 시메아에게 바다의 의미, 섬의 의미를 가르쳐준다.
이 대목에서 여성의 연대, 자매애가 떠올랐다. 할머니에게서 이어받은 바다에 대한 강한 믿음과 섬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감을 동생 시메아에게 전해주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카누 제작자이자 수리공 "로토"와 모투누이의 역사 덕후이자 마우이 덕후 "모니"도 큰 인상을 남겼다. 지금까지 재현물들에서는 주로 여성을 '덕질'하는 사람으로 그려왔고 때로는 덕질하는 여자들을 '빠순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던 문화 속에서 덕질의 주체가 남성인 모니라는 점은 정말 유의미하다.
게다가 배를 만들고 정비하는 사람은 여성인 로토. 로토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가득하고 매우 똑똑한 여성으로 나온다. 마우이는 로토를 부르면서 "hey, smart" (거기 똑똑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렇게 두 캐릭터의 성별을 오랜 시간 만들어진 성역할과 다르게 배치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 정말로 세상이 바뀌기는 하나보다.
모아나를 보고 자라는 소녀들이 부러워
영화가 끝날 때쯤 이런 생각을 했다. 모아나를 보고 자라는 지금의 소녀들이 참 부럽다. 그리고 다행이다. 그 소녀들은 나같이 어떤 사장과 결혼하겠다는 생각 말고, 사장이 되겠다는 꿈을 정말 여러 개 꿨으면 좋겠다. 족장이 되는, 대통령이 되는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그 꿈 가까이에 가는 모습을 보고싶다.
이런 영화가 정말로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미디어의 영향은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알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보고 자란 소녀들은 더 이상 공주님이 되기를 꿈꾸지 않겠지.
마우이가 모아나에게 공주님이라고 부르자 모아나는 숨도 안 쉬고 대답한다.
"still not a princess" (다시 말하지만 공주님 아니거든)
모아나 1에서 공주님이라고 부르자 공주님 아니라고 되받아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 아빠는 나한테 공주님이라고 불러왔는데, 혹시 언젠가 또 그렇게 부른다면 나도 모아나처럼 대답해 봐야겠다. 공주님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