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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un 03. 2021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그대에게

A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식...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내가 영국에 와서 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던 시절의 일이다. 


먼 타국에서 A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잘 성사되기를 빌어주면 좋겠지만, 회사 사람들 모두 그의 결정에 큰 충격을 받았다. 유학을 떠나기 한 달 여 전까지도 그는 평범하게 회사를 다녔고 아무도 그의 계획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평범하게'라는 말은 틀렸다. 


A가 하는 일과 업무 진척 상태에 대해 회사에 있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정황을 따져보니, 일을 전혀 진행시키지 못해 그가 침묵을 지켰으리라는 판단이다. 더 이상 손 쓰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급기야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닐까? 혹은, 해외 유학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두고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그의 막판 행로가 문제다. 무단결근까지 하며 잠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들 놀라고 허탈해 할 수밖에 없다. 타 도시도 아닌 해외로 야반도주하듯 떠나다니. 같이 일하던 동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믿고 일을 맡겼던 사장이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어쩌랴 싶게 우리는 A를 잊고 살았다. 동료들끼리 친분도 좋았고 근무 분위기도 유쾌했다. 갑자기 떠난 사람에게서 느낀 섭섭함은 빨리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A의 존재가 잊혀갈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체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데,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둔 사람 치고는 너무나 태연하게 친구에게 소식 전하듯 하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유학 과정에 필요한 서류를 부탁하기 위한 사전 조치라고 하는데, 솔직히 그 진위는 모른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그가 했던 무책임한 행동과 태연하게 이메일을 보내는 행위만 봐도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었다.


"영국 X들 독해서..."

"이 X의 나라는 왜 이리..."

"이 X의 날씨 때문에..."


이런 말이 그의 글 속에 수시로 등장했다. 


회사 동료로 지내던 시절 그가 자주 내뱉던 냉소적인 말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사고방식이 조금 독특한 사람이라 여겼다. 


영국의 집과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 학교, 전공에 대한 이야기가 이메일의 주 내용이지만, 수시로 그 X 같은 존재 때문에 될 일도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중도 포기하고 귀국하겠다는 거야? 

아니면 그대로 버티겠다는 거야?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 헷갈렸다. 자신이 얼마나 갖은 고생을 하며 영국에서 지내고 있는지 알아달라, 정도로 해석하면 되려나? 


말썽을 피우고 떠난 덕택에 기억에서 쉽게 지워버릴 수 있었던 옛 동료가 보낸 (모)험담이 가슴에 와닿을 리 없다. 


회사에서의 업무가 과도하게 많았거나 사장과 한판 했거나 동료에게 배신당하는 등 부득이한 사정이 A에게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마지막 인사와 업무 인계도 없이 떠난 해외 유학인데 현지에 가서도 부적응자로 살다니.


내가 영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살고 보니, 그때 그 이메일을 지금 곱씹는 것인지 모른다. A가 처음 영국에 도착하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의 입장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나의 영국 초창기 시절과도 비교하면서 말이다.


고국을 떠나 해외 어느 곳에 가더라도 고국에서보다 못한 삶의 요소는 당연히 있다. 반면, 고국에서보다 나은 삶의 요소도 반드시 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면 이 모든 요소를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나?



"영국 날씨, 왜 이렇게 추워요? 정말 미치겠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영국에 살면서도 이 옛 동료와 같은 사람을 간혹 만난다. 


B는 내게 연락할 때마다 질문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불평을 유난히 자주 쏟아내던 사람이다. 영국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불평 요소 중 부동의 1위가 날씨인데, B가 사는 지역은 영국에서도 특히 악천후가 심한 편이긴 하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영국 날씨 적응에 필요한 정보를 B에게 다양하게 보내줬다. 


어찌 된 일인지, 이후 연락이 와도 B는 똑같은 하소연으로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조언해 준 사항은 아무것도 실전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을 떠나지 않는 한 그 불평을 해소할 길은 없겠구나, 이렇게 결론 내리고 나는 더 이상 B의 불평에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날은 무덥고... 볼거리는 없고... 물가는 비싸고... 애들은 징징대고..."


여행지에서 B를 만났다. 

맞다. 

앞서 나온 바로 그 B다.


영국보다 월등히 날씨가 좋고 관광지로 유명한 지역인데, 마침 B에게는 생애 첫 방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를 만나자마자 불평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볼거리가 없다고 하는데, 이 도시의 여행 명소가 어디인지 알아봤어요?"

"여행 계획은 짰어요?"


이렇게 내가 묻자, 모두 아니다,라고 답했다.  


추워도 불평... 

더워도 불평... 

볼거리가 뭔지 찾지도 않고 불평... 

자신도 불평하면서 애들이 불평한다고 불평... 


매사 불평만 하는 것이 습관인가 보다. 나와 같은 영국 땅에 살면서, 그리고 같은 해외 여행지에 발을 디딘 순간마저도 B는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어디서든 불평의 요소를 찾아내려 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유럽 명소에 와서도 볼거리가 없다고 투덜대면 도대체 어디를 가야 B가 만족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볼 것도 없다면서 왜 왔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의 기회를 귀찮은 숙제로 여기는 사람과 길게 대화하기는 힘들다. 


호텔 로비에 앉아 그날 첫 일정에 해당하는 박물관 개장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나를 B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내가 들고 있던 A4 용지 세 장짜리 여행 계획서에 감탄하며 나와 동행하고픈 눈치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날만큼은 더럽게 눈치 없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루 10시간씩 걸어 다니며 땀 흘리고, 땡볕에 그을리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밥을 먹고, 한참 동안이나 같은 전시물을 들여다보며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추천해줄 만한 여행 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내 여행 꿈이 B와 동행하는 순간 산산이 부서질 건 뻔하지 않겠나?


이후에도 되도록 B와의 접촉을 피했다. 해줄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더 이상 없어서다.


습관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나를 피곤하게 만들고 시간도 아깝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ndre Hunt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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