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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03. 2021

기사님의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택시를 타는 건 아니잖아요

"아 유 아메리카?"

"노"


"잉글랜드?"

"노"


"프랑스?"

"(한숨)........."


"이탈리아?"

"................"


"러시아?"

"................"



얼마나 더 많은 국가명이 흘러나왔는지는 모른다. 


정답은 그리스인데, 한국인이 그리스 출신을 구별해 내기는 힘들지 싶다. 이걸 대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한국의 택시 기사와 승객이 주고받은 말이다. 온라인에 올린 이 친구의 사연을 읽고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조용히 있고 싶은 사람에게 끈질기게 대화를 유도하려는 태도도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국적을 맞추겠다고 운전 도중 뒷자리 승객에게로 자꾸 눈길을 돌렸을 것이 뻔한 기사의 행위도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영국에 오래 살면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을 접하고 함께 모임과 일도 해보니, 나는 아시아와 유럽 국가에 한해 상대의 출신 국가를 맞추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특유의 외모나 억양적 특색 때문이다. 영국의 학교와 직장, 학회 등에서 세계인들과 교류해 온 남편은 국적을 맞출 수 있는 국가의 범위가 더 넓다. 


그런데, 상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파악할 능력이 내게 있다고 해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잠시 생각해 볼 문제다. 


외모와 억양만으로 출신 국가를 파악하기 힘든 사람도 있다. 혼혈과 입양 출신이 대표적이다. 서양에는 자신 혹은 자신의 자녀가 혼혈아거나 입양아, 의붓자식임을 공개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 



"야, 저 여자 한국인 아닐까"..."설마, 한국인이 저렇게 클 리가 있냐?"


거리에서 전시물을 보고 있는데, 내 뒤에서 누군가 이렇게 수군거렸다.


나는 토종 한국인임에도, 큰 키와 동서양의 이목구비가 섞인 외모, 옷차림 때문에 주변에서 한국인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탑승했더니, 입구에 서있던 승무원이 남편에게는 한국어로 인사하면서 옆에 있는 나에게는 영어로 인사했다. 


모두 웃어넘긴 일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겉모습만으로 섣불리 상대의 국적을 판단하는 이의 태도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한국 사람인가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중, 한 남자가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그는 한국말은 못 해도 한국에서 잠시 살았기에 우리 가족의 대화를 듣고 알아차렸다고 한다.


대만 등의 중화권 출신으로 보이길래 '그쪽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요?'라고 물었더니 자기는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답했다.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영국인 되는 거 아니잖아요.'라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그가 곤란한 듯 고개를 숙이길래 입을 다물었다. 우리에게는 국적을 물어보며 접근해 놓고 정작 자신의 국적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태도가 웃기긴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니 더 이상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상대의 국적이 반드시 필요한 정보라면, 정중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정중함은 까다로운 언어적 형식과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수반된다. 


May I ask you where you are originally from?  

I hope you don't mind my asking, but what country are you from?


이렇게 긴 문장을 외워서 활용하기는 불편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이토록 길게 말하면서도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상대가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듯하다. 나의 소심한 대화법이다.


언어에 능숙하지 않으면, 사람은 아는 단어만으로 간단하게 말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화자의 의도를 모르니 상대가 무례하다 여길 수 있다. 우연히 던진 질문을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게 흐르던 침묵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갈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굳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음에도 답이 나올 때까지 대화를 강요하는 행위는 횡포다. 


택시에 탔던 그리스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간접적이나마 영국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나의 사정과 비슷하리라.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요." 


"북한은 아닌가요?"  

"한국에서 왔다니까요."


"북한에서는 안 왔어요?" 

"저는 북한이랑 상관없는데요."


"북한에서 남한으로 안 넘어갔어요?" 

"아니요."


"북한에 아는 사람 없어요?" 

"............"



국정원에서 취조당하는 건 아니고, 새로 주문한 식기세척기를 설치해 주던 기사와 나눈 대화다. 


이렇게 끈질기게 북한을 물고 늘어지는 걸 보면 내가 북한 사람처럼 생겼나? 설마... 중국인/한국인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남한과 북한 출신을 구별할 능력이 있단 말인가? 


한동안 영국 뉴스에 북한이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기도 했지만, 북한은 언제든 흥미로운 주제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특수한 고립 상태와 정치적 배경을 모른다. 


집요하게 북한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초면에 나의 국적부터 물어보는 사람과의 대화는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간다. 택시에서 침묵을 택했던 그리스인도 그런 방향으로 대화가 이어질까 두려웠던 건 아닐까?


내 출신 국가를 밝히고 나면, 상대는 Korea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온갖 지식을 총동원해 대화를 이어가려 한다. 


"북한이 한국에다 포격을 했다던데, 한국에 있는 가족, 친지들 괜찮아요?"

"김정일의 후임자로 누가 될 것 같아요?"

"강남 스타일을 영어로 부를 줄 알아요?"

"한국 선수가 요즘 브리티시 오픈에서 선전하던데, 한국 사람들 골프 잘해요?"

"북한에서 출발한 배가 남한에서 침몰했다던데 들었어요?" (세월호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안 가봐요?" 


요즘은 K팝과 스포츠 스타까지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의 활약이 있어 기분 좋게 대화를 이어가지만 일단 북한이 뉴스에 나오면 설명에 애를 먹는다. 당장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지들의 안위가 위태로울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오는 이가 있어서다.


잠시 고국에 들렀다가 택시를 탔을 때다.


"으데서 완능교?"

"(말하고 싶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가)...영국에서 왔는데요."

"어, 영국이요?...와, 영어 잘하긋네...영국에 살믄, 거~~~..."


유명 관광 도시였으므로 내 짐가방과 옷차림만으로도 외지인이라 추정할 수 있다. 기껏해야 서울이나 대전, 광주 등 여느 지방 도시에서 왔겠거니 했다가 영국이라고 해서 기사가 일단 놀라지만, 이후 뻔한 질문이 이어졌다. 내가 영국에서 외국인으로 살며 들어온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택시를 타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당장 몸이 피곤하거나 대중교통의 불편함 때문이리라. 약속 시간이 촉박하거나 현지 지리를 몰라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자녀나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를 위해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사람도 기사의 궁금증을 풀어주려 택시를 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택시로 이동하는 도중, 목적지에서 할 일을 미리 구상하거나 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조용히 감상하고 싶은데, 기사가 끝도 없이 질문을 해대면 피곤하다. 여기에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초면에 국적까지 물으면 실례가 될 수 있다. 



기사님께


- 간첩이나 현상수배범, 테러범, 마약사범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승객의 국적이나 신상에 대한 질문은 삼가면 어떨까요? 

- 외국인 승객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오늘 하루 잘 보냈나요?'...'여행 다니는 중인가요?'... 등 영어 회화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표현으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커버 이미지: Photo by Lexi Ander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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