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얼마나 어릴 적이냐면...
영유아를 둔 가정을 대상으로 자선단체에서 책을 무료로 나눠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아들은 최초로 자신만의 책을 소유하게 되었고 나는 나대로 아들의 독서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책이 집에 도착하자 처음에는 물고 빨고 만지며 노는 장난감 취급을 하더니, 부모가 펼쳐놓고 읽기 시작하자 아들은 눈을 반짝이고 발가락까지 꼼지락거리며 흥미로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옆에 앉혀놓고 소리 내어 책을 읽어 주는 방식은 아들이 성장하여 스스로 책을 읽을 때까지 이어졌다.
아직 걷지도 못해 책장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형편이면서 아들은 꼭 이 코너에서 책을 골라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노란 자동차 모형의 책장이 마음에 들어서일까, 자기가 읽을 만한 책은 없는데도 아들은 유독 이 코너를 좋아했다.
동네에서 유일한 한국인 가정 출신이요, 영국인의 눈으로는 외모 차이를 구별 못하는 한중일 아시아계마저 거의 없는 곳이라, 아들은 어디를 가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도서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으면 곳곳에서 귀엽다는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다. 아들의 놀이터였던 셈이다.
책에 대한 아들의 관심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TV를 보다가도 재미가 없다며 꺼버리고 그 시간에 책을 펼쳤으니. 학교도 가야지 숙제도 해야지 밤 8시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 초등학생이 하루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여유 시간마저 독서에 쏟는다고 하면 놀랄 수밖에.
그러던 아들의 태도는 중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게임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다.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던 책이 건만, 아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는 냉담해졌다. 대신, 재미가 없다던 TV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게임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방송을 주로 골랐다. 책을 찾긴 해도 이 또한 게임을 다룬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게임 작전과 규칙 분석에 집중했다.
당시 아들 또래 사이에서 마인크래프트와 포트나이트가 유행했다.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접속해도 대기 중인 친구가 있다고 할 정도로 게임에 빠져 사는 청소년이 그만큼 많았다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우리 애는 원래 착한데 나쁜 친구를 사귀어서요'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아이는 착하고 남의 아이는 나쁘다는 단순 논리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아이 또한 게임을 하면서 누군가와 교류하고, 영향을 주지 않았겠는가.
아들이 성장하는 동안 부모 입장에서 수 차례 위기를 맞이하였지만, 이때만큼 아들 때문에 깊게 고민하고 아들과 길게 대화 나눈 시절은 드문 것 같다.
길고 긴 가족 토론 끝에, 주말에 한해 일정 시간 동안만 아들이 게임을 하도록 허락해 줬다.
몇 주간 별문제 없이 지나가는 듯했다. 늘 게임에 빠져 사는 다른 아이에 비해, 우리 아이는 정해진 시간에만 하니까 괜찮으려니 했다.
문제는... 학교와 공부, 독서를 대하는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게임에 몰입하던 태도를 주말로 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게임에 대한 열망은 늘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 아들의 관심사를 다른 분야로 돌리기는 힘들었다.
게임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아들이 예전에 관심을 가지던 분야에서의 진행 속도가 느려지거나 아예 정체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들이 2~3일에 한 권씩 읽어 낼 정도로 좋아하던 추리소설 시리즈가 언젠가부터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은 일이다. 몇 주가 지나도록 동일한 책이 계속 아들의 책상에 머물고만 있었다.
전체 열다섯 권의 책 시리즈에서 중간 즈음 도달했을 무렵인데, 이걸 다 완독하고 나면, 당장 어떤 책을 골라줘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아들이 빠르게 읽어내던 책이지만, 이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존재가 된 것이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겠다 결심한 순간이다.
아이에게 미치는 게임의 폐해를 두려워하면서도 막무가내로 게임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을 자기만 못한다고 놀림당할까 두려워하는 아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어서다.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와 담판을 벌이려니 부모의 일방적 의견 제시나 명령으로는 부족했다. 아이를 논리적으로 설득시킬만한 정보를 수집하고, 아이가 반박할 것에 대비해 적절히 응수할 수 있도록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섣불리 나서지 않고 며칠간 고심한 끝에 아들에게 빅딜을 제시했다. 우리 모자에게는 말 그대로 '빅딜'이었다.
"아들 이거 어때?”
간단히 말해, 독서에 투자한 시간만큼 TV와 게임 시간을 주겠다는 뜻이다.
가령, 책을 한 시간 읽으면 TV 30분 + 게임 30분의 시간이 생기는 식이다. TV 대신 게임만으로 한 시간을 채워서는 안 되며, TV만 보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정해진 취침 시간을 어겨도 안 되기에, 깨어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이래저래 엄마의 지나친 간섭이라 반발할 줄 알았는데, 아들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줬다.
아들 입장에서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기만 하면 되는 데다, 주말에만 허락되던 게임을 주중에도 할 수 있다니 자기로서는 손해 볼 일 없다 여긴 듯하다.
우리 모자의 역사적인 빅딜이 성사되는 순간이지만 여기까지는 대략적인 밑그림만 그린 것일 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실무회의에 들어갔다.
우선, 독서 시간을 어떻게 측정하느냐부터 결정해야 했다. 같은 분량의 페이지라도 누군가는 10분 만에 읽고, 다른 이는 20분 만에 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책마다 활자 크기, 글 분량도 다르니 객관적인 선정 기준이 필요했다.
다행히, 학교 과제를 스마트폰에 저장하는 방법을 배운 아들의 가르침 덕택에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이미지 속 문자를 편집 가능한 문자로 전환하는 앱이다.
↑ 문서를 사진으로 찍은 뒤 앱에서 가동하면 전자 문서에 복사해 넣을 수 있는 문자로 변환해 준다.
이름 그대로 영어 문장의 맞춤법, 문법을 검사해 주는 앱인데 글자수와 글 난이도에 따라 읽는 시간을 계산하는 기능도 있다. 이 또한 아들이 찾아낸 앱 기능으로, 책에서 앱을 활용하면 한 페이지 당 독서 시간을 산정해 준다.
↑ 이런 앱을 직접 찾아내고 사용법을 엄마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들이 자신감을 키우는 효과도 있었다.
위 두 앱으로 얻어낸 정보에 이어 날짜와 책 제목, 시작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등의 정보를 엑셀 파일에 입력했다. 이를 바탕으로 독서 시간 (즉 TV + 게임 시간)을 산정하는 등, 나름 방대한 작업을 두 모자가 함께 해냈다.
↑ 책 제목과 페이지, 읽은 시간이 기록된 '독서기록장'이다.
이 정도 문서 활용은 나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아들의 참여를 최대한 유도했다. 엄마의 일방적 지시가 아닌 빅딜을 성사시킨 동지끼리 협의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이 기록장을 매일 사용해야 하는 아들의 입장도 고려했다.
생긴 건 평범해도,
- 게임에만 몰두하려는 아들의 관심사를 책으로 돌리려는 엄마와
-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게임을 더 많이 해보려 하는 아들
이 둘의 눈물겨운 콜라보로 탄생한 작품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 빅딜이 성사된 다음 날 아들의 모습이다.
이른 아침, 공부방에 불이 켜져 있길래 문을 열어보니 아들이 잠옷 차림으로 이렇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예전 '책 그만 읽고 자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책에 빠져 살던 시절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내가 너무 성급한 판단을 했을지 모른다. 사춘기와 새 학교, 새 친구, 게임까지 모두 한꺼번에 맞이하며 혼란을 겪었을 아들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어야 하나 싶기도.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난 지금도 두 모자가 같은 책을 읽으며 어떤 형태로든 독서 프로젝트는 진행하고 있으니, 조금 변형되긴 했어도 우리 모자의 '빅딜'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lex Haney on Unsplash
끝