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뒤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오기로 되어 있는 A의 말이다.
영국에 정착하기 위해 준비할 사항이 무엇인지 내게 수시로 연락해 물어보던 사람이다. 영국의 기후가 어떠하며 그래서 어떤 옷이 필요한지, 뭘 챙겨가야 하는지, 아이 학교는 어떻게 등록하며, 집을 구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등등...
영국에 오는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질문하는 내용이기에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반복적으로 해오던 답변을 A의 사정에 맞게 정리해 보내줬다. 이 정도까지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A가 대뜸 자동차 이야기를 꺼내면서 고민에 빠졌다.
영국에서 자동차를 소유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행정 절차와 교통 법규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자동차 구매에 대해서는 답변하기 망설여졌다. 그런 일을 굳이 미리 할 필요가 있나 해서다. 아니, 오히려, 미리 해서는 안 된다고 봐서다.
영국에 살다가 귀국을 앞두고 있는 한국인이 차를 내놓는다는 소식에 A가 관심을 가진 것이다.
실물을 보지도 않고 사겠다니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서 말이다. 유학생들끼리 교류하는 웹사이트에서 알게 된 사람으로, 마침 A가 정착하려는 지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차 주인이 영국을 떠나고 몇 주 뒤 A 가족이 해당 지역에 도착하는 셈이니, 서로 합의만 된다면 정말 편리한 매매 방식이라 여긴 거겠지.
편리한 거래 방식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현명한 거래라 할 수 있을까?
결과만 놓고 따지면, A는 몇 년간 골칫덩이가 될 물건을 거금에 사들인 셈이다. '차 없이는 하루도 못 산다'라고 하던 사람이 차는 집에 모셔놓고 대중교통으로만 돌아다녔으니. 자동차 유지비도 비싸지만 대중교통비도 만만치 않게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말이다.
고가의 물품을 직접 보지도 않고 구매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영국에 와서 자동차를 구매해도 늦지 않다.
자동차에 문제가 발견되면 이를 따지기 힘들어 골치 아프다.
내가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A는 결국 자동차를 사고 말았다. 자기 뜻대로 진행할 거면 나한테 왜 문의했나 싶을 정도다.
자동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A가 애초 기대했던 것처럼 영국에 오자마자 차를 몰고 다닐 수 있었을까?
우선, 자동차 명의 이전을 해야 하는데 당시 영국에서는 상당수 서류 절차를 우편으로 진행하던 때다. 명의 이전을 알리는 서류를 작성하여 영국 운전면허청에 보내면 새로운 자동차등록증이, 이 또한, 서신으로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영국에서 자동차를 소유하려면 자동차 등록이나 명의 이전 말고도 보험료 납부, 자동차세 납부, 정기 점검 (MOT)을 거쳐야 한다. 이 셋 중 하나라도 무시하면 도로 주행이 불가능하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영국에서 중고차를 광고할 때 자동차세 납부와 정기 점검 여부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이전 소유자가 투자했던 걸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이 싸다는 이유 만으로 중고차를 구매했다가, 알고 보니 정기 점검 시기를 놓친, 그것도, 폐차 직전의 자동차라, 구매가보다 훨씬 더 비싼 돈을 내고 정기 점검을 받아야 할 수 있다.
영국에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영국의 느린 문화를 갑갑해한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출신이냐에 따라 반응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다. 이들 중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특히 더 힘들어하지 않겠는가.
내가 만난 한국인 중에는 특정 분야에 지나치게 집착하려는 이가 간혹 있었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니, 제삼자의 눈에는 '집착'으로 보인다.
내가 우려하는 건 한 분야에 너무 집착하다가 더 중요한 걸 놓칠 수 있다는 점이다. A의 경우 자동차에 집착하다가 고물 차를 비싼 돈 주고 사지 않았나.
집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가족과 함께 영국에 온 B의 말이다.
생소한 영국 문화 중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이 아마 집 구하기 과정일 테다. 집 (여기서는 월셋집)을 고른 순간부터 계약, 입주까지 최소 2-3주가 걸린다.
그런데, 집을 고르는 시간도 별도로 고려해야 한다.
희미한 기억이나마 내가 한국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다가 목돈을 마련하여 전셋집으로 옮긴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부동산 사무소에 들른 당일 공인중개사가 내 조건에 맞는 집을 보여주는데, 내가 원하기만 하면 당장 계약도 가능했다. 그게 정식 계약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주일 뒤 다른 집을 구해 들어갔다.
영국에는 전셋집이란 개념은 없으므로 월세 계약만 놓고 따지면, 집을 보는 일 자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한국에서처럼 부동산 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집 좀 보여주세요'라고 요구한다고 당장 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빈 집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집주인의 허락을 사전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입자가 거주하는 집이라면 세입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1. 내가 부동산 사무소에 연락해 XXX 조건에 맞는 집을 구해달라고 한다.
2. 부동산 사무소 직원이, 집주인 (혹은 세입자)과 상의한 후 내게 연락 주겠다고 한다.
3. 다시 연락한 사무소 직원이 X월 X일 괜찮냐고 묻는다.
4. 위 날짜에 집을 보러 간다.
이런 절차를 거쳐야 집을 볼 수 있다. 1-4번까지의 절차를 단 며칠 만에 진행할 수도 있지만, 중간에 공휴일이나 복잡한 문제가 끼면 일주일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가령, 세입자가 여름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하면 이들이 답변을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럼, 집을 3-4개 정도 보는데 한 달이나 걸리겠거니 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니다. 위 절차를 교묘하게 활용하면 10~20개의 집도 일주일 만에 볼 수 있다.
여러 부동산 사무소 정보를 골고루 검색해 마음에 드는 집을 한꺼번에 골라낸 뒤 집 주소로 형성되는 동선을 바탕으로 집을 찾아갈 날짜, 시간을 정해 계획표로 만든 상태에서 부동산 사무소에 연락하면 된다. 내가 정한 날짜나 시간이 집주인/세입자와 맞지 않다면 계획표 속 빈 공간으로 옮기면 된다.
이런 식으로 집을 보는 동선, 날짜, 시간에 맞춰 계획을 짜면 하루에 최대 7-8개씩 집을 볼 수도 있는 셈이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의 이런 계획을 알려줬더니 B가 곤란하다고 했다. 집 구하는데 일주일씩 시간을 쓸 수 없다는 답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더 쓰라 강요할 수는 없으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B는 가장 먼저 자신의 눈에 들어온 집을 한 번 보고는 곧바로 계약했다.
계약 과정에 내가 참여하지 않았으니 내막은 모르지만 나중에 들은 소식으로는, 1년 동안 살기로 계약한 집에서 B 가족은 반년도 살지 못하고 나갔다고 한다. 아무리 난방을 빵빵하게 틀어도 창문과 천장에서 외풍이 들이닥치니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아니다. 8월에 계약할 때만 해도 집이 조금 낡은 것이 뭔 대수랴 싶었겠지만, 몇 개월 뒤 들이닥친 추위는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한겨울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지낼 정도로 따뜻한 한국식 아파트에 적응해 있던 사람이라면 전형적인 영국식 주택에서 맞이하는 겨울 날씨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다. 난방 효율마저 떨어지는 낡은 집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B가 계약을 중단하고 새 집을 구해 들어갔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길 수 있지만...
영국의 월세 제도에서는 정해진 계약 기간 전에 계약을 종료할 수 없다. 세입자가 도중 집을 비우는 거야 뭐라 할 수 없지만 그 기간 동안 월세는 계속 내야 한다는 뜻이다.
12개월 계약을 한 집에서 반년도 살지 못하고 나가다니 그러고도 월세를 계속 내야 하다니 엄청난 골칫덩이가 아니겠나.
영국에 오는 사람마다 어떤 형태로든 조급증을 조금씩 보이기 마련이다. 이건 나도 마찬가지다. A와 B처럼 집과 자동차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고, 자녀가 다닐 학교에 집착하는 사람, 골프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생소한 문화에 적응하려면 조금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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