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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y 28. 2021

아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

아들은 아빠를 잘 따른다. 


엄마는 가정교사와 보모 역할을 하느라 아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학교 준비물과 숙제, 취침 준비까지 확인하고 뒷정리를 시키지만, 아빠는 아무것도 안 시킨다. 아들이 할 일을 잊어버릴 때마다 엄마는 이를 지적하느라 잔소리꾼이 되어야 한다. 아빠는 그 모든 걸 챙기는 엄마를 믿고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야단맞고 자숙 중인 아들 앞에서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농담을 걸고 웃고 떠든다.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민주적 절차로 의견을 조율하자고 나오길래 달랑 가족 3명이 모여 의결 과정을 거친다. 이럴 때마다 아빠는 아들의 거수기 역할을 자처한다. 어찌 사람이 받고만 사는가. 아들도 아빠의 거수기 역할로 보답한다. 물론, 두 부자의 담합 행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으므로 엄마는 거부권 행사로 가정의 민주주의를 수호한다. 이래저래 아들과 엄마의 우호적 관계 유지는 멀어지고, 두 부자의 쿵짝만 더해 간다.


남편과 아들의 이런 환상 궁합을 잘 이용하면 내가 편해질 때도 있다. 혼잡한 거리에서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는 아들에게 "아빠하고 쉬하고 와"라고 하면 아들은 좋아라 하고 아빠의 손을 잡고 간다. 집안일을 할 때도 아들에게 "오늘은 아빠하고 창문 닦는 날이야"라고 하면, 두 남자가 유리창 안팎에서 마주 보고 웃으며 걸레질을 한다. 집안일을, 아빠와 하는 놀이쯤으로 아들에게 인식시켜주니 일 부담이 줄어든다.



아빠하고 치카치카하고 와


그래서인지, 아들의 등하교 도우미는 물론 한국어/영어/수학/컴퓨터/수영 강사 역할까지 하며 아들과 무한정 길게 대화를 나누는 건 엄마임에도, 정작 아들은 아빠의 말투를 따라간다. 



이토록 아빠를 좋아하고 아빠 말투까지 따라 하는 아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아따'...다. 


아따???...'아빠'를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니다. '아따맘마'에서 들은 말도 아니다. 


* 최근에야 '아따맘마'라고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가족은 영국에서 줄곧 육아를 했고 아들에게는 영국과 한국 애니메이션 위주로만 보여줬다. 


그럼 이 '아따'는 어디에서 왔을까?  


"아따...덥네"

"아따...배고프네"

"아따...피곤하네"


누구에게서 배운 건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 사람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말을 일상의 단어로 접수해버렸다. 아들이 아빠의 말투를 따라 한 건 이때부터다. 모든 대화를 '아따'로만 채운 시절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빠라는 존재가 자주 쏟아내는 말이, 아빠라는 단어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두 돌이 가까워질 무렵, 익숙하지도 않은 젓가락까지 써가며 밥도 먹고 대화를 시도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왜 이렇게 화면이 흐리냐고? 14년 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3분이 넘어가는 동영상이 5MB도 안 된다. 아들은, 촬영하느라 대답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아따?...아따!...아따^&%...라고 하며 무언가 대화를 계속 시도한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행동도 보인다.


다행히, 활용하는 어휘가 늘어가면서 아들은 더 이상 이 말을 쓰지 않았다. 이제는 비디오를 보여주지 않으면 자기는 그런 말 한 적 없노라고, 기억이 안 난다고 발뺌한다.


주변에 우리 가족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거의 없는 영국의 중소도시에 살다 보니 아들이 처음 내뱉은 황당한 말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부모 품을 떠나 낯선 사람과 낯선 환경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들을 달래줄 수 있는 TV나 동화 캐릭터, 자주 쓰는 단어를 알려달라는 어린이집 원장의 요청이 있었다. 


음...당시 아들이 좋아하던 TV 방송은 <Lazy Town>과 스파이더맨 시리즈다. 


레이지 타아운 ~~

스파이러매앤 ~~


이렇게 좀 과장되게 소리치면서 TV 화면의 주인공처럼 손짓, 몸짓까지 해주면 아들은 울다가도 울음을 그칠 정도로 마법의 효과가 있었다. 아무리 아빠를 좋아하는 아들이라도 TV 캐릭터 흉내와 동화 구연, 노래만큼은 엄마 솜씨를 훨씬 더 인정했다.


이 과장된 소리와 몸짓을 특히 강조하며..."손동작까지 반드시 곁들여 아주 생동감 넘치게 외쳐야 하거든요"...책 읽듯 대충 따라 하는 어린이집 직원에게 연기 지도까지 해주며 진지하게 알려줬다.


그런데 아들이 자주 쓰는 단어를 알려달라고? 


아들이 완벽하게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아따' 밖에 없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주지? 그리고 그 뜻은 뭐라고 변명하지?...Gosh?...Damn it?...이제 겨우 말을 배운 아이에게 이런 단어를 가르쳤다고?...(제가 그런 게 아니거든요)...영국인들이 아따를 발음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따'는 어린이집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부끄럽고 우리 가족의 흑역사가 될 것 같아 포기했다. 대신, 아따가 아닌 '아빠'와 '엄마'를 알파벳 표기로 적어줬다. 발음을 가르쳐 달라고 하길래 알려주긴 했는데 수차례 연습한 끝에...아파...움마...정도로만 가능했다. 아따라는 단어를 알려줬다면 어떡할 뻔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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